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의 북리스트 | 사회사상의 역사 - 제3장(1)

 

 

2023.05.17 사회사상의 역사 - 제3장(1)

- 16세기의 주요 사건
1581. 네덜란드 북부 저지대의 7개 주가 에스파냐의 지배로부터 독립하여 공화국이 되었다.
1588.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잉글랜드가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
1598. 프랑스 앙리 4세 ‘낭트칙령’ 선포

- ‘17세기 일반 위기’(The General Crisis of the 17th Century)
1618-1648. 30년 전쟁
1642-1651. 잉글랜드 내전
1685. 프랑스 루이 14세 낭트칙령 폐지, 영토확장 정책

 

《사회사상의 역사》는 제3장 고전적 '사회계약' 사상의 전개, 지난 번에 제2장 종교개혁의 사회사상은 한번에 정리를 했다. 그런데 이 부분은 한번에 정리하기 어렵다. 종교개혁의 사회사상이라는 것은 정리하기가 쉽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이라는 것과 사회사상이라는 것을 연결시키는 데는 수없이 많은 매개고리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매개고리들을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를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제2장 종교개혁의 사회사상이 20페이지가 안된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고 지난 번에 말했듯이 막스 베버 한 사람을 가지고 이미 지나가버린 얘기를 가지고 종교개혁과 사회사상을 연결한다는 것은 간단치 않다. 그리고 하나 더 얘기해보자면 종교개혁이라는 주제, 그 주제 아래에 뭔가를 묶을 수 없다. 교회사 또는 기독교의 역사를 공부를 해보니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것이 프로테스탄트의 등장 그것 하나 가지고 설명이 끝나지 않는다. 그냥 종교개혁이라는 말 자체를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 그 주제 아래로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이 안되는데 복잡한 것은 복잡한대로 더듬어가면서 익혀가는 것 그 정도, 근현대교회사 이런 것을 읽어보면 그리 간단하지 않다.  

 

고전적 '사회계약' 사상의 전개 이 부분은 분량이 꽤 된다. 이 부분은 한번에 얘기를 하기 어렵다. 미리 크게 얘기를 해보면 홉스와 로크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잉글랜드의 사회계약론이다. 사회계약이라고 하는 것을 이 두 사람만을 가지고 얘기를 하는 것은 곤란하고 루소도 있고 푸펜도르프도 있고 그로티우스도 있고 간단치 않다. 그런데 어쨌든 《사회사상의 역사》를 읽는 이유는 이 책은 대략 보건대 약 30년 전의 교과서적인 방식으로 정리된 내용을 바탕에 깔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이미 정리된 것이어서 다시 해석해볼 필요가 없는 또는 거론을 다시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여겨왔던 것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 좀 복잡한대로 세부적인 사항들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아내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상식으로 외웠던 것들이 이제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기 시작하면 시간이 아까워서 공부를 안하는게 낫다는 것이 된다. 이것은 부정적인 측면이고 그와 더불어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생각해보면 무엇을 탐구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을 탐구해야 하는가 라고 하는 지점들을 짚어보는데 필요하다. 앞에서 종교개혁의 사회사상은 무엇을 탐구할 것인가에 대해서 거론하지 않았다. 제2장은 지나가도 괜찮다 그런데 고전적 '사회계약' 사상의 전개는 무엇을 탐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자세하게 얘기해 보겠다.   

 

