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의 북리스트 | 옥스퍼드 세계사 8장(2)

 

2021.12.07 옥스퍼드 세계사 8장(2)

《옥스퍼드 세계사》 제8장 두번째 시간이다. 368페이지 "서양의 환경, 경제, 확장" 부분을 읽는다. 《옥스퍼드 세계사》 제8장은 지난번에 얘기한 것처럼 1350년∼1815년, 이른바 근대세계가 펼쳐진 시기를 다루고 있다. 그 근대세계가 펼쳐진 시기에서 서양은 어떻게 서양이라고 일컫는 지역, 좁게는 유럽, 아메리카 대륙은 아직 유럽인들이 가지 않았으니까, 어떤 방식으로 대서양을 타고 내려와서 아프리카를 돌아서 인도양으로 왔고, 인도양으로 온 서양 사람들이 인도, 그리고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 말라카 해협, 중국에까지 왔는가 얘기가 368페이지부터 385페이지까지 있다. 중간에 어떤 식으로 전개가 되었는가는 연대기처럼 보면 되는데 368페이지에 있는 얘기들을 주목해서 봐야할 것들이 있다. "흑사병과 정화의 항해에 뒤 이은 세기에 유럽인은 명나라의 원정보다 규모는 더 작았지만 국제 연계를 확장한다는 점에서 더 중요했던 일련의 해양 원정에 나섰다." 이 문장이 중요한 함축을 가지고 있다. "일련의 해양 원정"이 바로 이후에 전개되는, 그러니까 제4부 1350년∼1815년가 바로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전개된 시기이다. 명나라의 정화의 남해대원정은 관계가 있다고 하면 있겠지만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전개에서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명나라의 정화의 남해대원정은 상업적 목적을 위한 것은 아니었고 "원정의 주목적은 중국의 부와 권세를 외부 세계에 각인시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한가지 우리가 서양사람들이 일련의 해양원정에 나선 원인이 어디있는가, 즉 마음가짐 또는 계기가 무엇이었는가 이것과 중국에서 명나라가 정화 제독을 시켜서 남해 대원정을 나선 원인이 어디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의 차이가 이어지는 해양 원정의 결과물을 다르게 가져왔다는 것이다. 368페이지에 중요한 이유들이 집약되어 있다. 따라서 촘촘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이후에 펼쳐지게 될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전개에서 중요한 계기가 "일련의 해양 원정"이라는 것이다.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전개에서 세가지 정도의 요소들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했었는데 첫째가 잉글랜드 산업혁명 자체, 둘째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작동하는 계기들, 세번째가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있어서 어떻게 축적의 경로가 생겨났는가이다. 이 세번째 경로와 관련된 것이 바로 오늘 나오는 얘기이다. 잉글랜드 산업혁명과 관련된 것은 11장 홀로세와 인류세 논의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지금 제8장을 읽는 것은 세번째 경로에 관련된 것이다.

제8장 368 흑사병과 정화의 항해에 뒤이은 세기에 유럽인은 명나라의 원정보다 규모는 더 작았지만 국제 연계를 확장한다는 점에서 더 중요했던 일련의 해양 원정에 나섰다.


"겉보기에는 비슷할지 몰라도, 동양의 원정과 서양의 원정은 그 동기와 환경, 결과 면에서 본질적으로 달랐다." 중요한 부분이다. 무엇이 달랐는지를 지금부터 살펴본다. 우선 인도양으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기 전에 주로 서양과 동양의 연결고리는 베네치아와 제노바, 지중해에서 무역을 하는 이탈리아의 상인들과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무슬림 상인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지브롤터 해협을 거쳐서 대서양으로 나오지는 않았고 지중해에서 곧바로, 전통적인 의미에서 지중해 무역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무슬림 상인들을 통해 인도양으로 이어지는 교역 연계를 개척했다." 이건 아주 익숙한 부분이다. 그런데 "새로운 해로를 찾을 동기는 오히려 남서유럽 이베리아반도의 왕국들에 있었다." 여기서 이베리아반도의 왕국들은 사실 그렇게 전통적인 의미의 상업국가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진짜 천신만고 끝에 이 포르투갈이 인도양으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혁신이 일어나는 데에는 결핍이 있어야 한다'라는 막연한 일반론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이베리아 반도는 사실 어떤 곳이었는가. "기독교의 영토를 수복하려는 십자군 운동을 계기로 확고부동한 반이슬람 정서가 뿌리내렸" 곳이었다. 그러니까 718년부터 이슬람이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고 있었다. "1469년 결혼한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은 이베리아에서 무슬림이 통치한 마지막 국가인 그라나다를 1492년 무너뜨릴 때까지 십자군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슬람의 통치를 종식을 시켰는데 그 통치가 781년에 걸쳐서 있었다. 통치가 시작된 것인 718년이고, 1492년에 통치가 무너져서 781년간의 통치가 종식되었다. 그것을 영어로 표현하면 Reconquest 재정복이라고 표현하고, 에스파냐어로는 Reconquista 레콩키스타라고 한다. 레콩키스타라는 과정을 거쳐서 이베리아 반도가 다시 가톨릭국가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굉장히 잔인한 십자군 전쟁이 있었다. 그리고 781년의 걸친 통치를 종식시킨 후 알함브라 칙령을 통해서 무슬림과 유대인을 추방하게 된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반이슬람 정서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고 따라서 중동의 무슬림 상인을 통해서 무역을 하겠다는 것이 없었다. 이 얘기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대서양이나 인도양을 향하게 된 환경을 보여준다고 설명을 하고 있다. 369페이지에는 포르투갈의 엔히크 왕자가 있다. 

