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스타인: 유럽 역사에서 본 로마법

 

유럽 역사에서 본 로마법 | 레퍼런스 시리즈  | 피터 스타인 유럽 역사에서 본 로마법 | 레퍼런스 시리즈 | 피터 스타인 - 10점
피터 스타인 (지은이),김기창 (옮긴이)읻다

제1장 서설
제2장 고대의 로마법
제3장 유스티니아누스 법의 부활
제4장 로마법과 민족국가
제5장 로마법과 법전 편찬 작업
옮긴이의 말

 


14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편찬된 로마법 문헌들은 유럽 역사의 각 시대별로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았다. 로마법의 부흥 또는 부활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고, 중세 후기 내내 로마법의 연구와 발전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16세기에 들어서는 인문주의가 등장하면서 프랑스가 로마법 연구와 발전의 주역이 되었다. 17세기에는 네덜란드가 로마법 연구의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고, 19세기에 와서는 독일 학자들이 로마법을 또 한번 변화시켰다. 이러한 각 시기마다 로마법의 다른 측면이 강조되었다. 

17 역사적 기록이 남기 시작했을 시점의 로마는 왕정 체제였으나 기원전 6세기 말에 왕이 축출되고 공화정이 도입되었다. 이때 로마는 티베르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공동체였다. 그곳 사람들은 스스로를 그리스인들이 트로이를 함락시켰을 때 피난해 온 트로이 사람들의 후예라고 믿고 있었다. 그들의 법은 대대로 구전되어온 관습 형태로 존재했고 이러한 법은 로마인들의 민속 문화의 일부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 법은 로마 시민들에게만 적용되었고 로마 시민들만이 주장하고 원용할 수 있었다(로마법을 지칭하는 ius civile라는 라틴어는'로마 시민들 cives'의 '법 ius'이라는 뜻이다). 

18 이런 갈등과 논란의 결과 기원전 451년에 10인 위원회가 구성되어 관습법을 성문화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이것은 아테네의 유명한 솔론법을 모델로 삼았다. 10인 위원회는 12판법이라고 알려진 법령집을 완성해서 로마 시민들의 회의체인 민회에 제출하여 승인을 받았다. 12판법을 승인한 민회는 옛날 법을 변경하고 새로운 법을 도입한다고 여긴 것이 아니라, 과거부터 계속 존재했던 법을 더욱 명확하게 확정한다고 생각했다. 성문화된 문건으로 채택됨으로써 12판법은 법률lex이 되었는데, 법률을 지칭하는 'lex'는 낭독한다는 뜻을 가진 'legere'에서 온 것으로서 법ius을 성문화하여 공식적·공개적으로 선포한다는 뜻이다. 

18 12판법은 우리가 아는 로마법의 시작점에 해당하며 공법과 신성법 [종교적 사안을 규율하는 법 규정]을 포함한 법의 전 영역을 다루는 규정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원문은 남아 있지 않지만, 12판법 구절들을 인용한 후대 문헌들이 워낙 많다 보니 그 내용은 대체로 복원되어 있다. 인용된 이런저런 구절들이 원래 어떤 순서로 등장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19세기 학자들이 구성하여 현대에 출간된 12판법의 여러 버전들은 이 법률의 체계적 특징을 확실히 과장하고 있다. 하지만 첫 부분은 소송 개시에 필요한 피고 소환 절차를 다루고 있고, 끝부분은 소송 종료 후 판결 집행 절차를 다루고 있다는 점은 밝혀져 있다. 