먼저 고전적 '사회계약' 사상의 전개는 앞서 말한 것처럼 로크와 홉스의 사회계약 사상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로크와 홉스의 사회철학 또는 그 사람들의 정치사상은 어떤 식으로 논의를 전개해야 하는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첫번째 섹션이 1. '시대'의 문맥: 국제 상업 전쟁의 개막으로 되어있다. 83페이지를 보면 "프랑스에서는 1598년 앙리 4세가 '낭트 칙령'으로 프로테스탄트(위그노)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해 오랜 세월에 걸친 종교전쟁을 종결지었으며" 로 되어있다. 국제 상업 전쟁의 개막이라고 하는 것을 딱 2페이지 써놓고 있다. 이 부분에 있는 얘기는 일단 한번 보면 1598년에 위그노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해서 종교전쟁을 종결지었고, "1588년에는 영국(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스페인의 '무적함대(아르마다)'를 격파"했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거기에 보면 "무적함대(아르마다)'를 격파해 주권국가로서의 기초를 다졌다." 아르마다를 격파했다는 것과 주권국가로서의 기초를 다졌다는 것은 연결고리가 없다. 이런 것은 조심해야 한다. 전쟁에서 함대 하나 격파했다고 해서 잉글랜드가 주권국가가 되었다고 하면 국제관계론이 쉽다. 주권국가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주권을 가졌다라고 얘기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권 개념에 대해서는 5월이 지나면 주권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복잡다단하게 형성되었는가 개념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려고 한다. 주권sovereign이라는 것이 정말 어마어마한 무시무시한 개념이다. 근대 정치 사상에 대해서 공부하려면 주권이라는 개념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데 그냥 사전에 나와있는 한두줄 가지고는 안된다. 그래서 "주권국가로서의 기초를 다졌다"라는 말은 옆에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써두어야 한다.  

제3장 83 프랑스에서는 1598년 앙리 4세가 '낭트 칙령'으로 프로테스탄트(위그노)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해 오랜 세월에 걸친 종교전쟁을 종결지었으며, 1588년에는 영국(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스페인의 '무적함대(아르마다)'를 격파해 주권국가로서의 기초를 다졌다. 


그 다음에 "네덜란드에서는 1581년에 북부 저지대의 7개주가 스페인의 지배로부터 독립해 공화국이 되었다. 물론 '17세기의 위기'(트레버로퍼)라는 말도 있듯이 이 세기 내내 내란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온 것이 영국에서는 절대왕정과 청교도의 대립이 잉글랜드내전을 일으켰다. 지금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라든가 이런 것들을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다. 잉글랜드내전이 청교도혁명에 의해서 일어났다고 하는데 이 부분은 조금 유보해야 한다. 1642~48년이 잉글랜드내전인데 "절대왕정과 청교도의 대립이" 잉글랜드내전을 일으켰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잉글랜드내전이 일어난 것은 맞는데 절대왕정과 청교도의 대립이 잉글랜드내전으로 간 것은 아니다. 이 당시 잉글랜드의 왕정이 절대왕정이었다, 글쎄 헨리8세를 놓고보면 절대왕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잉글랜드내전을 다룬 여러 연구들, 대표적으로 로렌스 스톤 이런 것을 보면 그렇게 간단치 않다. 그리고 올해 bloomsbury에서 출간된 책으로 G. W. Bernard의 Who Ruled Tudor England라는 책이 있다. 우리가 그동안 배워온 잉글랜드 르네상스 시기의 헨리 8세 그 다음에 프랑스의 프랑스아 1세,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 이 사람들이 어마어마한 권력을 누렸다 이런 식으로 얘기가 되어왔다. 그런데 지금 그것이 아니라는 연구가 계속 나오고 있다. 이 책의 소개를 보면 튜더 왕조의 잉글랜드가 어떻게 통치되었는가에 관한 다양한 측면들을 살펴보면서 그 정부에 가담했던 사람은 누구인가, 그들의 권력과 지배력의 범위는 어느 정도였는가를 살펴본다. 그리고 튜더 왕조의 중요한 정치적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어떤 식으로 형성되었는가를 살펴보면서 튜더 왕조의 권력의 역동성을 다시금 조명하고 그것에 대한 역사적 서술들을 다시 살펴본다. 여러 사람이 쓴 책인데 이 책의 출간일자가 2023년 3월 23일이다. 그러니까 이런 경우에도 엘리자베스 1세가 튜더 왕조의 마지막 왕이다. 그러면서 스튜어트 왕조로 들어서면서 국왕이 바뀌었다. 그러니까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튜더 왕조가 절대왕정을 구축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그것에 대해서 청교도가 대립되어 나온다. 그런데 만약에 절대왕정을 구축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절대왕정과 청교도의 대립이라는 명제 자체가 무산되어 버린다. 그래서 이것도 간단하게 단선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예전에는 헨리 8세의 절대왕정, 청교도, 잉글랜드내전 이런 식으로 나왔는데 그게 그렇지 않다. 그리고 셰익스피어 드라마 《리처드 2세》를 살펴보면 엘리자베스 1세가 보인 반응도 그렇고 에른스트 칸토로비츠의 왕의 두 신체The King's Two Bodies를 봐도 다른 연구들이 이미 나왔다. 그래서 이 부분은 정치적 상황에 대한 설명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 엘리자베스 1세가 스페인의 무적함대(아르마다)를 격파해 주권국가로서의 기초를 다졌다고 하는 것, 주권국가로서의 기초라는 것은 그 나라가 우리가 주권국가라고 선언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국제관계적으로 그것이 양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주권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 주권이라는 것은 국제관계적으로 승인되는 관계이다. 남한테 인정을 받을 때 주권국가라는 것은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한 국가의 주권을 다른 국가가 인정할 때 성립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가 무적함대를 격파해 주권국가로서의 기초를 다졌다는 것은 엘리자베스 1세에서 혼자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에서 업신여기면 그만인 것이다. 