제8장 368 겉보기에는 비슷할지 몰라도, 동양의 원정과 서양의 원정은 그 동기와 환경, 결과 면에서 본질적으로 달랐다.

제8장 368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무슬림 상인들을 통해 인도양으로 이어지는 교역 연계를 개척했다.

제8장 368 새로운 해로를 찾을 동기는 오히려 남서유럽 이베리아반도의 왕국들에 있었다.

제8장 368 기독교의 영토를 수복하려는 십자군 운동을 계기로 확고부동한 반이슬람 정서가 뿌리내렸다. 1469년 결혼한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은 이베리아에서 무슬림이 통치한 마지막 국가인 그라나다를 1492년 무너뜨릴 때까지 십자군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제8장 369 포르투갈은 항해 기법과 지리 지식에서 전진을 이루어냈다.


그 다음에 포르투갈은 어떻게 인도양 항해를 했는가가 378페이지부터 연대기적으로 나오는데 중요하게 짚어야 할 지점을 보면 369페이지 "포르투갈은 항해 기법과 지리 지식에서 전진을 이루어냈다." 아스트롤라베라는 천문기구를 사용했고, 유명한 사람들이 나온다. 바르톨로레우 디아스, 바스쿠 다가마의 새로운 원정대, 이러면서 이른바 Agent State들이 등장하고 각각의 State들이 어떻게 행위하였는가의 설명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때 서양사람들이 오늘날의 서양을 투영시키면 안된다. 371페이지를 보면 동양의 부유함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 있다. "인도에서 가져온 '견본' 상품과 향신료 화물은 비록 양이 적긴 했지만, 동양이 실제로 부유하고 아프리카를 빙 도는 해로를 따라 갈 수 있는 곳임을 확인해주었다." 다시 말해서 포르투갈 본국은 동양에 비해서 넉넉하게 잘사는 곳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371페이지에 중요한 얘기가 있다. "하나는 함포의 군사적 우위였고, 다른 하나는 선단의 화물 적재 능력이었다." 이 두가지는 아주 중요하게 비인간행위자가 우위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비인간행위자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 비인간행위자와 그런 것들을 만들어 내는 관념 이것을 묶어서 기술이라고 한다. 그러면 그런 기술이 바로 또 다른 비인간행위자를 만들어 내는 중요한 역학을 하게 된다. 그런데 포르투갈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일종의 문화적인 것이 무엇인가. "권력과 신앙을 확대하는 일에서는 충분히 무자비했다." 이런 심성구조들이 함포의 군사적 우위와 단의 화물 적재 능력과 결합되면서 이른바 전쟁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씨앗을 심게 된다. 이것을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이렇게 가차없는 심성이 결합이 되고, 기술과 심성의 결합 이것이 15세기 이후의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1505년 새 선박 80천에 선원 7000명이 탑승한 포르투갈 함대가 동아프리카 해안 소도시들을 포격해 폐허로 만들거나 복종을 받아냈다." 이게 시작이다. 1505년부터 두번째 중영전쟁, 즉 두번째 2차 아편전쟁이 끝나는 1860년, 300년에 걸친, 단기간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서양이 아시아를 침탈한 것이 단기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고 최종 결과가 그렇게 되었을 뿐이지 중간에서는 굉장히 많은 교역이 300년 동안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제8장 371 인도에서 가져온 '견본' 상품과 향신료 화물은 비록 양이 적긴 했지만, 동양이 실제로 부유하고 아프리카를 빙 도는 해로를 따라 갈 수 있는 곳임을 확인해주었다. 

