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의 북리스트 | 몽유병자들(32) ━ 제2부 5장 오스트라이의 곤경

 

2023.01.30 몽유병자들(32) ━ 제2부 5장 오스트라이의 곤경

《몽유병자들》 제5장을 끝까지 읽는다. 오스트라이의 곤경, 프랑스-러시아 동맹 이런 것들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는 역사적으로 벌어진 사건들을 세세하게 서술하고 있는 부분이 꽤 많이 차지하고 있다. 우리가 국제관계론의 관점에서 제2부를 읽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들이 어떻게 벌어지고, 역사책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내용들이 있다. 그것들은 조금 논외로 두고 핵심적인 부분만 몇 가지 짚어보겠다. 제1차, 제2차 발칸전쟁을 겪으면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와 굉장히 여러 번 외교 교섭을 했었고, 그러는 과정에서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일종의 태도가 결정되었다. 그것이 일방적으로 결정되었다기보다는 세르비아가 어떤 방식으로 오스트리아와 협상을 하고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국가간 외교를 하거나 국가간 협상을 할 때 이런 부분들이 상대국가에 대한 굉장히 중요한 인식을 만들어낸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상대, 예를 들어 한국의 상대가 되는 저쪽 나라, 저쪽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런 것들도 실체가 있는 사실에 의해서 형성된다 하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중국과의 관계를 조금은 국가적인 외교관계가 소원해졌다고 하는 것도 중국과의 교역이 줄어들고 있고, 그것이 상대적으로 또는 수치상으로도 베트남으로도 많이 넘어가고 있다는 점, 그런 점들을 보면 그런 것들이 국가간 관계를 만들어 내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 어떤 태도가 형성되는, 특히 안좋은 태도가 형성되는 과정들은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는데, 이 부분은 위기, 즉 사라예보 암살사건이 벌어졌을 때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를 미리 읽었다. 그것을 보면 왜 이렇게 불신이 가득할까 그런 것들은 이전 시기에서 형성된 어떤 태도들이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를 대하는 태도 그리고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대하는 태도 이런 태도들이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450페이지에 보면 "이처럼 빈이 추궁하면 베오그라드는 발뺌하는 식으로 힘겨운 상황이 되풀이된 것은, 오스트리아 정책수립자들이 세르비아와의 이해충돌을 다루면서 정상적 외교 절차의 효과를 점점 신뢰하지 않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유심히 지켜봐야 하는 부분이 발뺌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정상적 외교 절차의 효과를 점점 신뢰하지 않게 된다. 심각한 문제이다. 외교 관계에 있어서 국제관계에 있어서 이런 신뢰를, 영원한 신뢰라는 것은 있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일시적이라도 일정한 기간 동안 파트너로서 상대국으로서 관계를 맺으려면 아주 기본적인 신뢰를 주어야 하는데 이런 것들은 1차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나 2023년 지금이나 똑같이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에 대해서 그런 신뢰를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452페이지를 보면 "1913년 10월 세르비아의 교착상태를 겪으면서 오스트리아가 향후 위기에 대처할 때 준거로 삼을 몇 가지 전례가 확립되었으며, 실제로 사라예보 암살사건 이후 양국 사이에 위기가 폭발했을 때 오스트리아는 그 전례에 따라 대처했다." 1913년 10월이니까 1914년의 위기가 생겨나기 전에 이미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태도는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정말 하나의 연속성 안에서 외교관계라는 것이 계속 만들어지고 전례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가장 명백한 전례는 최후통첩의 효과가 입증된 듯 보였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 그런데 또 세르비아는 우리가 3부에서 보았던 것처럼 끊임없이 오스트리아를 속인다. 참 심란한 문제이다. 첫째가 어쨌든 1913년 10월 위기를 거치면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해서 갖게 된 첫번째 전례, 준거틀은 세르비아는 최후통첩을 하면 효과가 있는 나라이다 라는 것. 그런데 최후통첩을 하면 효과가 있다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 최후통첩을 하면 이제 싸움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후통첩을 한다는 것은 외교적인 관계, 대화, 외교적 협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없다고 하는, 흔히 쓰는 말로 퇴로를 스스로 막아버린, 전쟁으로 가는 것 외에는 아무런 대책이 없는 그런 방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두번째 전례는 세르비아가 빈과의 소통을 관리하면서 장차 화근이 될 인상을 남겼다는 것이다." 이것도 좀 심란하다.  "주도면밀하게 도발하고 불순응하는 정책을", 이게 세르비아의 정책이다, 그런데 노골적으로 직접적으로 면전에다 대고 그러면 모르는데 그것을 "다정함에 가까운 간사한 정중함으로 포장한다는 인상이었다." 거의 소시오패스이다. 심리학자들의 강연을 유투브에서 보면 사이코패스는 노골적으로 자기가 반인간적 감정을 드러내기 때문에 식별하기 때문에 소시오패스는 식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한번쯤은 만났다고 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고민 없고 갈등 없고 연민없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을 소시오패스라고 한다.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에 대해서 최대한 이익을 빨아먹으려고 노력을 한다. 그것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정함에 가까운 간사한 정중함으로 포장하는 것은 외교적인 수사 또는 외교적인 술수 보다도 더 심한 느낌을 줬다고 하겠다. "이것은 단지 이해관계의 충돌이 아니라 정책 스타일의 충돌이기도 했다." "빈이 온갖 모욕을 침착하게 감내하면서 계속 몰아붙여야만 굴복하고, 오스트리아가 압박을 늦추는 즉시 도전과 도발을 전개할 것처럼 보였다." 이런 식으로 세르비아가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세르비아는 궁극적으로 무력만을 이해한다는 공리가 더욱 힘을 얻었다." 다시 말하면 세르비아는 무력 외에는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나라라고 오스트리아는 공리를 세우게 되었다. 그러면 세르비아와 일종의 위기 상태, 일촉즉발의 위기 상태에 처하게 되면 오스트리아는 대화로 풀어봐야지라는 것을 애초에 하지 않고 무력만을 사용해야겠다고 하게 되는 것이다. 