제3장 83 네덜란드에서는 1581년에 북부 저지대의 7개주가 스페인의 지배로부터 독립해 공화국이 되었다. 물론 '17세기의 위기'(트레버로퍼)라는 말도 있듯이 이 세기 내내 내란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영국에서는 종교 문제에서 발단한 절대왕정과 청교도의 대립이 잉글랜드내전(청교도혁명, 1642~48)을 일으켜 국왕 찰스 1세의 처형에 의해 일시적으로 공화제가 수립되었다. 


그 다음에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1685년 낭트 칙령을 폐지해 신교도 탄압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영토 확장 정책을 펼쳐 국제 관계의 불안정 요인이 되었다." 이것은 팩트이다. 그 다음에 "독일의 종교개혁에서 발달한 30년전쟁(1618~48)의 암운이 유럽 전역에 감돌고 있었다." 이런 것도 굉장히, 30년전쟁이 1618년에 시작되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데 종교개혁에서 발달했다는 것은 아니다. 종교간 분쟁이 하나의 원인인 것은 아닌데 그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중요한 요인은 아니고 다른 것도 많이 있었다는 것이 30년전쟁에 대한 연구에서도 밝혀지고 있다. 그 다음 "30년전쟁의 종결에 의한 신성로마제국의 사실상의 해체는 근대 유럽 세계의 개막을 알렸다." 이게 과연 근대 유럽 세계의 개막을 알렸는가. 근대라는 개념이 여기 들어갔는데 신성로마제국의 해체는 맞다. 그런데 그것이 근대 유럽 세계의 개막을 알렸는지는 다른 문제이다. 계속 얘기하는 것이 역사적 사실과 그 역사적 사실이 어떤 정치적·사회적 의미가 있는지는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근대 유럽 세계의 개막을 알렸다는 것은 옛날 얘기이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독일 여러 영방 등에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이 출현해 스페인, 프랑스로 대표되는 가톨릭 국가와 맞서는 일대 정치 세력을 이루는 한편, 각각의 국가들도 종교가 아니라 순전히 정치적 원리에 의해 주권국가로서의 고유한 이익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 부분은 그냥 지나가면 된다. 주권국가라는 말이 남용되고 있고, “순전히 정치적 원리에 의해 주권국가로서의 고유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가 아직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은 나폴레옹 전쟁 때이다. 나폴레옹 전쟁이 1815년에 끝난다. 그러니까 지금은 1648년이니까 200년 정도 지나야 하는 것이다. 200년 정도 후가 되어야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아주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나폴레옹 전쟁 시기만 봐도 교황 피우스 7세를 종교화약을 하고 업신여긴다. 그런 바람에 가톨릭을 신봉하는 많은 신자들이 등을 돌리게 되고 나폴레옹 정권에 대한 불신을 채워올리는 요소가 된다. 이처럼 종교라는 것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아들 필요가 있다. 

