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의 북리스트 | 사회사상의 역사 - 시대와 사상의 문맥
- 강의노트/강유원의 북리스트 2021-23
- 2023. 3. 26.
「강유원의 북리스트」에서 제공하는 《사회사상의 역사》을 듣고 정리한다.
2023.03.20 사회사상의 역사 - 시대와 사상의 문맥
사상가는 1)자신이 처한 사회 고유의 문제들과 2)사상적·학문적으로 대결하기 위해 선행하는 이념, 개념, 체계를 도구로 삼아 3)자신만의 사상을 창조하거나 질적 변용을 이룬다. 1)은 시대의 문맥이며, 2)는 사상의 문맥, 3)은 사상가의 개성이다.
같은 시대에서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유를 한다해도 다른 사상맥락을 취하는 경우, 다른 시대에서 사유를 한다해도 같은 사상맥락을 취하는 경우가 있다.
《사회사상의 역사》 서장 세번째 섹션 시대와 사상의 문맥을 설명하겠다. 앞에서 두번째 섹션이 사회사상사의 방법이라고 했는데 거기서 사회사상사의 방법으로 저자가 제시한 것이 썩 적절치 않다, 적절치 않다는 표현보다는 널리 알려진 방법은 아니고 그냥 이것 경제학적 접근, 철학적 · 윤리학적 접근, 그리고 법학 · 정치학적 접근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세가지가 맞물려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경제학, 철학 · 윤리학, 법학 · 정치학 이런 것들은 학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으니 사상이다. 그러니까 사회사상사의 방법이라고 할 때는 이런 학들만을 계속해서 이어 붙이면 학적이 내용만 붙이면 아주 좁은 의미에서 사회사상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사회사상이라고 하면 사회라는 것에 대한 사상이니까 그 명칭을 그대로 분석해보면 사회라고 하는 것의 사상이니까 아주 좁게는 그 사상이 형성된 또는 그 사상이 스며들어가 있는 어떤 사회나 어떤 시대에 대해서 연구하지 않고 그냥 사상의 변천만 따져 물을 수 있는데 대체로 그런 것들은 사회사상사의 영역에서 다루지 않는다. 사회사상이라고 하면 사회사상이 되었건 정치사상이 되었건 또는 역사상이라는 말은 없는데 역사상이 되었건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시대와의 관계 속에서 다룬다는 것을 말한다. 가령 '철학사'라고 하면 순전하게 순정한 철학이론만을 다룰 수는 있다. 예를 들어서 훌리안 마리아스의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그냥 시대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따져묻지 않고 철학자들의 텍스트를 가져가다 철학자들이 자신의 최종적인 사유의 성과로 내놓은 텍스트를 가져가다 시대를 따져묻지 않고 그 철학책에 담겨있는 내용만을 비교해서 살펴본 다음에 선행하는 철학자가 후대의 철학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런 것을 살펴보면 순정한 철학사가 된다. 그런데 '철학사상사'라고 하면 반드시 시대라고 하는 것을 언급해야 한다. 따라서 앞서 예를 들었던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도덕감정론』, 『법학강의』 이런 것들은 저자가 애덤 스미스를 염두에 두고 경제학적 측면, 철학적 · 윤리학적 측면, 그리고 법학 · 정치학적 측면을 얘기했던 것 같은데 이 세 개의 텍스트를 '사상'이라고 한다면 이 각각의 사상 안에 어떠한 시대의 어떠한 측면들이 들어가 있는지를 말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 된다. 따라서 오늘 읽는 세번째 섹션의 시대와 사상의 문맥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사회사상의 방법론을 가장 잘 집약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시간에 말했던 사회사상의 방법은 바로 시대와 사상의 문맥을 말한다. 그런데 문맥은 말은 context라는 말을 흔히 번역해서 쓰는 말인데 시대는 문맥이 될 수 있다. 특정한 사상사가 사상가가 살고 있는데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사상 속에 반영해 들여온다. 그것이 사상의 배경으로서의 시대이다. 그런데 또다른 측면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하면 사상이 어떤 시대 속으로 스며들어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지금 현재 2023년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아주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하나의 아주 중요한 사상이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세계가 뭉쳐서 뭔가를 해야 한다, 일본은 선진국이다, 일본은 오야붕이고 우리는 꼬붕이다 하는 그런 생각이 있다. 