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용: 시간과 영원

 

[POD] 시간과 영원 - 10점
선한용/대한기독교서회

개정판을 내면서
서문
어거스틴의 저서 약어표
제1장 서론
제2장 어거스틴의 사상적 특색
제3장 시간과 무로부터의 창조
제4장 시간과 존재의 기원
제5장 시간과 하나님의 영원성
제6장 시간의 본질
제7장 시간과 그리스도의 성육
제8장 시간과 사랑
제9장 시간과 은혜
제10장 직성적 시간과 역사의 의미
제11장 시간과 두 도성의 모호성
제12장 시간과 악의 문제
제13장 시간과 역사 안에서 가져야 할 그리스도인의 삶의 스타일
제14장 어거스틴과 현대 비판가들

부록: 어거스틴의 생애



제3장 시간과 무로부터의 창조

36 우리는 천지(하늘과 땅)가 존재하고 있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자기들이 창조되었다고 큰소리로 외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변하고 바뀌고 있기 때문입니다. ··· 변화하고 바뀐다는 것은 전에 없던 것이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은 자기들이 스스로를 만들지 않았다고 외쳐 말하기를 "우리가 존재하게 된 것은 우리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존재하게 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만들 수 없었다"라고 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소리는 그들이 바로 존재하고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 주님, 이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은 당신이옵니다(『고백록』, 11, 4, 6). 

위의 인용구는 하늘과 땅, 인생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고백한 어거스틴의 말이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피조물 자신들에 의해 증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세상과 그 안에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그의 확신은, 피조물의 증거에서 출발하기보다는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성서의 증거에서 출발한다. 어거스틴은 이 성서적인 증거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경험적인 관찰로 확인하며, 철학적으로 해명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그가 성서적 창조론을 해명하려고 할 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을 전제로 하고 있다. 첫째는 "이 세계는 무엇으로부터 (out of what?) 창조되었는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 세상은 언제 (when?) 창조되었는가?"하는 것이다. 이 질문들에 대해 어거스틴은 첫 번째의 질문에 대해서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로 대답하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태초"라는 시간의 절대적인 시작을 말함으로써 답하려고 한다. 이제 그 내용들을 살펴보자. 

"이 세계는 무엇으로부터 창조되었는가?" 하는 질문에 어거스틴은 세 가지의 가능한 대답을 생각해보고 있다. 첫째는 "형성설"(formation theory)이요, 둘째는 "유출설"(emanation theory) 이며, 셋째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n out of nothing) 이다. 어거스틴은 이 세가지 이론 중에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개념이 하나님과 세계, 영원과 시간의 관계를 그리스도교적인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할 때 가장 합당한 이론이라고 주장했다. 형성설과 유출설은 어거스틴이 살고 있던 헬라 문화권의 세계에 잘 알려진 이론이었다. 형성설은 세계의 기원에 대한 이원론적인 설명으로서 그 대표자는 플라톤이었고, 유출설은 일원론적 이론으로서 그 대표자는 어거스틴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플로티누스(Plotinus) 였다. 

