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21 제8강(2) 오뒷세이아

 

2023.05.20 문학 고전 강의 — 21 제8강(2) 오뒷세이아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8강(2) 
오뒷세우스의 고난은 헬라스 세계에서 공통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일종의 자연법적 명령, 세계관을 구성하는 요소 중의 하나가 아닐까?

skheria 섬에 도착한 오뒷세우스
“마치 오래 시달리며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 병상에 누워 있던 아버지의 생명이 아이들에게 반갑게도 / 되살아날 때처럼, 또 어떤 가증스러운 신이 공격했으나 / 다행하게도, 신들이 불행에서 아버지를 풀어줄 때처럼 / 그렇게 반갑게도 육지와 삼림이 오뒷세우스 앞에 나타났다. / 그는 두 발로 육지를 더디길 열망하며 헤엄쳐 갔다.”(김기영 번역본, 5.394-399)

 

문학 고전 강의 제8강 2번째 시간이다. 오뒷세우스가 집으로 가고 싶은 목적은 아주 간단하다. 《오뒷세이아》 제6권에 그 얘기가 나오는데 오늘은 5권을 얘기를 자세히 할 텐데 제6권에 나와있는 얘기를, 알키노오스와 그의 왕비, 그러니까 스케리아 섬에서 만난 알키노오스와 얘기를 하면서 하는 얘기, 스케리아 섬에 도착했는데 나우시카가 자기 아버지 알키노오스 왕에게 간청을 하라고 하기 전에 제6권에서 오뒷세우스가 얘기한다. "신들께서 그대가 마음 속으로 열망하는 것들을 모두 / 베풀어주시기를! 남편과 가정과 금실지락을 신들께서 / 그대에게 베풀어주시기를! 부부가 한마음 한 뜻이 되어 금실 좋게 / 살림을 살 때만큼 강력하고 고귀한 것은 없기 때문이오." 같은 마음homophrosyne에 대해서 말한다. 강력하고 고귀한 것, 그런데 "그러나 그것을 가장 많이 경험하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지요."은 천병희 교수의 번역인데 "그때 큰 명성은 오로지 자기 자신이 누리는 법입니다"라고 번역을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천병희 번역) 6.180-185 신들께서 그대가 마음 속으로 열망하는 것들을 모두 / 베풀어주시기를! 남편과 가정과 금실지락을 신들께서 / 그대에게 베풀어주시기를! 부부가 한마음 한 뜻이 되어 금실 좋게 / 살림을 살 때만큼 강력하고 고귀한 것은 없기 때문이오. / 그것은 적들에게는 슬픔이고 친구들에게는 기쁨이지요. / 그러나 그것을 가장 많이 경험하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지요. 
(김기영 번역) 6.180-185 당신에게, 당신이 진정 열망하는 것은 뭐든 모두 / 신들이 주시기를, 남편과 가정을 주시고, 완벽한 화목을 / 베풀어주시길. 남편과 아내가 한마음 한뜻으로 / 가정을 보살피고 돌볼 때보다도 더 강력하고 / 훌륭한 것은 없으니까요. 적에겐 심한 고통이, 친근자에겐 / 기쁨이 되니, 이는 그들 자신이 가장 통감하는 바랍니다. 