그런 말을 고상한 말로 대동아공영권이라고 한다. 그런데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이 사상은, 이것은 사상이다, 20세기 중반 무렵에 즉 1930~1940년대 무렵에 일본에서 형성된 사상이다. 그것은 그 당시 일본제국이 제국적 행위자가 되고자 하는 그런 정치적인 경제적인 사회적인 상황 속에서, 국제관계론적인 상황 속에서 그 상황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사상이다. 다시 말해서 대동아공연권이라는 이 사상은 1930년대, 1940년대, 또 멀리가면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 그런데까지도 뭔 가가 뿌리가 있겠다. 그 시대의 국제관계론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상황이라고 하는 그런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만들어진 사상이다. 그게 바로 이제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사상을 이해하려면 그 시대라고하는 context를 이해해야 한다 라고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사상이 한꺼번에 어느날 갑자기 몇월 며칠을 기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상은 그것이 남아서 그것이 형성된 시대가 지나가도 사상은 남아서 후대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면 그 사상이 나중 시대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후대의 사상에게, 선행하는 시대에 만들어진 사상은, 후대의 사상에게 하나의 사상적 배경이 된다. 즉 특정한 시대에 만들어진 사상은 선행하는 시대에 만들어진 사상이 후대의 특정한 시대의 사상에게 context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어떤 사상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그 사상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라고 하는 배경과 선행하는 시대에 만들어진 사상이라고 하는 배경, 이 두개의 context를 갖게 된다. 이것을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 이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사상이 한국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이 이런 저런 다른 방식으로 돌출되어 나오기는 하는게 그것의 뿌리는 대동아공영권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서 예전에 이전 대통령 시절에 일본에서 수출 제재를 하니까 정부에서 그런 것을 했었다. '그럼 우리도 뭐 너희들과 상대 안한다'고 했을 때 이른바 극우보수들이 나와서 '일본에게 된통 당해서 망해버려야 해, 일본한테 덤비며 안돼' 이런 얘기를 한다. 바로 이것이 대동아공영권이 패배주의적인 찌꺼기로 남아서 그 세대의 사람들에게 스며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스며들어간 대동아공영권이라고 하는 것이 꼭 길거리에 나와서 시위하는 극우보수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청와대 안보실 이런 곳에 있는 학자들에게도 있는 것이고 그 학자들에게 영향을 받은 위정자들에게도 스며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대와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시대는 충분히 contetxt라고 할 수 있는데 사상이 어떤 방식으로 context가 되는가, 과거의 사상이 오늘날에도 살아남아서 오늘날의 사람들의 사상에게 배경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context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서장 사회사상이란 무엇인가의 제3절 시대와 사상의 문맥이라는 말은 그렇게 이해하면 된다. 시대라는 것과 사상이라는 것이 배경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 지금 말한 것이 "첫째는 사상가들이 살았던 '시대의 문맥'이며 둘째는 각 사상가가 과거로부터 계승한 '사상의 문맥'이다." 이것을 풀어서 설명한 것이 "사상가는 특정한 시대와 사회를 살며 그 사회 고유의 문제들과 사상적 · 학문적으로 씨름하는 가운데", 이것이 1번이다. 사상사를 공부할 때는 그 사상가가 살고있는 사회 고유의 문제들이 무엇인가를 먼저 공부해야 한다. 