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리 핀카드: 역사는 의미가 있는가

 

역사는 의미가 있는가 | 철학의 정원 66 | 테리 핀카드 역사는 의미가 있는가 | 철학의 정원 66 | 테리 핀카드 - 10점
테리 핀카드 (지은이),서정혁 (옮긴이)그린비

감사의 글 … 5
들어가는 말 … 9
1. 예비 개념: 자의식적 동물의 논리 … 25
2. 관념론자의 역사 개념 구축 … 95
3. 헤겔의 잘못된 출발: 실패한 유럽인으로서 비유럽인 … 119
4. 유럽의 논리 … 157
5. 역사에서 작동하는 무한한 목적들 … 299
참고문헌 … 361
옮긴이 해설 … 375
찾아보기 … 383

 


10 헤겔의 역사 철학의 한 부분, 즉 그가 '고대와 근대 사이의 결정적 단절'을 제안한 점, 그리고 '근대성'modernity 자체가 '인류 시대의 기본 단절'을 보여준다는 생각은 여전히 어느 정도 통용되고 있다. 물론, 이 주장은 헤겔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며, 홉스, 마키아벨리, 데카르트, 토크빌 등에서도 비슷한 견해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근대성'이 '인간의 자기 이해의 근본적이며 되돌릴 수 없는 전환'을 나타낸다는 견해와 같은 것이, 헤겔의 논의 방식에서 아마도 기껏해야 가장 분명히 공식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성'에 대한 헤겔의 주장에 관해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예를 들어 '헤겔이 역사에서 발견한 것으로 추정되는 필연성'에 대한 그의 다른 견해를 굳이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그리고 종종 받아들이지 않는다). 

헤겔의 역사 철학에 대한 수용은 또한 '일련의 광범위하고 게으른 해석들'로 인해 곤란을 겪었다. 이 중 가장 게으른 해석은, 헤겔의 철학 전체가 일종의 '정립 - 반정립 - 종합'의 운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역사는 바로 그러한 운동이라고 주장하는 '오랫동안 불신받아 온 생각'에 의존한다. 페르시아가 정립이고 그리스가 반정립이며 로마가 종합이라고 말함으로써 (또는 그리스가 정립이고 로마가 반정립이며 게르만이 종합이라고 말함으로써 정확히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가 명확하게 밝혀진 적은 없으며, 헤겔 자신이 실제로 그렇게 말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은, 그것['정립-반정립- 종합'의 운동]을 명확히 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거의 똑같이 게으르게 헤겔을 읽으면, 헤겔은 역사를 목표(자유, 정신의 실현 등)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1807년경까지는 역사의 모든 계기가 그 목표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그 목표를 실현하는 방법에 관한 퍼즐에 작은 조각들로 기여했을 수 있으며, 그러고 나서 이제 드디어 목표에 도달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은 헤겔 철학을 가르치기 쉽고(역사에서 한 시기를 골라서 '근대 유럽'이 아니라는 이유로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면서, "자 보란 말이야, 헤겔의 이론을 완전히 파악했어"라고 생각한다), 이해하기 쉽게 만든다(역사도 다른 목표 지향적 활동과 마찬가지로 때로는 우여곡절을 거쳐야만 목표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러한 견해는 최근 역사의 종말[목적]'end에 대한 다소 공허한 논쟁에 영향을 미쳤다. 내부 계획에 따라 도토리가 참나무로 성장하는 것과 같은 은유에 의존하는 것처럼, 이처럼 게으른 해석을 넘어서는 좀 더 정교한 설명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결함을 보여준다. 그러한 설명이 아무리 이해하기 쉽고 가르치기 쉽다고 해도, 그러한 설명으로 인해 헤겔의 견해는 극단적으로 전혀 믿을 수 없고 경험적으로도 공허한 것이 되어 버리며, 헤겔 당대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을 보여주는 실례와 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 