제3장 83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1685년 낭트 칙령을 폐지해 신교도 탄압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영토 확장 정책을 펼쳐 국제 관계의 불안정 요인이 되었다. 

제3장 84 독일의 종교개혁에서 발달한 30년전쟁(1618~48)의 암운이 유럽 전역에 감돌고 있었다.

제3장 84 30년전쟁의 종결에 의한 신성로마제국의 사실상의 해체는 근대 유럽 세계의 개막을 알렸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독일 여러 영방 등에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이 출현해 스페인, 프랑스로 대표되는 가톨릭 국가와 맞서는 일대 정치 세력을 이루는 한편, 각각의 국가들도 종교가 아니라 순전히 정치적 원리에 의해 주권국가로서의 고유한 이익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 다음에 "유럽 각국이 여러 외국과의 합종연횡을 되풀이하며 '세력균형' 원칙에 따라 국익을 추구하는 근대 주권국가 체제가 출현한 "다고 되어있는데 근대 주권국가 체제라는 말이 엘리자베스 1세에서도 나왔고, 30년전쟁 종결 이후에 주권국가로서의 고유한 이익을 추구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나오고, '세력균형' 원칙에 따라 국익을 추구하는 근대 주권국가 체제가 출현했다고 말한다. 근대 주권국가 체제라고 하는 것을 여러 번 얘기하면서 1600년대 중반 즉 30년전쟁을 전후한 시기를 근대 주권국가 체제가 출현한 시기라고 하는데 이것은 팩트가 아니다. 일단 세력균형(the balance of power)라는 말 자체가 30년전쟁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제3장 84 유럽 각국이 여러 외국과의 합종연횡을 되풀이하며 '세력균형(the balance of power)' 원칙에 따라 국익을 추구하는 근대 주권국가 체제가 출현한 것이다. 


그러면 여기 84페이지의 문단까지의 설명을 다시 해보면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했다. 그 다음에 프랑스에서는 1598년에 낭트칙령로 종교적 자유를 인정했다. 그 다음에 1581에 네덜란드의 7개주가 독립하여 공화국이 되었다. 그런데 이 17세기는 트레버로퍼의 말을 빌면 17세기의 일반위기 General Crisis of the 17th Century라고 한다. 그러면 17세기의 일반위기라고 하는 종교적인·사회적인·국제관계론적인 위기를 포함해서 그러면 그 아래 무엇이 들어가는가. 첫째 158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 공화국, 그 다음에 1588년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잉글랜드가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함. 세번째 1598년 프랑스 앙리 4세가 낭트칙령을 선포했다. 거기까지이다. 그리고 나서, 여기까지가 16세기이다. 1500년대 말에 그런 일이 벌어진 다음에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한다. 그리고 지금 프랑스 루이 14세가 1685년에 낭트칙령을 폐지했다. 30년전쟁이 끝난 지 한참 다음이다. 지금 서술이 문제가 있는데 역사적인 순서대로 서술해야 한다. 나중에 일어난 일을 먼저 쓰고 이전에 일어난 것을 나중에 쓰면 안된다. 그러니까 17세기 일반 위기가 일어나서 16세기에 이러이러한 사건들이 있었다는 것을 얘기하고 그 다음에 17세기 주요한 사건이 30년전쟁, 그런 것들이 엉켜있다가 30년전쟁으로 돌출되어 나온 것이다. 그래서 1618-1648년 30년 전쟁이 있었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이 사실상 해체되었다. 일단 거기까지는 역사적 팩트이다. 그런 다음에 1685년에 프랑스 루이 14세가 낭트칙령 폐지한다. 그것은 일단 두어야 한다. 이 사건을 왜 두어야 하냐면 이 책에서 결정적으로 실수하고 있는 부분이 30년전쟁이 끝난 다음에 맺어진 조약이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다. 그러니까 이때부터 베스트팔렌 체제라고 하는 것이 유럽에서 성립한다. 베스트팔렌 체제에 대해서 설명을 해둘 필요가 있다. 베스트팔렌 체제 아래서 주권을 인정받는 나라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을 서술하지 않으면 이 서술에서 핵심적인 내용이 빠져나가 버리는 것이다. 1648년에 베스트팔렌 체제가 성립한다. 이게 약 50년 정도 유지된다. 베스트팔렌 체제는 1648-1700년까지이다. 이때 바로 유럽에서는 30년전쟁의 결과에 따라서 유럽의 서쪽은 프랑스가 헤게모니를 쥐게 되고 동쪽은 스웨덴이 헤게모니를 쥐게 된다.  