이것은 그 사상가가 무슨 얘기를 했는가를 먼저 보면 안되고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문제가 무엇인가, 그 사회는 어떠한 배경 속에서 형성되어 왔는가 또는 어떠한 역사적 경과 속에서 그 사회가 성립되었는가를 봐야 한다. 그것을 보는 것이 첫번째이다. 그 다음에 "그 사상가가 사상적 · 학문적으로 씨름하는 가운데", 씨름이라는 말이 있는데 대결한다고 해도 되겠다. 이것이 2번이다. 어떤 식으로 대결하는가. 즉 그 사상사가 사용하고 있는 방법론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 "선행하는 여러 세대로부터 받아들인 특정한 이념, 개념, 체계를 이용해" 그것이 바로 이제 2번째 얘기이다. 예를 들어 여기 홉스도 나오고 그러는데 홉스가 살았던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극심한 내란의 시대이다. 이것이 사회 고유의 문제이다. 홉스 사회의 첨예한 문제이다. 물론 어떤 사상가는 내란이라는 것에 대해서 심란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내란이야 말로 인류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고민스럽지 않고 오히려 환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이 어쨌든 그 사회에서 전면에 부각되고 있는 문제들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사회 고유의 문제이다. 그러면 그것을 생각하고 그것에 대한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고 하려면 자기 혼자서 멀뚱멀뚱 앉아서 또는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도를 닦아서 터득해낼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대체로 공부를 한다. 그 공부가 무엇인가. 선행하는 여러 세대들로부터 받아들인 특정한 이념, 개념, 체계를 이용해서, 바로 대결의 도구를 활용하는 것이다. 이때 바로 선행하는 여러 세대로부터 받아들인 특정한 이념, 개념, 체계 이것이 바로 사상의 문맥이겠다. 그 다음에 3번째로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데 "스스로의 사상을 탄생"시킨다. 탄생이라는 말이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고 하겠지만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개조한다 또는 새로운 국면에서 즉 과거에 만들어진 이념, 개념, 체계라고 하는 것이 지금 현재 살고 있는 사회의 문제들과 결합되면서 일종의 화학 작용을 일으켜서 그 사상가의 사유 속에서 화학 작용을 일으켜서 새로운 사상을 창조해 내겠다. 이것이 결과물이겠다. 이 과정이 사실 3번째 어떻게 해서 그가 결정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했을까 이것이 사실 사상 창조의 비밀이다 라고 얘기가 된다.
서장 21 첫째는 사상가들이 살았던 '시대의 문맥'이며 둘째는 각 사상가가 과거로부터 계승한 '사상의 문맥'이다. 사상가는 특정한 시대와 사회를 살며 그 사회 고유의 문제들과 사상적 · 학문적으로 씨름하는 가운데 선행하는 여러 세대로부터 받아들인 특정한 이념, 개념, 체계를 이용해 스스로의 사상을 탄생시켜왔다.
철학의 역사 속에서도 그런 것을 창조해 낸 사람은 몇 안된다. 공부를 열심히 해도 그것이 안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열심히 하면 할 수록 나는 모자라는 구나 라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이니까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결국 뒤쳐지는 인간임을 증명해내는 역설적인 과정이라고 하겠다. 칸트 뭐 별 거 아니라고 얘기하지만 웃자고 하는 얘기이다. 칸트 같은 경우에는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사회적인 문제들은 그렇게 고민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칸트의 사회사상이라는 그런 장르는 아예 없다. 그 대신에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전회라고 하는 아주 무시무시한 철학사의 전환을 이루어 낸 사람이다. 그것이 칸트가 가만히 앉아서 쾨니히스베르크에 있는 자기 집에서 바깥을 쳐다보다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연구를 했다. 칸트의 박사 학위 논문이 전체의 운행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연구하고 뉴턴의 방법론을 따져 묻고 공부를 하다가 거기까지는 선행 세대의 사상 전통을, 사상을, 개념을, 체계를 공부하는 과정인데 그러다가 이것을 우리 인간이 앎을 만들어 내는 것에 한번 적용을 해보면 어떻까 라고 생각하면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이루었다. 