제5장 450 이처럼 빈이 추궁하면 베오그라드는 발뺌하는 식으로 힘겨운 상황이 되풀이된 것은, 오스트리아 정책수립자들이 세르비아와의 이해충돌을 다루면서 정상적 외교 절차의 효과를 점점 신뢰하지 않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제5장 452 1913년 10월 세르비아의 교착상태를 겪으면서 오스트리아가 향후 위기에 대처할 때 준거로 삼을 몇 가지 전례가 확립되었으며, 실제로 사라예보 암살사건 이후 양국 사이에 위기가 폭발했을 때 오스트리아는 그 전례에 따라 대처했다. 가장 명백한 전례는 최후통첩의 효과가 입증된 듯 보였다는 것이다. 주도면밀하게 도발하고 불순응하는 정책을 다정함에 가까운 간사한 정중함으로 포장한다는 인상이었다. 이것은 단지 이해관계의 충돌이 아니라 정책 스타일의 충돌이기도 했다. 베오그라드는 빈이 온갖 모욕을 침착하게 감내하면서 계속 몰아붙여야만 굴복하고, 오스트리아가 압박을 늦추는 즉시 도전과 도발을 전개할 것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세르비아는 궁극적으로 무력만을 이해한다는 공리가 더욱 힘을 얻었다.

제5장 453 두번째 전례는 세르비아가 빈과의 소통을 관리하면서 장차 화근이 될 인상을 남겼다는 것이다.

 


이게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와의 관계에서 감내해야만 했던 사건이고, 두번째가 더 중요한 사건인데 국제관계론에서 보면 세르비아에 대한 태도를 어떤 식으로 할 것인가, 무력 외에는 답이 없다라는 태도를 세운 것이고 두번째로는 발칸전쟁이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고 하는데 어떤 것인가. 발칸전쟁을 겪으면서 발칸 전쟁을 대하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의 태도가 정말 복잡하고 복잡했다. 순식간에 합종연횡을 한다. 그런데 오스트리아는 이 과정을 겪으면서 "무엇보다 이 전쟁에서 빈이 얼마나 고립되어 있고 발칸 사태에 대한 외국 수상들의 이해가 얼마나 부족한지 드러났다." 그리고 다른 강대국들의 무관심과 국제 공동체는 오스트리아가 발칸문제 때문에 심각한 안보 위기가 닥쳐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고, 이것이 또 오스트리아의 잘못만은 아닌 것이 이 시기 유럽의 국제정치적 상황에서 가장 심각하고도 중요한 항상 거론되는 요소가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쇠약함이다.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강력할 때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 꼭 요충지에 있는 핵심적인 나라가 오스트리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게 과거의 오스트리아를 대하는 태도이다. 그러면 유럽의 나라들과 오스트리아는 적어도 공동의 적이 남동쪽에서 오고 있기 때문에,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유럽으로 넘어온다고 하면 곧바로 오스트리아를 거치게 되기 때문에 신뢰가 그런 정도로, 방어의 시기에는 신뢰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영국과 프랑스의 언론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망조가 든 시대 착오적인 국가로 보는 인식을 퍼뜨리는 등 적대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그러면 유럽은 하나다 그리고 유럽 대륙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의 생태계처럼 보는 것이 전통적인 관점이라면 그러다보니 오스트리아가 오스만튀르크 제국에 당하면 우리도 위험해 유럽을 지켜야지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권력정치가 횡횡하고 유럽 대륙에 있는 나라들끼리도 어느 나라와 동맹이냐에 따라서 서로 다른 태도를 오스트리아에 대해서 보였다는 것이다. 

제5장 453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발칸전쟁은 모든 것을 바꾸어놓은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이 전쟁에서 빈이 얼마나 고립되어 있고 발칸 사태에 대한 외국 수상들의 이해가 얼마나 부족한지 드러났다.

제5장 453 더 우려스러운 점은 다른 강대국들의 무관심이었다. 국제 공동체는 오스트리아가 남쪽 주변부에서 진짜 안보 위협에 직면했고, 그 위협에 대응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여기에는 더 폭넓은 태도 변화가 반영되어 있었다.

제5장 454 전전 수년동안 영국과 프랑스의 언론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망조가 든 시대 착오적인 국가로 보는 인식을 퍼뜨리는 등 적대적인 기사를 쏟아내며 이 경향을 더욱 강화했다.



그 다음에 프랑스와 러시아의 관계 문제가 거론되고 있는데 지나가도 크게 어려움이 없다. 다음 주에 제6장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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