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S. 마컴, C.K. 로버트슨: 질문과 답변

 

질문과 답변 | 이안 S. 마컴.C.K. 로버트슨 질문과 답변 | 이안 S. 마컴.C.K. 로버트슨 - 10점
이안 S. 마컴,C.K. 로버트슨 (지은이),양세규 (옮긴이),주낙현 (해설)비아

감사의 글
서론
1. 신앙
2. 윤리
3. 예배와 성당
4. 성서
5. 성사
6. 공동기도서
7. 교회
8. 세계성공회
9. 마지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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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20 잉글랜드 종교개혁
이러한 발전의 중심에는 「공동기도서」가 있었습니다. 공동기도서의 초판은 헨리 8세가 서거하고 왕자 에드워드가 즉위한 지 2년 후 발간되었습니다. 잉글랜드 교회의 최고위 성직자인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헨리 8세가 직접 임명한 토머스 크랜머가 남긴 놀라운 작품이었습니다. 대학의 신학자였던 크랜머가 왕의 사적 문제, 곧 첫째 왕비였던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기 위해서 교황의 허가가 불필요하다는 신학적이고 정치적인 해법을 제시하자 헨리 8세는 그에게 주목했습니다. 크랜머는 국왕에게 필요한 것이 교황의 허가가 아니라, 박학할 뿐 아니라 잉글랜드 고유의 사회적, 정치적 환경에 대한 감각이 있는 잉글랜드의 신학자들과 논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유구한 전통은 물론 소중하지만, 지역적 맥락과 이성적 판단 역시 중요하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유럽 대륙의 종교개혁이 그리스도교 예배와 조직에 광범위한 변화를 야기하고 있을 동안, 잉글랜드에서는 다소 미묘하지만 혁명적인 종교개혁이 퍼져 나갔습니다. 교황이 아닌, 국왕이 교회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잉글랜드 교회는 더는 로마 교회에 헌금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또한 잉글랜드 교회의 성직자들은 결혼하고 자녀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개정할 수 있었습니다. 첫 공동기도서 서문에 크랜머가 쓴 첫 문장은 이를 잘 드러냅니다.

아무리 잘 고안하고 굳건하게 구축했을지언정, 인간 지혜의 소산 중 (시간의 흐름에 따라) 타락하지 않은 것은 없다.

상황이 변화했기에 수정은 불가피했습니다. 크랜머가 남긴 가장 뚜렷한 변화의 흔적은 언어에서 발견됩니다. 이제 잉글랜드 교회는 전례를 라틴어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라틴어는 로마 교회 당국자들이 오랜 시간 예배의 유일무이한 언어로서 인정해 온 언어였습니다. 그러나 수정 이후 교회의 전례는 토속어, 곧 민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이루어졌습니다. 기도서는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과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모든 내용을 담았습니다. 즉 기도서에는 아침기도와 저녁기도, 감사성찬례뿐 아니라 세례, 견진, 혼인, 병자를 위한 기도, 그리고 장례 예배의 형식이 모두 들어갔습니다. 요일별로 지정된 독서 본문인 '특정문'과 당일의 지향을 담은 기도인 '본기도' 또한 수록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크랜머는 주교와 사제직을 유지하되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된 동일한 자료에 모두가 접근할 수 있게끔 함으로써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간극을 좁혔습니다. 그런 면에서 기도서는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공동기도서는 문학적으로도 탁월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제임스흠정역 성서과 더불어 공동기도서는 영어를 새롭게 확립하는 데 공헌했습니다. 공동기도서를 통해 이전 영어는 표현하지 못했던 넓이와 깊이가 생겨났습니다. 비단 어휘만 증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공동기도서는 글쓰기의 뉘앙스, 리듬, 정교함과 유려함을 갖고 있었고 이 모든 특징은 영어가 풍요로워지는 데 기여했습니다. 크랜머는 성서에 바탕을 두고 로마 교회와 루터 교회의 전례 구조와 형식을 이어받아 새로운 단계의 도약을 이루었습니다. 그리하여 성직자로 서품받은 이들은 “자신의 신앙심을 고취하고", 신자들은 "참된 경건함에 대한 사랑으로 보다 뜨거워지도록" 했습니다. 

또한 크래머는 성서를 맥락과 무관하게, 특정한 신학적 진술을 뒷받침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했던 당대인들과 달리, 보다 훈련되고 경건한 방식으로 성서의 복잡성에 다가가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크랜머가 보기에 성서는 (당대인들의 방식처럼) 통째로 삼키지만 아무 영양가도 없는 솜사탕이 아니라 잘 씹어서 음미해야 하는 고기였습니다. 어느 본기도에 나오듯, 그는 모든 그리스도교인이 성서를 읽고, 표시하고, 배우고, 나아가 내적으로 소화하도록" 부름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죄와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 크랜머는 유럽 대륙의 종교개혁가들과 뜻을 같이하면서도 온 인류를 향한, 창조에 뿌리를 둔 하느님의 깊은 사랑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 본기도에서 이를 표현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어떤 것도 미워하지 않으시며 진실로 뉘우치는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랜머는 처음 시도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몇 년 뒤 그는 공동기도서의 첫 개정판을 내놓았습니다. 1552년 공동기도서는 어조나 느낌이 한결 더 개신교 색채를 띠었습니다. 헨리 8세는 이 기도서가 지나치게 개신교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신앙이 가톨릭 신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로마 가톨릭과 결별했던 이유는 가톨릭 신앙을 반대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교권을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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