마치 헤겔이 역사를 하나의 단일하고 일원화된 '사태'나'발전'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헤겔의 역사 철학을 취급하는 경향도 있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훨씬 더 정교한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하나의 '사태'가 어떻게 목적론적으로 발전했는지에 대한 생각을 얻기 위해 헤겔 체계의 나머지 부분들에 주목했으며, '도토리-참나무'라는 은유는 그 의미를 포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자연스럽게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헤겔 체계의 나머지 부분들에 대한 매우 정교한 어떤 해석들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헤겔이 자신의 역사 철학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바에 부합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해석은 결국 헤겔의 『논리학』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헤겔의 역사 철학에는 '역사적 관심사' 외에 다른 의미가 있는가? 나는 그러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은 헤겔이 '무한자infinite로 간주된 자유freedom'라고 말한 것(이것은 표면적으로는 결코 명확하지 않은 진술이다)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견해가 헤겔의 '주체성에 대한 사회적 개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주체성의 본질에 대한 헤겔의 사회적, 역사적 관점은, 그것을 적절히 표현하자면, (헤겔에 따르면) 역사에는 실제로 '무한한 목적', 즉 '정의justice의 확보'라는 목적이 존재하며, 근대에는 이 목적이 '자유로서의 정의'justice as freedom에 대한 관심으로 변모했음을 보여준다. 자유는 원래 역사의 목표가 아니었지만, 근대적 삶의 원리가 되었다. 이는 얼핏 보면 헤겔이 자신의 이야기를 제시하는 방식, 즉 어떻게 역사의 긴 과정이 대부분 '다양한 정당성의 외피'를 쓴 '부당한 지배의 이야기'인지, 어떻게 다양한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한 '권력의 사용'은 대개 정의와는 거의 관련이 없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제시하는 방식과 상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과 지배에 관한 이야기 배후에는 '정의에 대한 염려' concern for justice가 있으며,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정의는 '집단적 노력에서 사람들 사이에 적절하고 선한[좋은] 질서를 갖추는 일'에 대한 추상적 개념을 포함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그러한 질서가 그 자체로 '일련의 인륜적 원칙을 구성하는 우주적 질서'에 부합하는 것으로 해석되거나, 또는 '그 자체로 공정한 일련의 규칙에 따라 작용한다'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헤겔의 세계사 서숲에서 정의 자세는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대부분 역사는 '정의의 무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인정recognition과 정의justice를 둘러 싼 투쟁이 [역사라는 이야기 배후에 자리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6 이 글에서 나의 목표는, 헤겔이 이 [세계사라는] 주제에 대해 강의하는 동안 어떻게 생각을 바꾸었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연구는 이미 완료되었다. 여기서는 독일 관념론의 다른 역사 철학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루지 않는다. 그것 역시 훌륭하게 수행되었다. 헤겔의 역사 철학이 가장 유명한 그 파생물인 '마르크스의 역사이론'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도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저술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나의 관심은 무엇보다 헤겔의 사상이 그가 설정한 기준에 부합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외부에서 가져올 수 있는 기준에서가 아니라, 헤겔의 사상이 그 자체의 기준에서 성공할 수 있는지와 관련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은 '헤겔의 저작에 대한 헤겔주의적 논평'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특히 자료에 접근하는 다른 방식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기준들이 그 자체로 토대를 지니는 것으로 볼 수 있는지도 이 책은 다룰 것이다. 

헤겔 자신은 이 주제에 대해 무엇을 말해야 할지 예상하면서, 그는 '이해 가능성'intelligibility 자체의 본성에 대한 고찰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이 바로 『논리학』이었다. 헤겔은 '주체성 자체의 이해 가능성'에 대한 구상으로 결론을 맺은 논리학 이후, 그의 체계는 필연적으로 자연의 이해 가능성, 그리고 자연에 내재된 주체성, 그리고 자연의 다른 개체들과 점차적으로 구별되는 주체성의 이해 가능성에 대한 더 상세한 조건으로 나아가다가, 마침내 주체성이 주체성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서 끝을 맺는다. (이러한 후자의 개념에 관한 주제들이 그의 철학백과』Encyclopedia of the Philosophical Sciences의 나머지 두 권[자연철학, 정신철학]을 구성하면서 이 두 권에서 중요한 세부 사항을 채우고, 매우 추상적으로 제시된 논증을 더 정교화하여 강의에 사용하기 위한 그의 체계 전체의 개요를 이룬다. 

헤겔의 기획은, 적어도 다른 종의 관점에서는 있는 그대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그러한 사태들에 대한 종 특유의 파악을 묘사한다는 의미에서 "우리 인간은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가"와 같은 것에 대한 탐구가 아니며, 세계가 실제로 어떤 것인지에는 무관심한 순전히 개념적인 탐구도 아니다. 오히려, 헤겔의 기획은 칸트의 비판서들과, 특히 피히테의 학문론Wissenschaftslehre 의 직계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피히테의 '학문의 학문'science of science은 헤겔의 『논리학에서'설명적 타당성에 대한 일반적 설명', 즉 '설명에 대한 설명 account of accounts 이 된다. 이는 최근 무어A. W. Moore와 피핀Robert Pippin이 형이상학으로서 '사태들을 이해하기 [의미화]'making sense of things와 논리학으로서 '의미화[이해하기]의 의미화[이해하기]'making sense of making sense를 함께 취한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헤겔이 자신의 체계에 대해 언급했듯이, 그 체계의 어느 곳에서나 시작할 수 있으며, 나는 이 글에서 중간에서 출발하여 시작점으로 되돌아간 다음, 헤겔 자신이 역사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는 곳인 '동쪽'East으로 건너뛸 것이다. 이에 비해, 독자들은 헤겔의 역사서술이 시작되는 부분으로 바로 넘어가거나, 근대성의 역사가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 논하는 뒷부분으로 바로 넘어가는 등 각자가 원하는 곳에서 독서를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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