38 로마인들은 이 문제를 로마인답게 실용적인 방법으로 해결했는데, 그 방법은 로마법이 아예 두 가지 제도로 이루어져 있다고 파악하는 것이었다. 먼저 재산을 이전할 때 사용된 전통적 의례와 같이 로마인에게만 고유한 것들은 로마인에게만 적용되는 법 제도라고 보았다. 이와는 다른 제도들도 로마법의 일부를 이루는데, 예를 들어 법무총감이 부여한 여러 구제 수단들은 모든 문명 사회에 두루 통용됨 직한 법에 근거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여러 법규들을 로마인들은 만민법ius gentium, 즉 다양한 민족들에게 공통된 법이라고 통칭했는데 이것들은 전통에 뿌리를 둔 로마 시민법과 대비되는 것이다. 

42 로마제국 시기에는 황제가 직접 입법 권한을 가지게 되어 '황제가 제정한 것 constitutio principis'이 그때부터는 법률과 마찬가지로 법원 중 하나로 취급되었다. 황제들도 때로는 고시edictum의 형태로 입법을 하기도 했지만, 황제의 입법 활동 대부분은 칙답서 rescriptum를 통한 것이었다. 칙답서는 소송 당사자들이나 지방 총독과 같은 관리들이 질의한 법률 문제에 대하여 황제의 이름으로 회신한 답변을 말한다. 칙답서는 황제 비서실에 근무하는 법률가들이 작성한 것으로서 이미 존재하는 기존의 법을 선언하거나 명료하게 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았고, 법 내용의 중요한 변화가 칙답서를 통해 도입된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50 가이우스가 학생들의 수업 교재로 사용했던 '법률교본Institutes'이 채택한 틀은 법을 크게 세 가지 내용으로 나눈 것이었다. 3분법은 다루기에 적절한 숫자이고 집중력이 길지 않은 학생들에게도 유용하므로 교사들에게 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가이우스가 나눈 법의 세 분야는 사람, 물건, 소송에 관한 법이었다. 첫 번째 분야는 사람의 지위를 다음 세가지 관점, 즉 자유(자유인인가, 노예인가), 시민권(로마 시민인가, 외지인인가), 가족에서의 지위(호주인가, 호주의 가부장 권하에 복속된 자인가)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드러나는 여러 측면에 관한 법이다. 

52 가이우스 이전의 법률가들도 비록 채권채무관계에 법적 구속력이 인정되려면 약정만으로는 부족하더라도, 대부분의 채권채무관계는 당사자들 간의 사전 약정에 근거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대부분의 채권채무관계는 구속력의 근거가 무엇이건 간에 당사자들 간의 약정에 근거한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로써 당사자들에게 의무가 생겨나게 만드는 계약이라는 범주가 탄생한 것이다. 가이우스는 이제 채권채무관계를 채무자의 부담으로서만이 아니라 채권자의 자산이기도 하다는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았다. 채권자가 채무자를 상대로 소송할 수 있는 권리라는 측면에서 채권채무관계를 바라봄으로써 가이우스는 이 개념을 확장하여 계약뿐 아니라 불법행위도 채권채무관계의 발생 원인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53 3세기 초반에 안토니누스 카라칼라 황제는 중요한 고시를 제정하여 제국에 거주하는 거의 모든 자유민에게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 212년에 선포된 안토니누스칙법은 로마 시민권을 베풀어주겠다는 너그러움의 발로가 아니라, 로마 시민이 사망하면 상속재산에 대해 징수하던 상속세를 더 많은 사람을 상대로 징수하려는 재정적 이유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 칙법의 결과로 자신은 로마 시민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라틴어조차 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이제부터는 로마 시민으로서 로마 시민법의 절차를 따라야 하게 되었다. 

59 로마인들의 오래된 제례 의식은 로마에서 계속되었고,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까지 서로마제국 황제들은 수석 제사장pontifex maximus 역할도 겸했다. 공인된 가톨릭 신앙을 독실하게 따랐던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그 전의 황제들보다 훨씬 더 엄격하게 비기독교적 전통을 제거했고, 단지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정교일체의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했다. 비지고트족들이 아리우스의 [이단적인] 가르침을독실하게 따랐기 때문에 테오도시우스 황제와 비지고트족 간의 관계가 더 어렵게 꼬이기도 했다. 