제8장 371 포르투갈 본국은 가난하고 여러 문화를 아우르는 교양이 부족했을지 몰라도 두 가지 뚜렷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함포의 군사적 우위였고, 다른 하나는 선단의 화물 적재 능력이었다. 그리고 포르투갈인들은 권력과 신앙을 확대하는 일에서는 충분히 무자비했다.

제8장 371 1505년 새 선박 80천에 선원 7000명이 탑승한 포르투갈 함대가 동아프리카 해안 소도시들을 포격해 폐허로 만들거나 복종을 받아냈다. 


372페이지를 보면 "지중해와 인도양의 시장 기반 교역 체계에는 국가의 후원을 받는 상업이 남아 있었다." 두번째의 세력이 밀려들어오는데 그 세력이 바로 네덜란드와 영국이다. Agent State가 이 지점에서 바뀌고 있다. 그리고 "1600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출범했고, 1602년 출자를 더 많이 받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발족했다." 연대를 잘 봐야한다. 1505년에 포르투갈 함대가 있었고 100년 정도 지난 다음에야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들이 등장했다. 그러니까 1600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출범했고 영국과 중국이 전쟁을 벌여서, 중국에다가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하게 된 것이 1860년이면 260년 후이다. 단기간에 영국의 국력이 성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제8장 372 지중해와 인도양의 시장 기반 교역 체계에는 국가의 후원을 받는 상업이 남아 있었다. 17세기에 네덜란드와 영국은 이 두 체계의 사이에 해당하는 접근법을 개척했다. 1600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출범했고, 1602년 출자를 더 많이 받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발족했다.


세계사를 읽을 때 중요하게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 것이 시간 개념이다. 긴 호흡으로 읽어야 한다.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 아주 긴 호흡으로 벌어진다는 것을 꼭 생각해야 한다. 그게 바로 또 세계사를 읽을 때 마음가짐이기도 하고 동시에 세계사를 읽으면 우리가 갖게되는 마음가짐이기도 하다.


그 다음 네덜란드와 영국은 국가의 후원을 받는 사업체가 나왔고, 그런 사업체들이 정부의 특허장을 받아서 뭔가를 했다. 그런데 프랑스도 이런 인도 회사를 만들기도 했는데 잘 안풀렸다는 부분이 거론된다. 그 다음부터 373페이지부터 있는 것은 향신료 교역이 큰 사업이었다는 얘기, 그다음에 374페이지부터는 "1652년부터 1784년까지 영국과 네덜란드가 네 차례 격렬한 전쟁을 치른 끝에 결국 영국 동인도회사가 우세를 점했다." 1652년부터 1784년까지, 이것도 100년의 시간이 걸렸다. 여기까지가 일단 일단락이 된다. 그 다음에는 375페이지부터는 거래가 동서 무역거래만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라는 얘기가 나온다. 사실 시장 자체는 유럽이 컸다기보다는 동양 내부의 거래가 컸다. 이것을 놓치면 안된다. "이 기간 동안 교역의 양으로 보나 가치로 보나 아시아 내부의 거래가 대륙 간 거래를 크게 웃돌았다. 유럽인들은 주로 아시아 내부의 가격 패턴에서 수익을 얻을 기회를 찾았다." 아주 중요한 문장이다. 다시 말해서 유럽인들이 부를 축적한 것은 아시아에서 물건을 가져다가 유럽에서 판 것이 아니라 아시아 안에서 은과 구리가 일본에서 상대적으로 저렴하니까 은을 가져다가 중국에서 팔고, 이런 식으로 아시아 안에서 장사를 해서 돈을 벌었다는 것을 봐야한다. 《구리와 사무라이》라는 책을 보면 어떻게 구리광산이나 그런 것들이 어떻게 개발되었는가. 일본 에도막두 시대 각 번들이 번 자체의 부를 늘리기 위해서 했던 것들이 있다. 그 다음에 376페이지를 보면 "유럽인들은 향신료, 그중에서도 인도산 후추와 말루쿠 제도산 정향과 육두구, 메이스 같은 '고급 향신료'를 구했는데, 어느 정도는 유럽으로 수출하기 위해서 였으나 주로 거대한 중국 시장에 판매하기 위해서였다." 그 다음에 "17세기에 대서양으로 수출된 인도산 면직물의 가치는 향신료 교역의 가치를 넘어섰다." 스벤 베커트가 쓴 《면화의 제국》에는 이 부분이 자세히 나온다. 

