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헹엘: 십자가 처형

 

십자가 처형 | 마르틴 헹엘 십자가 처형 | 마르틴 헹엘 - 10점
마르틴 헹엘 (지은이),이영욱 (옮긴이)감은사

서문_ 극도로 처참한 십자가의 죽음: 고대 세계의 십자가 처형과 십자가 “말씀”의 “어리석음”  |  7
제1장_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 아들의 “어리석음”  |  11
제2장_ 프로메테우스와 디오뉘소스: ‘십자가에서 처형된’ 신과 ‘십자가에서 처형한’ 신  |  31
제3장_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해결하는 방법으로서의 가현설  |  39
제4장_ 극도로 잔혹한, ‘야만인들의’ 사형 방식으로서의 십자가 처형  |  53
제5장_ 로마의 ‘최고 형벌’로서의 십자가 처형  |  75
제6장_ 십자가형과 로마시민  |  87
제7장_ 반란을 일으킨 이방인들과, 폭력범들, 강도들에 대한 형벌로서의 십자가 처형  |  99
제8장_ ‘노예 형벌’  |  109
제9장_ 십자가에 처형된 순국자들과 철학적·메타포적 언어  |  133
제10장_ 그리스어권 세계에서의 십자가 처형  |  141
제11장_ 유대인들에게 있어서의 십자가 처형  |  169

 


11 고린도전서 1:18에서 바울은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 (개역성경에서는 "미련한 것" - 역주)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23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모욕적인 것"(개역성경에서는 "거리끼는 것" -역주)이며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진술하면서 이 논지를 강화한다. 이때 사용된 그리스어 "모리아"(어리석음, 미련함)의 개념은 단순히 지적 결함이나 초월적 지혜의 부족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더 많은 것들이 합의되어 있다. 유스티누스는 우리에게 이 의미를 잘 보여준다. 그는 기독교의 메시지에 담긴 불쾌함을 "미친 것"으로 달리 표현하면서도, 이 격하된 표현을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신적 지위와 구원의 의미를 믿는 기독교 신앙을 가리키는 것으로 다시 환원시켜 놓았다. 

19 본래 그리스어로 기록된 이 신탁은 플리니우스와 타키투스의 견해를 또렷하게 확인시켜준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자는 "죽은 신"─그 자체로 모순인─이었다.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단순히 죽은 신이 아니라, 한창의 나이에, 곧 일찍이 정당한 재판을 통해 범죄자로 선고받고 가장 극악한 형태의 죽음에 이르게 된 자였다. 그 신이라 하는 자는 십자가 위에서 쇠못에 박히는 고통을 견뎌야 했다. 

29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로마인이든, 다른 외국인이든, 어느 누구에게라도)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 내지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의 아들, 혹은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모순이자 불편하고 어리석은 주장으로 보였을 것이다. 

39 선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신적 본성과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수치스러운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점과 관련하여,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선포는 다신교적 혹은 단일신론적-철학적 환경이 제시하는 기독론과의 유사성이나 공통점들을 철저히 거부한다. 승귀와 승천, 심지어 부활 개념에 있어서는 저것들과 비견될 만한 점들이 있다. 하지만 신의 고통은 단순히 허구적인 것으로 보여야 하고, 이를 야기한 사람들의 악을 처벌하는 것이 즉각 뒤따라 나와야 한다. 


40 신이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이유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에 대해 거리끼는 것을 제거했던 영지주의 가현설(Doketismus)은 이 영지주의 체계들이 기독교 신조의 '시급한 헬레니즘화'에 대한 부차적인 시도라는 것을 보여준다. 

129 하나님의 아들은 도리어 십자가를 메고 자신을 따르라고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이는 하류층 사람들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오기 어려웠다. 이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고 도심을 지나 십자가에 달리게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이를 두려워했다. 

140 내가 아는 한, 십자가는 그리스 세계에서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된 바가 없다. 추정컨대, 이 단어를 메타포로서 적절하게 응용한다면 매우 모욕적인 뜻을 전했을 것이다. 

160 바울 자신도 로마시민권자로서 로마의 처형 법 및 자신의 권리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행 25:11-12). 더욱이 동방지역에서 시행된 십자가 처형에 대한 증거들로부터 우리는 로마제국의 그리스어권 지역에서도 모든 노예들과 하층민들이 십자가형에 대하여 매우 잘 알고 있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167 우리는 동방의 그리스어권 세계에서 십자가 처형이 서방 라틴어권 세계에 못지않게 공포스럽고도 혐오스러운 형벌─특히 하층민들 사이에서─로 잘 알려져 있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174 십자가형은 정치적·군사적 형벌이었다. 페르시아인들과 카르타고인들 사이에서는 특히 고위 장교나 사령관, 당연히 반역자들에게도 십자가형이 시행되었고, 무엇보다도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시민권자가 아닌 하층민들, 말하자면 노예들이나 폭력범들, 반역한 지방이나 특히 유대 지역에서 소동을 일으키는 자들에게 주어졌다. 

175 더 나아가 범죄자를 벌거벗긴 채 눈에 띄는 장소─공개적인 광장이나 극장, 높은 언덕, 혹은 범행 장소─에 공개적으로 전시함으로써 범죄자의 수치를 극도로 드러낸다는 데에도 십자가형의 의미가 있었다. 십자가형은 또한 거룩성의 차원에서도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유대인들은 특별히 신명기 21:23 에 의거하여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이 처형 방식은 다른 어떤 처형 방식보다도 결코 억누를 수 없었던 고대의 인신제사 사상과 가까이 연결되어 있었다.  

176 십자가에서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의 극한 고통에 관한 주제를 비평하거나 철학적으로 사유하려는 시도는 상대적으로 거의 없었다. 

177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에 관한 최초기 기독교의 메시지는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 자들의 고통을 하나님의 사랑과 '결속'시킨다. 이는 고대의 자료들에서도 발견된다.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수난기사'는 세기를 거듭하며 지금까지 내려왔다. 

178 이러한 하나님의 극단적인 자기비하는 복음 선포에 있어서 새롭고도 혁명적인 요소가 되었다. 이는 모욕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 모욕 안에서 하나님의 자기비하는 복음의 핵심으로 드러난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것은 고통과 희생을 위하여 한 인간이 보일 수 있는 극한의 순종을 의미한다. 

180 바울이 증언하고 있는 예수는 결코 다른 죽음으로 죽은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고 치욕적인 방식으로 "우리 모두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다." 우리 시대의 신학적인 추론에 따르면, 인간이자 메시아이신 예수의 독특한 죽음의 형태가 거리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람들은 이 거리낌을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 약화시키고, 해소하여, 길들이려 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학적 반성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고대시대에 십자가형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반추해보는 것은 오늘날 신학과 설교에서 종종 간과하는 실체에 대한 중대한 상실을 극복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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