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3. 1. 17.
서양미술사 - E.H.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외 옮김/예경 |
서문
서론: 미술과 미술가들에 관하여
1. 신비에 싸인 기원
2. 영원을 위한 미술
3. 위대한 각성
4. 아름다움의 세계
5. 세계의 정복자들
6. 기로에 선 미술
7. 동방의 미술
8. 혼돈기의 서양 미술
9. 전투적인 교회
10. 교회의 승리
11. 귀족과 시민
12. 현실성의 정복
13. 전통과 혁신 Ⅰ
14. 전통과 혁신 Ⅱ
15. 조화와 달성
16. 빛과 색채
17. 새로운 지식의 확산
18. 미술의 위기
19. 발전하는 시각 세계
20. 자연의 거울
21. 권력과 영광의 예술 Ⅰ
22. 권력과 영광의 예술 Ⅱ
23. 이성의 시대
24. 전통의 단절
25. 끝없는 변혁
26. 새로운 규범을 찾아서
27. 실험적 미술
28. 끝이 없는 이야기
참고문헌에 대하여
소장처에 따른 도판 목록
도판 상세설명
색인
서문
이 책은 아직 낯설지만 매혹적으로 보이는 미술이라는 분야에 처음 입문하여 약간의 오리엔테이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쓰여졌다. 그러므로 이 책은 이제 막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신참자에게 세부적인 것에 휘말려 혼돈됨이 없이 이 넓은 분야의 지세를 보여주고, 까다롭고 복잡한 인명과 각 시대와 양식들을 알기 쉽게 정리함으로써, 보다 더 전문적인 책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것이다. 이 책을 쓰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염두에 둔 독자는 자신들의 힘으로 이제 막 미술 세계를 발견한 10대의 젊은 독자들이다. 그러나 나는 젊은이들을 위한 책이 성인을 위한 책과 달라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젊은이를 위한 책은 그 독자가 바로 최고의 비평가라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유식한 체하는 전문 용어의 나열이나 엉터리 감정들을 재빨리 알아내어 분개할 줄 아는 비평가들인 것이다. 경험을 통해서 나는 전문 용어나 얄팍한 감상의 나열이 많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평생을 통해서 미술책은 모두 그럴 것이라고 백안시하게 만드는 악습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이러한 함정을 피하기 위해 지나치게 평범하고 비전문적으로 보일지도 모르는 위험 부담을 안고서도 평이한 말을 사용하려고 성심껏 노력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난해한 사상들이라 해서 무조건 피하지는 않았으므로 미술사기들의 전문용어를 가능한 한 적게 쓰려는 의도를 내가 독자들을 '무시한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독자들을 일깨워주기보다는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학술적인 용어'를 남용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구름 위에서 '우리들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아닐지.
전문적인 용어를 제한한다는 결심 이외에도 책을 쓰는 데 있어서 내 자신이 정한 몇 개의 원칙들을 고수하기로 했는데 이 모든 것이 저자인 나로서는 힘든 작업이었지만 독자들은 다소 편안하게 이 책을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원칙으로 첫째는 도판으로 보일 수 없는 작품은 가능한 한 언급을 피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이 책의 내용이 인명의 나열로 얼룩지지 않도록 주의했다. 수많은 인명을 나열한다는 것은 문제의 작품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으며 이미 아는 사람들에게는 불필요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칙 때문에 내가 논할 수 있는 작가와 작품의 선택 범위는 이 책에 실릴 수 있는 도판의 수효만큼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떤 것을 언급하고 어떤 것을 배제해야 할지를 선택하느라 이중으로 어려운 작업을 거쳐야만 했다. 이것이 또한 두 번째 원칙을 세우게 했는데 그것은 진정으로 훌륭한 작품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단순히 어떤 취향이나 유행의 표본으로서만 흥미가 있는 작품은 배제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정은 서술상의 효과를 상당히 격감시켰다. 