그것이 되자 나머지는 그냥 쓱 풀려버린 것이다. 그런 생각을 칸트가 어떻게 했을까. 그냥 공부하고 요약 정리하고 끝냈으면 됐을텐데 그러지 않고 하나의 새로운, 사태를 파악하는 새로운 입각점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나 무함마드 같은 예언자가 아닌 석가모니를 보면 알 수 있다. 석가모니는 사회 고유의 문제들이 아니라 인간 개인에게 처해있는 아주 고유의 문제들을 생각한다. 그것이 생로병사이다. 태어나고 나이들어서 병들어 죽는다. 석가모니가 태어날 때까지 모르는 사람이 있었는가, 다 알고 있었다. 생로병사는 만인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조건이다. 이게 인간 고유의 문제이다. 인간 고유의 문제로서의 생로병사를 깊이 생각한 것이다. 우리는 그만큼 생각하지 안았다. 그러다가 집을 나갔다. 죽 가출을 한 것이 아니라 출가이다. 가출은 돌아올 것을 전제하는 것인데 출가는 아예 떠나는 것이다. 떠나서 석가모니가 곧바로 이거다 하고 내놓은 것이 아니다. 그 당시 수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그 과정을 거친다. 그 다음에 보리수 아래 앉는다. 앉는 순간 깨달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과정이 없으면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3번째 순간이다. 그러니까 사회 고유의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고민을 했으면 석가모니는 사회사상가가 되었을 것이지만 인간 고유의 문제에 대해서 얘기하고 그 인간이 우주 속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가를 고민했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에게 영원히 주어진 문제, 생로병사,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종교를 창시할 수 있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게 바로 시대와 사상의 문맥의 의미이다.
21페이지를 보면 " 각 사상가에게 독자적 관점과 사고방식이 더해져 선행 세대로부터 계승된 사상 전통은 새로운 시대의 문제와 격투하면서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어떤 질적 변용을 이뤄가는 것이다." 여기서 질적 변용이라는 말이 앞에서 말한 3번 창조, 새로운 사상의 창조라는 것이 조금 풀어서 얘기하자면 질적 변용이겠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시대와 사상의 문맥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두번째 문단을 보면 " 각 시대의 사회사상의 단면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같은 시대의 문맥 내부에서 사고하면서도 다른 사상 전통에 뿌리내린 결과 또다른 사회사상이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이것 굉장히 재미있다. 같은 시대를 살았는데 두 명의 사상사가 같은 시대를 살았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내놓은 사회사상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예를 들 건이 "18세기 유럽에 살며 문명사회의 위기라 일컬어진 동질의 문제와 씨름한 스미스와 루소"이다. 문명사회라고 하는 것이 저자의 아주 중점적인 관심사이다. 저자의 책을 보면 『흄의 문명사회』라는 책으로 산토리학예상을 받았다. 그러니까 같은 문명사회의 위기라 일컬어진 문제와 씨름했다는 것은 스미스와 루소가 사회 고유의 문제에 대해서 '이것이 문제야'라고 한 것은 같다. 그런데 루소가 내놓은 해결책과 스미스가 내놓은 해결책, 즉 사상은 다르다. 그 원인이 뭐겠는가. 간단하게 말하면 다른 사상 맥락을 취하면 대개 그렇게 된다. 그러니까 애덤 스미스가 문명사회가 위기네 하고 심각하게 생각한 다음에 무엇을 공부해서 이것을 해결해볼까 하는 그 공부의 내용과 루소가 공부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학파가 달라지는 것이다. 스미스나 루소가 학파를 만든 것은 아닌데 적어도 후대의 학자들이 많은 사상가들이 근거를 삼은 것을 보면 하나의 학파를 형성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런 경우는 일차적으로는 다른 사상 맥락을 취하면 사회적인 문제의식은 동일한 것이라고 해도 다른 사상 맥락을 취하면 다른 사상의 결과로 귀결될 수 있다. 