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2 | 케임브리지 세계사 6

 

고대의 도시들 2 | 케임브리지 세계사 6 | 노먼 요피 외 고대의 도시들 2 | 케임브리지 세계사 6 | 노먼 요피 외 - 10점
노먼 요피 (지은이),류충기 (옮긴이)소와당

PART 4 초기도시와권력의분배
CHAPTER 15 고대남아시아지역에서도시의위상
CHAPTER 16기원전제1천년기그리스의도시들
CHAPTER 17 다양한도시들: 제니-제노와아프리카의도시화
CHAPTER 18도시의권력구조:위계질서와그불만139
 
PART 5 초기도시,창조의공간
CHAPTER 19바그다드, 제국의기반(762~836 CE)
CHAPTER 20예루살렘: 반석위의도시, 상상속의도시
CHAPTER 21흙과나무로만든도시뉴카호키아:물질성의역사적의미
CHAPTER 22도시의상상력

PART 6 고대제국의도시들
CHAPTER 23신아시리아의수도:제국의수도에서코즈모폴리턴도시로
CHAPTER 24멕시코-테노치티틀란:메소아메리카최후제국의수도, 기원과변화
CHAPTER 25제국도시의전형: 로마의부상과제국의무게
CHAPTER 26제국의도시들
CHAPTER 27결론: 초기도시의의미

 


58 초기 역사 시대 도시들 중에는 《베다》에 등장하는 신격을 위한 성지나, 붓다(Buddha)나 마하비라(Mahavira) 같은 성인의 일생과 관련되는 중요한 곳이 많았다. 붓다와 마하비라는 초기 국가가 형성되는 혼란의 시기를 살았던 인물이며, 살아생전과 사후에도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렸다. 

114 학자들은 초기 아프리카 도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분명 인식의 문제와 이해의 문제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식민지 이전 시기 사하라 이남 지역의 도시 형태는 도시들끼리도 전혀 달랐을 뿐만 아니라 학자들이 예상하는 고대 도시의 형태나 기능과도 완전히 달랐다. 

141 고대 도시의 통치 체제가 반드시 수직적 질서, 즉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 다수의 백성을 거느리고 다스리는 방식에 의거했다는 기존 상식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144 고대 문명과 관련한 여러 가지 선입관이 형성된 첫 번째 이유는, 동양은 전제군주의 횡포 아래 놓여 있었다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오랜 유산 때문이었다. 

145 몽테스키외의 환경결정론이나 헤겔과 밀의 목적론적 역사학에서 이와 같은 관점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갈래가 다르기는 하지만 베버가 언급한 가산국가(patrimonial state)의 형성에도 같은 관점이 스며들어 있다. 

149 그리스의 도시국가, 인더스 문명의 도시, 아프리카의 구역별 분업 도시 등에서 위계질서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149 오히려 위계질서의 구축을 금지하거나 완화하는 방식이었고, 권력 구조의 다양성이 유일한 혹은 주도적인 경향이었다. 

152 가장 흔히 지적된 요소는 궁궐과 사원의 흔적이 불분명하다는 점이었다. 또한 왕실이나 엘리트 계층의 정교한 무덤 건축물이나 왕권의 증거, 전쟁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293 오래도록 고질적이었던 문제가 제국의 붕괴를 앞당겼다. 아시리아 제국은 왕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중앙 집중식 권력 체제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293 그들은 먼 지역으로부터 식량을 끌어와야 했는데, 그러자면 상당량의 식량을 운반하고 선적하고 저장할 복잡한 시스템이 필요했다.

361 우리 연구에서 시급한 주제는 로마를 오늘날의 사회과학적 시각에서 재검토하고, 로마 제국의 특수한 사례를 복합사회(complex societies)의 역사적 전개라는 보다 넓은 차원 속에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362 로마는 이탈리아의 다른 주요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후기 청동기 시대인 기원전 제2천년기 말에 정착이 시작되었고, 이후 기원전 제1천년기 초엽 몇 세기 동안에 도시국가로 발전했다. 