엊그제 수원 글로벌 평생학습관에서 《책 읽기의 끝과 시작》을 참조로 하라고 하면서 책읽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어떤 작품을 읽을 때 그 작품이 가지고 있는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그 작품을 잘 읽을 수 있다. 상식이다. 그 상식을 적용해보자. 예를 들어서 《햄릿》을 읽을 때 스토리는 다 안다. 햄릿은 덴마크 왕자이다. 잉글랜드 드라마 극작가의 작품 속에 왜 느닷없이 덴마크 왕자가 등장하는가. 지금은 북유럽의 조그만 나라에 불과한데 덴마크라는 나라가 왜 잉글랜드 사람들이 구경하는 드라마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가. 내용을 보면 덴마크 왕실의 궁중 암투 얘기이다. 덴마크라는 나라가 그 당시에는 어떤 나라였는가. 지금 우리는 스웨덴이라고 하면 그런데 《나폴레옹 세계사》를 읽어보면 스웨덴이 만만치 않은 북방의 강대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1648년에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지면서 유럽은 크게 두 나라의 헤게모니를 중심으로 재편된다. 그러니까 "유럽 각국이 여러 외국과의 합종연횡을 되풀이하며 '세력균형(the balance of power)' 원칙에 따라 국익을 추구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고 정확하게 설명하면 베스트팔렌 체제가 성립되었는데 프랑스와 스웨덴이라고 하는 헤게몬, 즉 헤게모니를 쥔 자들을 중심으로 유럽의 정세가 정리가 된다. 그게 바로 베스트팔렌 체제이다.   

그 다음에 프랑스 루이 14세가 낭트칙령을 폐지한 것이 1685년이다. 그런데 베스트팔렌 체제가 1700년까지이다. 즉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1685년 낭트 칙령을 폐지해 ··· 대외적으로는 영토 확장 정책을 펼쳐 국제 관계의 불안정 요인이 되었다."고 되어있는데 그것이 바로 베스트팔렌 체제를 와해시키는 어떤 요소가 되었겠다. 그런데 프랑스는 서쪽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국가였다. 그 헤게모니를 좀 더 강력하게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루이 14세가 자기의 야망을 펼쳐보이기 시작하는 시기가 바로 1685년부터이다. 그러니까 프랑스 루이 14세가 낭트칙령을 폐지하고 대외적으로 영토 확장 정책을 펼치면서 베스트팔렌 체제가 와해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에 개입하게 된다. "영토 확장 정책을 펼쳐 국제 관계의 불안정 요인"의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보면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에 개입해서,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이 14년 동안 계속된다. 1701-1714년까지. 베스트팔렌 체제가 깨져버린 것이다. 에스파냐는 서쪽 지역으로 프랑스가 자기의 헤게모니를 믿고 개입을 했는데 깨져버린다. 그리고 패권이 영국으로 가버린다. 베스트팔렌 체제는 프랑스와 스웨덴이라고 하는 헤게모니를 중심으로 구축된 체제인데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면서 영국으로 헤게모니가 넘어간다. 그 다음에 똑같은 시기에 대북방전쟁이 벌어진다. 1700-1721년으로 같은 시기인데 훨씬 길다. 거기서 동쪽의 헤게모니였던 스웨덴이 러시아에 패배한다. 그래서 베스트팔렌 체제가 와해되어 버린다. 18세기 들어서 베스트팔렌 체제가 깨져버리면서 헤게모니가 바뀌게 된다. 다시 말해서 서쪽의 프랑스 동쪽의 스웨덴이 서쪽의 영국 동쪽의 러시아로 바뀌게 된다. 독일은 한번도 헤게모니를 쥔 적이 없다.  