또다른 예를 들어보면 "19세기 유럽에 살며 자본주의의 위기와 발흥이라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한 밀과 마르크스의 경우가 전형적이다." 이런 경우에도 다른 사상이 나온다. 그 다음 또다른 예가 있다. 같은 사상 전통에 있으면서도 시대가 달라지면 해결책도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서 흄과 하이예크, 이것은 자유주의이다. 흄은 특히나 자유주의인데 흄은 18세기 유럽이고 하이예크는 20세기 미국이다. 그리고 칸트와 롤스의 경우도 들 수 있다. 이럴 때는 가령 책을 '자유주의의 역사'를 쓸 때 자유주의라는 사상 하나를 놓고 그것이 각각의 시대, 17세기, 18세기, 19세기, 20세기, 네 개의 세기를 걸쳐서 자유주의가 어떤 식으로 변용되었는가를 본다면 그것은 같은 사상 맥락 속에서 있지만 시대가 다름에 따라 그 사상이 다른 방식으로 사유되었다. 같은 사상의 맥락 속에 있다는 말은 근본 전제는 일단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은 일반적인 얘기이고 앞서서 말한 것처럼 사회 고유의 문제들을 대결해서 어떤 도구들을, 이념, 개념, 체계들을 이용해서 그런 도구를 이용해서 대결해서 자기만의 창조적인 사상을 만들어 내는데 그런 질적 변용에 있어서 비밀이 무엇일까. 대체로 우리는 이런 것에서 보면 저자가 22페이지에서 말한 것처럼 개별 사상가들의 개성을 해명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창조의 비밀을 만들어 내는 열쇠 중 하나가 개성이다.
서장 21 각 사상가에게 독자적 관점과 사고방식이 더해져 선행 세대로부터 계승된 사상 전통은 새로운 시대의 문제와 격투하면서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어떤 질적 변용을 이뤄가는 것이다.
서장 21 그 결과 각 시대의 사회사상의 단면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같은 시대의 문맥 내부에서 사고하면서도 다른 사상 전통에 뿌리내린 결과 또다른 사회사상이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서장 21 18세기 유럽에 살며 문명사회의 위기라 일컬어진 동질의 문제와 씨름한 스미스와 루소, 19세기 유럽에 살며 자본주의의 위기와 발흥이라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한 밀과 마르크스의 경우가 전형적이다.
서장 22 어느 한쪽의 문맥에 다른 한쪽의 문맥을 환원시키지 않는 형태로 개별 사상가들의 '개성(individuality)'을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사회사상을 공부한다고 하면 크게 세가지를 공부한다는 말이 나오게 된다. 첫째가 그가 살았던 시대, 시대의 문제가 무엇인가. 두번째 그는 어떤 사상 전통 속에서 사유하는가, 즉 무엇을 도구로 가지고 사유하는가, 무엇을 공부했는가. 세번째는 그 사상가의 개성은 무엇인가, 즉 새로운 사상을 창출해내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요인이라고 하는 것이 individuality인데 그 개성은 무엇인가. 이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저자는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고 곧바로 구체적인 의미를 스미스와 마르크스를 예를 들어서 생각한다. 재미있다. 동시대인은 아니다. 스미스는 "18세기 산업혁명 이전 시대의 스코틀랜드인"이고, 마르크스는 "영국의 산업혁명이 거의 완료되고 구미 국가들의 자본주의가 확립되어가던 19세기의 독일인"이라는 차이가 있다. 시대도 다르고 사실은 그들이 직면했던 문제도 다르다. 그리고 살던 나라도 다르고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그들이 살았던 나라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물려받은 사상의 배경도 다르고 그들이 공부한 내용도 다르고 그들이 직면했던 문제도 다르다.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그것이 다르지만 저자는 다시한번 얘기한다. 서구 근대 '문명사회'라고 하는 더 큰 맥락 속에 들어간 사람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스미스와 마르크스를 놓고 이야기할 때 비교가 검토가 가능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르크스와 스미스는 서구 근대의 문명사회라고 하는 더 넓은 또는 더 상위의 범주에 포섭되는 사람들이다 라고 얘기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사회사상을 따져 묻는다고 할 때 또는 정치사상을 따져 묻는다고 할 때 그것이 사상을 따져 묻는다고 할 때는 지나치게 넓은 범위에서 비교를 해나가면 안된다. 