세계의 기원에 대한 이원론적인 이론은 배후에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고대에는 이 이원론이 거의 신화적인 형태로 표현되어 중동지방에서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 이런 신화에 의하면 질서의 신이 어떤 괴물(혼돈의 원리)을 쳐서 극복함으로써 세계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그 예로서는 바빌론의 창조신화를 들 수 있다. 질서를 대표한 마르둑이라는 신이 혼돈을 대표한 티아맛을 쳐서 복종시킴으로써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Long, 80-91). 이와같은 이원론적인 신화를 받아들여 그것에 철학적인 해석을 가한 것이 플라톤의 대화편 『티메우스』(Timaeus) 란 책이다. 그 책에 세계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초에 데미오고스(Demiogos)라는 신이 있었는데, 이 신이 본래부터 존재해온 질료(어떤 것이 될 수 있는 가능태)를 영원한 "이데아"(형상)에 의하여 가능한 한 좋게 형성한 것이 이 세계라는 것이다(Timaeus, 51e-52d). 마치 목수가 건축자료를 어떤 청사진의 형상에 따라, 가능한 한 좋게 형성하여 집을 지은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자료설(형성설)에는 인간이 무엇을 만들 때와 마찬가지로 대개 세 가지 요소가 세계 창조에 관여되고 있다. 그것은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형상(이데아)이며, 영원부터 존재한 질료이고, 이 양자를 연결하여 무엇이 되게 형성한 데미오고스이다. 그러므로 세계창조는 데미오고스란 신이 질료를 이데아에 의해 형성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플라톤이 이데아를 하나의 독립된 실체로 보았는지, 아니면 신의 이데아(the idea of God)로 이해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플라톤은 이에 대하여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으나, 그가 데미오고스(신)와 이데아를 하나의 실체로 보았다고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플라톤의 이론은 철저히 이원론적이다. 한편으로는 이데아를 품고 있는 데미오고스라는 신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형성의 재료인 질료가 있게 된다. 이 둘은 세계의 형성에서 없어서는 안될 궁극적인 원리이다. 그러면 신이 세계를 형성할 때 재료로 사용한 질료란 어떤 것인가? 플라톤은 이 질료를 어떤 형체를 가진 물질로 보지 않았다. 질료란 창조의 활동에 의하여 무엇이 될 수 있는 가능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질료란 그 자체에 있어서 비합리적이고 무제한적이어서 무형적이고 인식될 수도 없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의 창조적인 활동에 의하여 무엇이 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 질료는 영원부터 존재해온 존재론적 원리로서 신의 세계형성(창조) 활동에 도움이 되는 조건(condition)도 되지만, 또한 동시에 신의 창조적인 활동에 저항하고 제어하는 요소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목수가 재목 때문에 집을 지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재목의 제한도 받기 때문에 집을 자기 마음대로 지을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같이 플라톤이 말하는 질료는 신이 세상을 만드는 활동에 필요불가결한 조력자도 되지만, 동시에 신의 창조활동에 저항하는 세력도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신은 그의 창조활동에 있어서 질료에 의하여 어떤 제한을 받고 있는 유한한 존재인 것이다. 그 제한은 자기의 의도 때문이 아니라 그가 처해 있는 "필연"(necessity)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미오고스라는 신의 의도는 관대하고 선하여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세계를 완전하고 좋게 만들었다고 플라톤은 논한다(Timaeus, 29e-30). 

이러한 신은 질료의 제한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은 아니다. 또한 그가 만든 세계도 질료의 저항과 제한을 받으면서 이루어 놓은 것이기에, "심히 좋은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좋고, 상대적으로 완전할 뿐이다. 이와같은 고대의 신화론적 우주관과 플라톤의 이윈론적인 사상에 반대하여 어거스틴은 철저히 유일신 사상을 주장한다. 즉 세계창조 이전에는 하나님과 대등한 어떤 존재론적 윈리나 실체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형성적 활동과 창조적 활동을 구별하여 말한다. 형성적 활동이란 이미 있는 질료를 어떤 계획(모형, 이데아)에 의하여 형성하는 조각가나 목수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고, 창조적 활동이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으로서 질료까지라도 무(無)에서 만드신 절대 제일원인이 되는 활동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무로부터의 창조란 후자의 활동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만이 만물의 근원이시요, 만물은 그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해 있는 것이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질료가 있어 세계가 그것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또한 창조 때 하나님 이외에 어떤 영원한 원리나 실체가 있어, 그의 창조활동에 참여했다든가 혹은 그 창조활동을 제한했다는 것도 어거스틴은 용납하지 않는다. 

 

 


제6장 시간의 본질

73 우리는 앞장에서 영원과 시간의 질적인 차이를 생각해보았다. 영원은 시간의 양적인 연장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는 그 탁월성이라고 지적하였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영원은 항상 "머물러있음"(semper stans)이요, "영원한 현재"(nunc stans)라는 것이다. 반면에 시간은 항상 지나가는 것으로서 "결코 머물러 있지 않음"(numquam stans) 즉 무상성(無常性)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영원과 시간을 대조해서 이해한 어거스틴은 더 나아가 시간의 본질을 파악하고 기술하기 위하여 예리한 질문을 던진다. 그는 시간이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잘 알고 있는 듯하지 만, 그 본질을 파악하려면 얼마나 난해한가를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그러면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누가 쉽게 그리고 간략하게 그것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감히 그것을 잘 이해하여 그 대답을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일상 대화에서 시간보다 더 차근하게 그리고 잘 이해하고 있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시간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시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들을 때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만일 아무도 나에게 묻지 않는다면, 나는 시간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묻는 자가 있어서 그에게 시간을 설명하려고 하면 나는 모릅니다(『고백록』, 11, 14, 17). 