364 기원전 6세기 말에서 기원전 5세기 초까지 로마와 이웃 도시국가들의 정치 체제는 대단히 불안정한 단계로 접어들었다.

365 엘리트 계층들끼리 매년 군사 및 공공 지도부 선거를 두고 경쟁했다. 그러나 일단 선출되면 자신이 속한 분파나 가문의 이익에 충실한 경우가 많았다. 당시는 지중해 중부의 세계 전체가 근본적 변화를 겪던 시기였다. 카르타고와 시칠리아섬의 시라쿠사 역시 영토 확장의 대열에 뛰어들었다(곧이어 이탈리아반도의 다른 도시국가들도 참여했다). 목표는 다른 도시국가를 합병하는 것, 그리고 직접 지배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365 베이이의 많은 시민들이 로마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머지않아 로마에서 기존의 로마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는 심각한 구조적 변화를 촉진했다. 승전국 로마도 급격히 확장되는 영토에 맞추어 신속히 적응해야 했다. 게다가 고고학적 기록을 통해 확인되듯이, 정복 전쟁 이후 소규모 농가의 수와 밀도가 급격히 증가했다. 이는 전통적으로 로마의 식민지 건설 결과로 해석되었지만, 오늘날 밝혀진 바 소규모 농장의 확산은 지중해 중부 지역의 전반적 유행이었을 뿐 초기 로마 제국의 확장에 따른 국지적 현상이 아니었다. 

366 수많은 도시국가들과 개별적으로 일대일 계약을 체결했을 뿐 명확한 연합체를 창설하거나 분명한 제국적 정치 질서를 구축하지는 못했다. 로마인이 다른 도시국가를 일컬어 동맹이라고 했던 사실은 의미가 있다. 

367 막강한 전쟁 기계가 돌아다니면서 발에 걸리는 모든 것을 분쇄해버렸을 것 같은 이미지의 기존 상식은 크게 보아 로마 판타지에 불과하며, 민족지나 고고학 자료를 통해서도 전혀 확인된 바가 없는 주장일 뿐이다. 사실은 상식과 달랐다. 당시 지중해 중부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해가던 모든 중심지 (로마, 시라쿠사, 카르타고, 마케도니아)는 눈덩이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즉 일단 병합에 성공한 뒤에 그다음의 병합은 좀 더 쉬운 일이 되었다. 

367 이방인을 자국의 시민으로 받아들이는 뿌리 깊은 정책 덕분에 분명한 장점이 있었는데, 같은 시기의 그리스 통치자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정책이었다.  

368 로마 주변 지역은 도시 밀집도가 높았기 때문에 팽창의 초기 단계에서 육로를 이용하는 데 유리했다.

372 기원전 140년대 로마는 지중해 연안의 거의 모든 도시를 장악했다.

374 로마가 채택한 일반적 전략은, 도시 내부와 직접적 배후지의 일들은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두되, 도시국가들 사이의 틈새에 개입하는 방식이었다. 즉 세금을 걷는 대가로 도시들 간의 연결, 통합, 촉진, 기여, 중재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375 로마 제국의 육상 작전(push inland)은 해상 작전과 전혀 다른 전략을 필요로 했다.

382 이탈리아 중부와 모로코와 오스트리아는 같은 모델로 해석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최소한 도시화가 먼저 진행된 뒤에 정복을 당한 지역과, 정복된 뒤에 도시화가 진행된 지역 혹은 전혀 진행되지 않은 지역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386 이탈리아반도의 중심성은 계속 줄어들다가 마침내 사라져버렸다.

386 중심은 서서히 동방으로 이동했고, 로마의 경험은 막을 내리는 대신 유럽 대륙에 독특한 역사적 여정을 남겨두었다.

387 놀랍게도 로마에 관한 기존 이미지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다른 제국과 확연히 달랐던 로마의 특색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민족적 문화적 포용이었다. 로마인은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395 예컨대 에드워드 루트왁이 10여 년 전에 제시한 이론' 영토 제국(territorial empires)과 헤게모니 제국(hegemonic empires)의 구분이었다. 

414 제국이 정점을 지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하는 문제는 에드워드 기번 이후로 많은 역사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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