칭찬은 비판보다 훨씬 지루하며, 어딘가 재미있고 기괴한 작품들을 포함시켰더라면 이야기를 끌어나가는데 훨씬 박진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진정한 미술을 위해서 쓰여졌다고 할 수 있는 이 책에서 못마땅하게 생각되는 작품들이 실려 있다면 의당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특히 그러한 작품으로 인해 진정한 걸작들이 제외되었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이 모두 다 최고의 수준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주장 할 수는 없지만, 그 나름의 특유한 장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작품들은 단 하나라도 포함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세 번째 원칙 또한 어느 정도의 자제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나는 널리 알려진 유명한 걸작들이나 자신의 개인적인 기호 때문에 이 책에서 제외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 임의대로 도판을 선정하지 않기로 굳게 결심했다. 이 책은 단순히 아름다운 것 만을 모아놓은 화집으로 계획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분야에 들어와서 방향을 잡으려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므로 그들을 위해서는 분명히 '진부한' 작품들의 낯익은 모습이 오히려 고마운 이정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명한 작품이란 실제로 여러 가지 기준으로 보아도 최고의 걸작일 경우가 많으므로 이 책이 독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그림을 다시금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보다 덜 알려진 걸작들을 위해서 그것들을 제외하는 것보다 다시 한번 설명하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책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던 유명한 작품들과 작가의 수는 정말 엄청나다. 인도와 에트루리아의 미술, 또는 퀘르차, 시뇨렐, 또는 카르파초와 비견되는 화가나, 피셔, 부로우웨르, 테르보르흐, 카날레토, 코로 등 내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많은 작가들을 언급할 여유가 없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을 다 포함한다면 이 책의 두께가 두배 세배로 늘어났을 것이고 미술에 관한 입문서로서의 가치도 감소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 한 가지 원칙도 불가피한 생략에 관한 것이다. 결정을 못하고 망설여질 때면 언제나 내가 사진으로만 알고 있는 작품보다는 원작을 직접 보았던 작품을 택하여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여행을 못한 것까지 독자들에게 누를 끼쳐서는 안되므로 이것을 절대적인 규칙으로 못박아 놓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 원칙으로, 어떤 원칙이라도 절대적으로 지킬 것이 아니라 때때로 그것을 깨트려서 독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갖도록 하였다.
서론
미술과 미술가들에 관하여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아득한 옛날에는 색깔 있는 흙으로 동굴 벽에 들소의 형태를 그리는 그런 사람들이 미술가들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미술기들은 물감을 사서 게시판에 붙일 포스터를 그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그 밖에도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우리들이 미술이라 부르는 말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으며 고유 명사의 미술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한 이러한 모든 행위를 미술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왜냐하면 미술은 도깨비나 영험이 있다고 숭배를 받는 그런 대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미술가에게 그가 방금 완성한 것이 그 나름대로는 대단히 훌륭한 것일지 몰라도 그것은 '미술'이 아니라고 말해줌으로써 그의 기를 꺾어놓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가 그 그림 속에서 좋아하는 것이 미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라고 일러주어서 그를 혼란에 빠지게 만들 수도 있다.