68 법률가들의 저술에서 발견되는 법은 이제 'ius'라고 불렸는데, 이 말은 황제의 입법에서 도출되는 법을 지칭하는 'lex'와 대비되는 것이다. 황제의 입법이 쏟아져 나옴에 따라 그것을 정리하고 체계화할 필요가 생겼다. 3세기 말에 황제의 입법, 주로 칙답서를 개인이 모아둔 두 모음집이 편찬되었는데 이들은 편찬자의 이름을 따서 그레고리아누스 칙법집 Codex Gregorianus, 헤르모게니아누스 칙법집 Codex Hermogenianus이라 불렸다. 5세기에 들어 황실에서도 황제 입법을 공식적으로 모아둘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429년 테오도시우스 2세가 임명한 칙법집 편찬 위원회가 꾸려졌고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래 모든 황제 입법을 모아둔 칙법집이 편찬되었다. 

76 서로마제국의 멸망은 동로마제국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사실 5세기 후반에는 콘스탄티노플과 베이루트에 법률학교들이 생겨나면서 법률 교육의 부흥기를 맞이했다. 문헌들은 물론 모두 라틴어로 되어 있지만 설명은 그리스어로 이루어졌다. 527년에 즉위한 황제의 이름은 영원히 로마법과 관련을 맺게 되는데 그가 바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이다.  

81 유스티니아누스는 565년에 사망할 때까지 칙법을 계속 제정하여 공표했다. 이들 '신칙법 Novellae Constitutiones'은 그리스어로 적힌 경우가 많았는데 누군가가 이것을 사적으로 모아 세구성 부분 [칙법집, 법률의견선집, 법률교본]으로 이루어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법률 편찬물에 추가했다. 이 전체를 로마법대전Corpus iuris civilis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교회법과 대비되는 세속 사회의 법 civil law을 집대성하여 일체corpus를 이루었다는 뜻이다. 이 작품은 1,000년 동안 이루어진 법률 발달의 정수를 보여준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법률 편찬 작업이 없었더라면 그 전 시대 법에 대해서 우리는 거의 몰랐을 것이다. 고전기 로마법이 우리에게 직접 전해 내려온 사례는 드문데, 그 대표적 예가 바로 가이우스의 법률교본이다. 가이우스 법률교본의 완전한 필사본은 1816년에야 발견되었다. 

94 서임권을 둘러싼 분쟁은 1122년에 교황 칼릭스투스 2세와 황제 하인리히 5세가 보름스 협약을 체결함으로써 공식적으로 결말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 협약은 사실 영국의 헨리 1세가 마련한 절충안에 기초한 것이었다. 협약의 내용은 고위급 성직자들이 동시에 가지고 있는 영적인 직무와 황제나 국왕의 봉신으로서의 지위를 개념적으로 구분하여 이들이 봉건적 권한을 누리는 데 필요한 충성서약 homage은 황제나 국왕에게 하고, 영적인 권위를 행사하는 데 필요한 반지와 지팡이는 교회의 위계 질서에 따른 상급자로부터 받도록 하는 것이다. 이 타협안이 도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교황 칼릭스투스는 황제 하인리히 5세에게 보낸 서신에서 교회와 신성로마제국이 불화함으로써 유럽 전역의 기독교 신도들이 받은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 그리고 이제 우리 둘 사이의 평화와 화합이 얼마나 큰 결실을 맺을 것인지'에 대해 감회를 피력했다. 따라서 기독교로 하나가 된 유럽의 통치자로서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대한 관념이 존재했으며, 유럽의 화합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점 또한 분명히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때부터 유럽은 각각 독자적인 법 [세속법과 교회법] 체계를 가진 두 개의 통치 조직이 지배하게 되었다.