 

어쨌든 17세기 일반 위기라고 하는 것이 베스트팔렌 체제로서 일반 봉합이 되는 듯 했는데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과 대북방전쟁으로 인해서 베스트팔렌 체제가 깨져버린다. 그리고 17세기 일반 위기도 아주 난장판의 세계로 넘어가게 된다. 그래서 18세기 계몽주의 이런 얘기를 흔히 하는데 그것은 사상의 측면에서 그렇고 정치적인 측면, 레짐의 측면에서 보면 18세기는 완전히 난장판의 시대이다. 그게 이제 1789년 프랑스혁명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프랑스는 헤게모니를 쥐지 못한 상태에서 나라가 엉망이 되었고 그 상황에서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나폴레옹전쟁이 벌어지면서 1815년에 유럽 협조체제가 성립한다. 그러면 베스트팔렌 체제가 1700년이다. 그리고 1815년에 유럽 협조체제가 성립하니까 거기서 100년이다. 18세기 100년은 유럽 대륙은 전쟁 상태였고 그 상태가 나폴레옹 전쟁에서 절정에 이르렀다가 유럽 협조체제의 상황으로 들어간다. 그때서야 비로소 '세력균형'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물론 영국은 해양국가니까 직접적인 행위 당사자로는 빠져있고 해외 영토에 또는 해외 식민지, 국제교역에 관계가 있었고, 러시아가 아주 중요한 대륙에서의 행위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제 19세기 초반의 상황이다. 그러니까 베스트팔렌 체제의 성립 그 다음에 18세기의 100년 동안의 혼란기 그러고나서 나폴레옹 전쟁, 그 다음에 1815년 유럽 협조체제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가장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들과 국제관계론을 다 아우르는 적절한 설명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섣불리 여기에 주권국가, 종교개혁 이런 것들을 끼워 넣을 필요가 없다. 

 

그 다음에 84페이지를 보면 "이런 정치적 황종연횡의 배후에는 시장경제의 착실한 성장이 작용"하고 있었다. 시장경제라는 말은 전가의 보도처럼 마구잡이처럼 쓰이는 말인데 이런 말들은 그냥 지워도 되고, "유력한 대(大)상인에게 무역·상업상의 특권을 부여하는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하며 국부 증대를 꾀했다." 이런 얘기는 《옥스퍼도 세계사》에 나온 것처럼 해외로 진출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이게 대양 무역, 대서양이라든가 인도양을 건너는 대양무역이 중요했다. 시장경제라는 말은 아무데나 쓸 수 있는 말인데 아무데나 써버리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 된다. 그래서 이 문단 하나는 국제적인 무역거래가 활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국제적인 무역거래라고 하는 것은 유럽 대륙의 헤게모니 싸움과 무관한 것들은 아니었다. 찰스 킨들버거의 《경제 강대국 흥망사 1500-1990》이 이 부분을 가장 잘 다룬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여기 나와있는 설명이 틀린 것은 아닌데 시장경제의 착실한 성장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무역 또는 해외 무역 또는 대양무역들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기라고 얘기하면 된다. 그 다음에 섹션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정치와 종교를 주된 대립축으로 하는 유럽 국가들의 국제 관계는 정치와 경제라는 대립축의 등장으로 17세기 이후에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이것은 굉장히 단선적인 설명인데 정치와 종교를 주된 대립축으로 하다가 정치와 경제를 대립축으로 한다는 것은 그렇지 않고 그냥 아주 복잡한 정치, 경제, 종교의 복잡한 대립 구도들이 등장한다고 정리하는 것이 좋다.

제3장 84 이런 정치적 황종연횡의 배후에는 시장경제의 착실한 성장이 작용하고 있었으며, 주권자들은 부국강병을 기본 정책으로 삼아 경제적 권익을 국익의 중심에 두게 된다.

제3장 84 유력한 대(大)상인에게 무역·상업상의 특권을 부여하는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하며 국부 증대를 꾀했다.

제3장 85 정치와 종교를 주된 대립축으로 하는 유럽 국가들의 국제 관계는 정치와 경제라는 대립축의 등장으로 17세기 이후에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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