사실 나는 조각상이나 그림을 좋아하는 데는 아무런 그릇된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풍경화가 그의 집을 연상케 하기 때문에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친구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초상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우리들은 모두 그림을 볼 때에 우리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영향을 끼치는 여러 가지들을 연상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기억들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즐기게 도와준다면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다. 다만 우리가 우려해야 할 점은 어떤 엉뚱한 기억이 우리들에게 편견을 갖게 할 때이다. 예를 들어 등산을 싫어하기 때문에 산 그립으로부터 본능적으로 등을 돌린다든지 할 때에는 그 그림을 즐기는 것을 방해한 혐오감의 원인을 우리들 마음 속에서 찾아야 한다. 미술 작품을 싫어하는 것은 여러 가지 그릇된 이유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
우리가 미술에 대해서 배우는 것은 끝이 없는 일이다. 미술에는 언제나 발견해야 될 새로운 것들이 있다. 위대한 미술 작품들은 우리가 그 작품을 대할 때마다 다르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인간 본연의 모습처럼 다함이 없고 또 예측할 수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미술은 그 자체의 불가사의한 법칙과 모험을 가지고 있는 가슴을 설레게 하는 자극적인 세계인 것이다. 미술에 관해서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누구도 다 알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즉 이러한 작품들을 감상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암시를 포착하고 숨겨진 조화에 감응하려는 그런 참신한 마음가짐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며, 그 마음가짐은 무엇보다도 상투적인 미사여구나 진부한 경귀 같은 것에 흐트러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미술에 관해서 속물 근성을 조성하는 설익은 지식을 갖는 것보다는 미술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훨씬 좋다. 이런 위험은 대단히 현실적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내가 이 장에서 설명하려고 하는 단순한 점들을 잘 파악한 사람들은 표현의 아름다움이나 정확한 소묘와 같은 분명한 자질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작품 가운데서도 위대한 작품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지식을 너무나 자만하기 때문에 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름답지도 정확하게 그려 지지도 않은 그런 그림들만을 좋아하는 체하게 되어버린다. 그들은 너무도 분명히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해주는 듯한 그런 작품을 좋아한다고 고백할 경우 무식하다는 말을 들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진정으로 미술을 감상하는 방법을 잃어버리고 어쩐지 불쾌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을 '대단히 흥미 있는' 작품이라고 부르는 속물이 되고 만다. 나는 그러한 오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 또한 그렇게 무비판적인 방법으로 신뢰를 받기보다는 오히려 전혀 신뢰를 받지 못하는 쪽을 택하겠다.
나는 다음 장들에서 미술의 역사, 즉 건축, 회화, 조각의 역사를 논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안다는 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왜 미술가들이 그처럼 독특한 방법으로 일을 했는지, 그리고 그들은 왜 특정한 효과를 노리는가 하는 점들을 이해하게 도와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미술 작품을 보는 우리들의 눈을 날카롭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림의 미묘한 차이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키워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혼자서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그러나 위험이 따르지 않는 방법은 없다. 우리는 가끔 사람들이 카탈로그를 손에 들고 화랑을 걸어가는 것을 본다. 그들은 한 그림 앞에 걸음을 멈출 때마다 그 그림의 번호를 열심히 찾는다. 그들은 카탈로그 페이지를 넘기다가 그 그림의 제목이나 화가의 이름을 찾으면 다시 걸어간다. 그런 사람들은 그림을 거의 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차라리 집에 머물러 있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이다. 그 사람들은 단지 카탈로그를 체크했을 뿐이다. 그것은 그림의 감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종의 지적인 유희에 불과하다.
미술사에 대해서 약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때로는 이와 유사한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들은 하나의 미술 작품을 볼 때 그림 앞에 서서 그림을 감상하는 게 아니라 그것에 적합한 설명서에 관한 그들의 기억을 찾는 데 몰두한다. 그들은 렘브란트가 키아로스쿠로(명암법)로 유명하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으로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서 유식한 척 고개를 끄덕이면서 "음, 훌륭한 키아로스쿠로로군"이라고 중얼거리며 다음 그림으로 옮겨간다. 나는 이러한 설익은 지식과 속물 근성의 위험성에 대해서 아주 솔직하게 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그러한 유혹에 굴복하기 쉽고, 또 이와 같은 책이 그러한 속물들을 증가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이 눈을 뜨는 것을 돕는 것이지 입을 헤프게 놀리는 일을 돕자는 것은 아니다. 미술에 관해서 재치있게 말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비평가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은 이미 너무나 많은 상이한 문맥 속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 정확한 의미를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참신한 눈으로 그림을 보고 그 그림 속에서 새로운 발견의 항해를 감행한다는 것은 그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지만 더욱 값진 일이다. 우리가 그런 여행에서 무엇을 얻어가지고 돌아올지는 아무도 예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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