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튜어트 밀: 공리주의

 

공리주의 - 10점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책세상

들어가는 말|서병훈

제1장 머리말
제2장 공리주의란 무엇인가
제3장 왜 효용 원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가
제4장 효용 원리를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제5장 정의는 효용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해제 - 제1원리를 향한 포부|서병훈
1. 공리주의의 출발점
2. 벤담과 밀의 만남 그리고 결별
3. 최대 행복의 원리
4. 차라리 ‘불만을 느끼는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
5. 공리주의 도덕의 증명
6. 밀의 《공리주의》에 대한 평가


더 읽어야 할 자료들
옮긴이에 대하여

 



27 효용과 최대 행복 원리를 도덕의 기초로 삼고 있는 이 이론은, 어떤 행동이든 행복을 증진할수록 옳은right 것이 되고, 행복과 반대되는 것을 낳을수록 옳지 못한wrong 것이 된다는 주장을 편다. 여기서 행복이란 쾌락, 그리고 고통이 없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쾌락의 결핍과 고통은 '행복에 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이론이 정립하고 있는 도덕 기준을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특히 고통과 쾌락이라는 개념이 무엇을 뜻하고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의문이 많다. 그러나 소소하게 설명할 것이 많다고 해서 이 도덕 이론의 핵심 명제가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즉 고통으로부터의 자유와 쾌락이야말로 목적으로서 바람직한 유일한 것이며, 바람직한 모든 것(다른 모든 이론과 마찬가지로, 공리주의에서도 바람직한 것은 무수히 많다)은 그 자체에 들어 있는 쾌락 때문에 또는 고통을 막아주고 쾌락을 늘려주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바람직하다는 것이 공리주의의 핵심 명제가 된다.

 


29 어떤 종류의 쾌락이 다른 것보다 더 바람직하고 가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공리주의 원리 와 어긋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른 것을 평가할 때는 양 뿐 아니라 질도 고려하면서, 쾌락에 대해 평가할 때는 오직 양만 따져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전혀 설득력이 없다. 쾌락의 질적 차이가 무슨 뜻이냐, 또는 양이 더 많다는 것을 제외하고 어떤 쾌락을 다른 쾌락보다 더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면, 이에 대해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다. 만일 두 가지 쾌락이 있는데, 이 둘을 모두 경험해본 사람 전부 또는 거의 전부가 도덕적 의무 같은 것과 관계없이 그중 하나를 더 뚜렷하게 선호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더욱 바람직한 쾌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둘에 대해 확실하게 잘 아는 사람들이 쾌락의 양이 적고 엄청난 불만족이 따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리고 쾌락의 양이 적더라도 어떤 하나를 분명하게 더 원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더욱 선호되는 즐거움enjoyment 이 양의 많고 적음을 사소하게 만들 정도로 질적으로 훨씬 우월하다고 규정해도 될 것이다.

 


60 만일 효용이 도덕적 의무를 판가름할 궁극적 원천이라면, 그런 것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해줄 기준으로 원용될 수도 있다. 비록 그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전혀 없는 것보다는 낫다. 이에 비해 다른 이론 체계에서는 도덕률이 제각기 독자적인 권위를 행사하려 하지만 그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공동 심판이 없다. 그들 중 일부가 다른 것보다 우월한 위상을 주장하려 하지만 보다 세련된 논리 이상의 근거를 제시하는 경우는 드물다. 

 


116 우리 자신 또는 우리가 아끼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그럴 의도를 가지는 것에 대해, 분개하고 뿌리치거나 그에 대해 보복을 가하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자리에서 이런 감정의 출발점에 대해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본능이든 아니면 지적 판단의 결과이든간에 모든 동물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다. 왜냐하면 어떤 동물이든지 누군가가 자신이나 자기 새끼를 해치려 하거나 그런 낌새가 보인다 싶으면 당장 덤벼들려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단 두 가지 측면에서 차이가 난다. 첫째, 인간은 단지 자기 후손은 물론, 일부 고등동물들이 그렇게 하듯이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몇몇 상급자뿐 아니라, 모든 인간, 심지어는 지각을 가진 모든 존재에 대해 동정심을 품을 수 있다. 둘째, 인간은 뛰어난 지능을 가진 동물인 탓에 자신이나 타인을 배려하는 감정의 범위가 훨씬 넓다. 이처럼 동정심을 품는 영역이 대단히 크고 넓다는 것과 별개로, 인간은 우수한 두뇌 덕분에 자신과 자신이 속한 인간 사회 사이에 공동 이익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136 즉 우리 가운데서 평등하게 잘 대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을 (보다 상위 의무가 금지하지 않는 한) 우리가 똑같이 잘 대우해야 하며, 사회에서 평등하게 잘 대접받을 자격이 있는, 다시 말해 절대적으로 평등하게 잘 대접받아야 하는 사람을 사회가 똑같이 잘 대우해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사회적 수준, 그리고 분배 정의에 관한 최고 수준의 추상적기준이다. 모든 제도와 모든 덕스러운 시민은 이 기준에 맞출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138 사회 진보의 전 역사는 수정과 변화로 점철돼 있다. 사회 발전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인식되던 관습이나 제도가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 둘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불의나 폭압으로 낙인 찍히며 오명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노예와 자유인, 지주와 농노, 귀족과 평민의 관계가 그랬다.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가시권 안으로 들어와 있지만, 피부색과 인종, 성별에 따라 신분이 매겨지는 것도 앞으로 그런 신세가 될 것이다.

 


140 정의가 문제되는 곳에서는 늘 편의가 관련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다만 정의라는 말에는 특별한 감정이 수반되어 있으므로 정의는 편의와 구별된다. 만일 이런 특징적 감정이 충분히 설명된다면, 이것의 특별한 기원이 무엇인지 따져볼 필요가 없다면, 이것이 사회적 선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도덕적 차원에서 분노를 느끼게 되는 자연스러운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런 느낌이 정의라는 말이 해당되는 모든 경우에 존재할 뿐 아니라 나아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면, 이 정의라는 개념은 더 이상 공리주의 윤리학에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는다. 정의는 그 어떤 종류의 것―이를테면 계급 같은 것 ―보다 훨씬 중요하며 따라서 더 절대적 당위성을 지닌(때때로 특별한 상황에서는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특정한 사회적 효용에 걸맞은 이름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의에는 정도 뿐 아니라 종류 면에서도 다른 것과 구분되는 감정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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