109 교회법의 공백이 있는 부분에 로마법을 적용하는 문제는 좀 더 큰 두 가지 쟁점과 엮여 있었다. 즉, 황제와 동등한 권위를 부여받은 교황이 가지는 입법 권한의 문제와 교회 법정에서 진행되는 절차의 성격 문제였다. 속죄규칙집과 같은 전통에서 윤리 규범을 적용하고 신의 판단을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교회 법정에서의 분쟁 절차도 공적 절차이므로 다른 공적인 법정에서 적용되는 것과 비슷한 법규에 따라야 하는가? 프랑스 출신인 에티엔느 드 투르네같은 교회법 법률가들은 교회법에 어긋나지 않는 한 로마법은 어느 때고 적용될 수 있다고 보았지만, 다른 교회법 법률가들은 로마법의 권위를 그보다 덜 인정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교회법의 형성기였던 이 시기의 모든 교회법 법률가들은 자신들보다 더 높은 위상을 누리는 로마법 주석가들의 논의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191 법원이 오로지 직업 법관으로 구성됨에 따라 법원은 자신이 적용하는 법 중 민사법과 관습법적 요소에 더 주목하게 되었다. 각 법원은 고유한 실무 관행이 있었고, 이것이 법원의 관습을 이루었으며, 그 내용은 법원이 내린 판결을 통해서 입증되었다. 소송 당사자들은 따라서 법원의 판결을 찾아볼 수 있어야 했고, 특히 판결에 이유가 기재되어 있어 결정을 내린 근거가 제시되어 있을 경우 판결을 찾아볼 필요성은 더 높았다. 유럽에서 그런 판결을 내린 가장 높은 위상을 가진 법원은 로마교황청 법원Rota Romana이었는데, 로마교황청 법원은 유럽 각국의 가톨릭 교회법원에서 올라온 상소 사건을 처리하는 상소심 교회법원이기도 했고, 교황 직할 국가에서 발생하는 세속 사건을 처리하는 법원이기도 했다. 로마교황청 법원의 판결에 대해서는 교황청이 아비뇽에 있던 14세기부터 판례집이 발간되었다. 

231 로마 사법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자유인 간에는 사회적 지위가 달라도 별다른 법적 구분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18세기 당시의 법 제도와 비교할 때, 로마법은 수직적 계층 구분이 덜했다. 따라서 로마법 자체는 채용하지 않더라도 로마법의 일부 사상은 자연법으로 포장되어 도입될 수 있었다. 

238 법 발전에 대한 사비니의 구상은 로마 공화정 시기의 법은 덜 발달되었고, 유스티니아누스의 법은 쇠퇴기에 접어든 사회의 산물이며, 고전 로마법 시기야말로 로마법의 성숙기라고 파악하는 로마법 변천사의 한 시각을 일반화한 것임이 명백했다. 고전기 법률가들 간에 견해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을 무시하면서 사비니는 법률가들이 논쟁을 벌이기는커녕, 다른 종류의 저작물에 비해 법률가들의 저작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훨씬 덜하다면서 "그들은 모두, 말하자면, 거대한 하나의 작업을 함께 협력하여 수행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그들이 진행하는 방법은 모두 수학적인 확실성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옛 제도를 버리지 않고서도 새로운 제도를 도입할 수 있었고, 사비니는 이것을 "영원한 원칙과 진보적 원칙의 적절한 혼합이"라고 했다. 

262 유럽연합법이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새로운 것이 아니라 한때 유럽 대륙 전체에 존재했던 문화적·법적 통일의 새로운 표현이라는 생각 때문에 '로마법 전통'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관심이 불붙었다. 이 책은 유스티니아누스 법부터 현대 민법전에 이르기까지 진행된 법리의 발전 과정을 추적하고, 다양한 나라의 학자들이 그 발전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설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 드러나는 것은 로마인들이 고안해낸 법적 개념들이 비록 나중에 각 시대의 수요에 적응하느라 온갖 변화를 겪긴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여전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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