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용: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 10점
김선용 지음/비아토르

프롤로그
갈라디아서 1장 유일한 바울의 복음
갈라디아서 2장 전반부 회상으로 권면하기
갈라디아서 2장 후반부 그리스도-사건의 효과: 이신칭의와 그리스도와 연합함
갈라디아서 3장 ‘그리스도-사건’의 빛에서 바라본 율법의 가치
갈라디아서 4장 자기 정체성 다시 깨닫기: 노예가 아니라 자녀!
갈라디아서 5장 신자의 정체성과 윤리, 그 불가분의 관계
갈라디아서 6장 그리스도의 법과 삶의 표준, 그리고 새로운 창조


에필로그
부록 1 바울을 바라보는 새 관점: 기원, 발전, 분화, 그리고 그 이후
부록 2 갈라디아서 공부를 위한 단계별 안내

 


에필로그

갈라디아서가 내뿜는 충격파는 지금 우리를 어떻게 흔들어 놓을 수 있을까? 우리는 바울의 편지에서 어떤 메시지를 들어야 하는가?

바울이 전한 복음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요약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많은 이의 관심을 제대로 받지 못한 측면을 조명하고 싶다.
(1) 복음은 사람의 지성과 영성과 도덕성을 변화시킨다.
(2) 믿음은 욕망을 제어하는 삶과 사랑의 실천으로 표현된다.

변화의 최종 목표는 사랑과 순종의 모범을 보이신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합체된 사람이 그리스도스럽지 않게 되기 어려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에 참여한 사람이 모인 교회 역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을 수밖에 없다. 흉내가 아니라 변화의 결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는 존재가 그리스도-사람Christians이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영의 인도를 받고 있는가? 사랑을 통해 행동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구원의 확신은 바로 이러한 질문에 자신이 어떤 대답을 하는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성서해석의 옳고 그름 역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 판별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 그리스도를 믿음, 그리스도인의 실천, 이 셋은 하나이다.

복음은 지성의 갱신을 낳는다. 바울은 로마서 12:2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의 갱신으로 변화받으십시오. 하나님의 뜻(바람), 선함, 기꺼이 받으실 만한 것, 완전한 것이 무엇인지를 여러분이 분별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사건을 통해 재조립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 '프뉴마’의 내주를 통해 어리석었던 정신(갈 3:1 참조)이 새롭게 개선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의 편지에서 세세한 도덕 지침을 제공하지 않고 굵직한 방향 표시등만 제시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신자는 세상사와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하시는 모습을 분별할 능력이 있으므로 구체적 행동지침 없이도 영의 인도에 따라 옳은 판단과 행동을 할 수 있다.

갱신된 정신을 가진 개인이 모인 교회공동체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기에 바른 방향의 숙고를 할 수 있다. "나의 형제들이여, 여러분에 대해 나 자신이 확신하는데, 여러분 자신은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으로 충만하며, 서로 권면할 수 있습니다"(롬 15:14). 이러한 숙고 능력은 공동체의 문제만 해결하는 데 국한되지 않고 교양 있는 시민으로서 삶을 가능하게 한다. 역사적으로 처음 몇 세기 동안 기독교회는 당대의 지적 조류에 성실히 조응하는 가운데 그리스도 신앙을 설득하고 변증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초기 기독교는 다양한 종교가 난립하는 종교 시장market에서 충분히 매력 있는 선택지가 될 수 있었는데, 이는 기독교가 제공한 담론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와 신자 개인의 오판은 '타락한' 이성에 의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갱신된 이성을 충분히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시민사회의 공공성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기독교인은 존재 자체가 형용모순이다. "실상 이렇게 그리스도에게 종노릇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롬 14:18). 페미니즘이나 차별금지법, 혹은 복지정책에 대해 충분히 알아보지 않고 단편적인 성경 구절이나 배타성만 남은 '화석화된 신학'에 근거해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교회에서 자신의 정치 견해를 밝히고 성도들에게 강압적으로(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그의 적대자들의 '강요'를 집중적으로 비판한 것을 기억하라!) 영향을 주려 하는 목사들의 정치적 식견은 장삼이사의 정치관보다 비루한 경우가 많다. 특히 극우적 정치관을 가진 목사의 경우 더욱 그러한데, 이는 지적 게으름의 결과이지 그리스도 신앙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하나님의 힘으로 갱신된 지성을 가진 사람에겐 모든 것을 분별할 눈과 귀가 있다. 모든 사안을 제대로 보고 들을 수 있으므로 정치적 이슈에 대해 각자가 충분히 숙고할 수 있다. 숙고의 방향성은 분명하다. 복음의 핵심인 생명을 진작시키며 돈과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이웃 사랑'이라는 구체적 행동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복음은 민족, 사회 계급, 신분, 빈부, 직업, 성별이 '이신칭의'라는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크게 외치고 있다.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은 사람들이 세우고 인정하는 모든 형태의 가치와 분류 체계를 가뿐히 무시하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무시하시는 돈과 권력을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이 탐하는 것처럼 모순적인 일은 없다.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의 욕망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리스도인(갈 5:24) 이 다시금 욕망에 휘둘리는 퇴행을 할 수는 없다. "낮에 [생활]하듯이 품위 있는 모습으로 거닙시다. 흥청거림과 술 취함, 음행과 방탕, 분열되어 다투는 것과 질투 없이. 그보다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정을 [만족시키기] 위해 육신의 계획을 세우지 마십시오"(롬 13:13-14).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은 그의 재산과 학력과 나이와 성별과 출신지가 그리스도라는 빛나는 옷으로 가려진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그리스도인을 볼 때 그리스도라는 옷만을 보게 된다.

앞에서 자세히 보았듯이 갈라디아서는 신자의 퇴행 가능성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며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사이의 관계가 자칫 잘못하면 끊어질 수도 있다고 말한다. 갈라디아 회중의 특정 문제를 다루느라 위협적인 말을 곳곳에 사용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겁을 주기 위한 시늉을 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복음의 진리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정죄받고, 내주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라질 수 있으며, 그리스도와 연합이 깨질 수 있고, 은혜가 다스리는 영역에서 쫓겨날 수 있으며, 하나님나리를 상속받지 못할 수 있다. 구원과 칭의는 대체로 미래의 지평에 있으며, 이는 신자의 변화와 순종의 행위를 전제한다. '한번 구원받으면 (어떻게 살든지 상관없이) 그 구원은 영원히 취소될 수 없다'는 교리(?)는 바울이 실제 말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바울이 구원과 칭의를 말할 때는 늘 약간의 불확실성을 살짝 추가한다.

여러분이 늘 순종해 온 것처럼, 내가 함께 있을 때만 아니라 오히려 지금처럼 내가 없을 때에 더욱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 그리하여 [도덕적으로]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 가운데서 여러분은 흠 잡힐 데 없고 순전하고 흠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사람들 가운데서 세상의 별처럼 빛을 발하십시오(빌 2:12, 15).

여기에서 우리는 약간의 불확실성이 주는 긴장감이 그리스도인됨Christianness을 정의하는 문장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본다. 흠 잡힐 데 없고, 별처럼 밝게 빛나는 존재. 그리스도인은 이런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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