다시 말해서 방금 얘기된 것처럼 스미스와 마르크스는 서구 근대 문명사회라는 맥락 속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비교가 가능하다. 그런데 가령 정치사상, 사회사상을 탐구하면서 마르크스와 서기 전 5세기의 플라톤을 비교하면 사실은 그리 큰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은 모든 비교가 적당치 않다. 가령 노자 도덕경의 정치사상과 마르크스의 정치사상을 비교한다는 것은 정말 황당무계한 짓이다. 뭐든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비교라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 그들이 공통 문맥common context 속에 있을 때 비교가 가능하다. 물론 비교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마르크스와 플라톤을 비교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것은 어떤 경우인가. 마르크스가 우주와 인간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하나의 무엇이냐, 이를테면 칼 뢰비트 같은 경우는 신학적 원가 있다고 얘기를 한다. 그가 살아갔던 시대와 그가 공부한 내용과 관계없이 그가 가지고 있던 뼈대, 철학적 원리와 플라톤이 가지고 있던 철학적 원리를 비교할 수는 있다. 그것을 비교해서 쓴 것이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책이겠다. 그런 비교가 가능하기는 한데 그럴 때는 우리는 정치사상을 비교한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와 플라톤의 철학적 원리를 비교한다고 얘기한다. 그런 경우에는 사상이라고 하지만 비교가 가능한 경우에는 철학적인 원리, 즉 시대의 문맥을 벗어난 철학적 원리를 비교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서장 22 우선 두 사람 사이의 '시대의 문맥'에는 18세기 산업혁명 이전 시대의 스코틀랜드인과, 영국의 산업혁명이 거의 완료되고 구미 국가들의 자본주의가 확립되어가던 19세기의 독일인이라는 큰 차이가 있다.
서장 23 두 사람 모두 서구 근대 '문명사회'의 근본적 문제와 맞선 사상가였던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공통 전제인 '문명사회'는 무엇일까? 그것은 첫째로 자유, 풍요, 진보라는 말로 표현되는, 그 이전 사회와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새로운 사회질서" 그리고 이제 마르크스는 영국에서도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사회에서는 의회 민주주의의 제도와 법률이 현실화되고 있었다, 이런 것들을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스미스가 관찰한 시장경제와 마르크스가 관찰한 시장경제는 종류가 다른 것이다. 이런 것들은 구체적으로 본문의 내용에 들어가면서 읽어볼 수 있는 것인데 그런 것들이 어쨌든 시대가 달랐기 때문에 밀과 마르크스는 비교해보면 "밀은 의회민주주의 개량을 통한 자본주의 문명의 점차적 개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극복에 의한 공산주의의 실현이라는 대극적으로 다른 전망을 제출한 것이다." 이들은 같은 시대를 살면서 서로 다른 사상적 전통 속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해결책도 달랐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잘하게 예를 많이 들어서 설명하기 보다는 이 부분에서는 사회사상사의 방법으로서 시대와 사상의 문맥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서장 23 그렇다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공통 전제인 '문명사회'는 무엇일까? 그것은 첫째로 자유, 풍요, 진보라는 말로 표현되는, 그 이전 사회와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말하며 좀더 구체적으로 서구 사회가 르네상스 이래로 키워온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두 사회제도를 기본으로 하는 사회를 말한다.
서장 25 밀은 의회민주주의 개량을 통한 자본주의 문명의 점차적 개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극복에 의한 공산주의의 실현이라는 대극적으로 다른 전망을 제출한 것이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 두 사람은 다른 '사상'의 문맥에서 다른 '문제'를 스스에게 부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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