이와같은 어거스틴의 고백은 대단히 함축성 있는 말이므로 우리는 주의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이 문장을 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면 시간이란 도대체 무엇일까?(Quid est ergo tempus?) 먼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가 책상이나 나무나 또는 사람 등에 대하여 본질을 물을 수 있듯이, 시간이 무엇이냐고 그 본질(quidity, whatness)을 물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가 어떤 존재의 본질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그것의 있음(that which is)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라는 것은 항상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본질을 이해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시간이란 무엇인가?"(Quid est tempus?) 라고 물을 수 없는 것이다. 

75 어거스틴에 의하면 시간이란 비존재에로 흘러가는 것으로만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시간의 본질을 어떤 주어진 존재로 이해할 때 그것은 알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고 만다. 왜냐하면 과거는 이미 없고(iam non esse), 미래 역시 아직 없는 것(nondum esse)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실은 과거나 미래는 없는 것 (non esse)이 되고 만다. 그러면 현재의 시간이란 무엇인가? 금세기, 금년, 이 달, 오늘, 이 시간, 이 순간은 항상 과거와 미래로 나누어질 수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현재는 포착할 수 없게 된다. 만일 우리가 이 순간을 진정한 현재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그 순간의 시간을 포착할 수 없는 것은 현재라는 시간이 계속 지나가고 있을 뿐 아니라, 어떠한 연장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고백록』, 12, 15, 20). 그러므로 시간이라는 것은 아직 오지 아니 한 것(미래)으로부터 연장이 없는 것(현재)을 통하여 이미 없어져버린 것(과거)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이렇듯 시간은 비존재에로 계속 흘러 지나가고만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이란 무엇인가?"(Quid est tempus?) 하는 것 즉 시간의 본질(quid est)을 파악하기가 힘든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의 본질을 다른 차원에서 파악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시간은 설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게 된다. 

86 시간의 문제는 인간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어거스틴은 시간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존재를 시를 읽는 것에 비교하기도 한다. 어떤 시를 읽어갈수록 이미 읽은 부분(기억 - 과거 )은 점점 많아지고, 앞으로 읽을 부분(기대 - 미래)은 점점 짧아져, 나중엔 기대한 부분이 전부(tota expectatio) 없어지고 만다. 인간의 삶도 이와 같아서 그가 살아감에 따라 기억한 과거는 점점 쌓이고 기대하는 미래는 점점 줄어들어 결국 미래에 대한 기대가 송두리째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다(『고백록』, 11, 28, 38). 이 유비는 어거스틴이 인생의 죽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무상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사는 인생의 모습은 산산이 조각나 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존재 (Sein zum Tode), 잠깐이 라도 정지 해 있을 수 있는 순간도 갖지 못하는 존재이다(De civ. Dei, XIII, 10). 이것을 더 과격하게 표현하여 그는 인생을 죽어가는 생명, 혹은 살아 있는 죽음에 비유하기도 한다(『고백록』, 1, 6, 7). 왜냐하면 인간은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과거의 자신을 계속 상실해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무로부터 창조된 피조물은 무로 다시 되돌아가려는 경향성 때문에 항상 무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어거스틴의 말을 상기해볼 수 있다. 무를 향해 있는 피조물의 모습은 무상한 시간성과 죽음에 직면해 있는 인간의 실존에서 더욱 명확히 그 뜻을 드러내 주고 있다. 이상을 종합해서 말하면 인간은 무상한 시간안에서 항상 무의 위협, 행복의 상실, 죽음의 가능성에 직면해 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 안에서 무엇을 얻었다고 할 때는 그것의 상실이 뒤따르고, 존재는 비존재를 동반하며, 생성은 멸망을 수반하고, 삶은 죽음을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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