제8장 374 1652년부터 1784년까지 영국과 네덜란드가 네 차례 격렬한 전쟁을 치른 끝에 결국 영국 동인도회사가 우세를 점했다.

제8장 374 이 기간 동안 교역의 양으로 보나 가치로 보나 아시아 내부의 거래가 대륙 간 거래를 크게 웃돌았다. 유럽인들은 주로 아시아 내부의 가격 패턴에서 수익을 얻을 기회를 찾았다.

제8장 376 초기에 유럽인들은 향신료, 그중에서도 인도산 후추와 말루쿠 제도산 정향과 육두구, 메이스 같은 '고급 향신료'를 구했는데, 어느 정도는 유럽으로 수출하기 위해서였으나 주로 거대한 중국 시장에 판매하기 위해서였다.

제8장 376 17세기에 대서양으로 수출된 인도산 면직물의 가치는 향신료 교역의 가치를 넘어섰다.


378페이지를 보면 중요한 문장이 있다. "유럽인들은 진취성을 인정받을 자격이 있지만,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 협력자와 적의 역할에 주목해야만 더 복잡하고도 더 현실적인 이야기가 드러난다. 비유럽인 지배자, 제조업자, 교역상, 정치인은 제각기 주목받을 자격이 있다." 세계사를 읽으면서 이렇게 시각을 넓히게 되는 문장을 만나면 꼭 기억을 해야 한다. 아시아의 행위자는 무조건 수동적이고, 유럽인들이 진취적이니까 아시아에 쳐들어와서 무조건 학대하고 약탈하고 착취했구나 이렇게 생각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비유럽인 지배자, 제조업자, 교역상, 정치인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들과 유럽인들이 어떤 식으로 상호관계를 맺었는지가 378페이지에 설명이 나온다. 그 다음 380페이지를 보면 "유럽인 대다수는 독신 남성이었고 현지 주민 중에서 애인과 아내를 구했다." 중국은 대외교역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국 남부 해안 도시 광주, 그러니까 광저우, 광저우의 상인 공동체가 해외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화교의 시작이 된다. 따라서 "1600년경부터 마닐라와 바타비아뿐 아니라 일본 나가사키에서도 대규모 중국 상인 공동체가 출현했다." 그다음 384페이지를 보면 "1792년 영국 정부는 통상 조약을 협상하고자 조키 매카트니가 이끄는 사절단을 중국에 파견했다." 이 사람이 나중에 영국의 귀족이 된다. 1792년 이때는 영국이 중국에 가서 이래라 저래라 할만큼의 국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건륭제가 "나는 이상하고 신기한 물건을 중시하지 않으니 당신 나라의 상품은 쓸모가 없소"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이때는 중국이 영국보다 압도적으로 잘살고 있을 때다. 프랑스는 1789년 프랑스혁명으로 정신이 없었고, 영국은 중국을 향해 교역을 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1840년이 되면 제1차 중영전쟁이 벌어지게 되니까 계산을 해보면 "그후 수십 년간 중상주의 유럽과 제정 중국은 서로 동떨어진 세계로 지냈다." 동떨어진 세계로 지내다가 1840년이 되면서 싸움을 하는 세계가 되었고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하게 된다. 아편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 이후로도 중국에게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게된다. 그것이 오늘날 중국인들에게 중요한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다.

제8장 378 유럽인들은 진취성을 인정받을 자격이 있지만,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 협력자와 적의 역할에 주목해야만 더 복잡하고도 더 현실적인 이야기가 드러난다. 비유럽인 지배자, 제조업자, 교역상, 정치인은 제각기 주목받을 자격이 있다.

제8장 380 유럽인 대다수는 독신 남성이었고 현지 주민 중에서 애인과 아내를 구했다. 

제8장 380 1600년경부터 마닐라와 바타비아뿐 아니라 일본 나가사키에서도 대규모 중국 상인 공동체가 출현했다.

제8장 384 1792년 영국 정부는 통상 조약을 협상하고자 조키 매카트니가 이끄는 사절단을 중국에 파견했다. 

제8장 385 그 칙유에는 "나는 이상하고 신기한 물건을 중시하지 않으니 당신 나라의 상품은 쓸모가 없소"라는 유명한 구절이 들어 있었다.

제8장 385 그후 수십 년간 중상주의 유럽과 제정 중국은 서로 동떨어진 세계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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