오늘은 제5권에서 오뒷세우스가 오귀기아 섬을 떠날 때, 텔레마코스도 이타케를 떠나서 떠돌아다니고 있는데 오뒷세우스는 이미 떠돌아다니는 일을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떠나야 한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섬을 떠나야 하니까 배를 만들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뗏목 만드는 얘기가 나온다. 자기가 앞으로 어떤 일을 겪을지 알 수 없지만 그냥 자기가 이제껏 고생했으니까 앞으로 무슨 일이 와도 끄떡없다는 태도로, 그런데 고생을 안하고 사는게 좋기는 하다. 그래서 이번에 읽어보니 뗏목 만드는 부분이 굉장히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이 부분을 보겠다. "키 큰 나무들이 자라는 곳을 보여주고 나서 / 여주인 요전 칼륍소가 집으로 가버렸으나 / 사내 영웅은 나무를 자르고 잘랐다. 작업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칼륍소는 집으로 갔고 거기서부터 그러니까 "작업이 빠르게 진행되었다."가 243행이고 거기서부터 261행까지 "지렛대로는 뗏목을 신성한 바다에 끌어내렸다."고 되어있는 부분까지 뗏목을 만들어서 바다에 끌어내리기는 장면까지 얘기가 길게 되어있다. 왜 이렇게 길게 서술했을까. 호메로스는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 차곡차곡 남김없이 쓰기는 하는데 이건 또 왜 이럴까. 일단 한번 읽어보면 "모두 스무 그루 나무를 베어 넘기고 청동으로 자르고 / 솜씨 좋게 깎아내고 자를 대서 똑바로 맞추었다. / 그동안 고귀한 여신 칼륍소가 나사송곳을 가져왔다. / 그래서 그는 모든 구멍을 뚫고 이음 부분은 서로 맞추고 / 밧줄과 나무못을 사용하고 망치질하여 뗏목을 만들었다. / 마치 목수 일 잘 아는 이가 널찍한 화물 배의 / 선체 둘레에 줄을 그어 표시하는 너비만큼 / 그렇게 널찍한 뗏목을 오뒷세우스가 만들었다. / 빈 갑판을 세우고 빽빽한 늑재를 잘 맞추며 / 계속 일했다. 마침내 기다란 뱃전 널빤지로 마무리했다. / 그 안에는 돛대를 세우고 그에 맞는 활대를 만들었다. / 게다가 키를 만들어 배를 인도하게 했다. / 엮은 버드나무 가지로는 뗏목을 둘러서 / 파도를 막게 했다. 바닥에는 덤불을 수북히 쌓았다. / 그동안 가장 고귀한 여신 칼륍소가 천을 가져와서  / 돛을 만들게 했다. / 사내는 솜씨 좋게 돛도 잘 만들었다. / 그 안에 돛 조절 밧줄과 권양기와 아딧줄을 모두 한대 묶고 / 지렛대로는 뗏목을 신성한 바다에 끌어내렸다." 이렇게 되어있다. 뗏목을 만드는데 그냥 봐도 참 공들여서 뗏목을 만든다. 이게 뭘까를 생각해봤는데 뗏목 만들기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adventus, 예상하지 못하는 adventure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 뭔가를 준비하는 그런 과정이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 책을 사고 3공노트를 사고 독서카드를 마련하고 또 어떻게 하면 독서카드를 좀더 잘 쓸 수 있을까를 궁리하고 이런 것들도 땟목 만들기라고 할 수 있겠다. 자아를 구축하기 위한, 어쨌든 모험은 어떻게 이루어지든 좀더 잘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들 그런 것들이 바로 스케리아 섬으로 가기 전에 오귀기아 섬에서 자신이 뭔가를 하고 있는 것이겠다. 그렇게 하고나서 오뒷세우스는 오퀴기아 섬을 떠난다. 그렇게 많은 것을 준비하고 해도 그렇게 쉽지 않겠다. 

(천병희 번역) 5.241-5.543 여신들 중에서도 고귀한 칼륍소는 / 키 큰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곳을 가리켜주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 오뒷세우스는 나무들을 베기 시작했고 작업은 신속히 진행되었다. 
(김기영 번역) 5.241-5.543 키 큰 나무들이 자라는 곳을 보여주고 나서 / 여주인 요전 칼륍소가 집으로 가버렸으나 / 사내 영웅은 나무를 자르고 잘랐다. 작업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천병희 번역) 5.244-5.261 그는 전부 스무 그루의 나무를 베어 넘어뜨려 청동으로 옆가지를 / 친 다음 그것들을 솜씨 좋게 깎아 먹줄을 치고 똑바르게 말랐다. / 그동안 여신들 중에서도 고귀한 칼륍소가 나사송곳을 가져오나 / 그는 나무마다 구멍을 뚫어 그것을 함께 이어 붙인 다음 . 나무못과 꺾쇠로 뗏목을 튼튼하게 만들었다. / 목수 일에 밝은 사람이 재게 될 / 널찍한 짐배의 뱃바닥 넓이만큼이나 / 넓은 뗏목을 오뒷세우스는 만들었다. / 그는 작업을 계속하여 촘촘한 늑재에 붙여 / 측벽을 세웠고, 마지막으로 늑재 위에 긴 널빤지를 댔다. / 그리고 나서 그는 그 안에 돛대를 세우고 거기에 맞는 활대를 / 만들었으며, 그 밖에도 방향을 잡기 위한 키도 만들었다. / 그리고 그는 너울을 막아주도록 사방에다 버들가지로 / 울을 댔고 바닥에는 나뭇잎을 수북이 쌓았다. / 그동안 여신들 중에서도 고귀한 칼륍소가 그에게 돛을 만들 천을 / 가져다주자 그는 돛도 능숙하게 만들었다.  그는 뗏목 안에  / 활대 줄들과, 돛을 올리고 내리는 줄들과, 돛 아래쪽을 매는 줄들을 / 달고 나서 이윽고 지렛대로 뗏목을 신성한 바닷물 위로 끌어내렸다. 
(김기영 번역) 5.244-5.261 모두 스무 그루 나무를 베어 넘기고 청동으로 자르고 / 솜씨 좋게 깎아내고 자를 대서 똑바로 맞추었다. / 그동안 고귀한 여신 칼륍소가 나사송곳을 가져왔다. / 그래서 그는 모든 구멍을 뚫고 이음 부분은 서로 맞추고 / 밧줄과 나무못을 사용하고 망치질하여 뗏목을 만들었다. / 마치 목수 일 잘 아는 이가 널찍한 화물 배의 / 선체 둘레에 줄을 그어 표시하는 너비만큼 / 그렇게 널찍한 뗏목을 오뒷세우스가 만들었다. / 빈 갑판을 세우고 빽빽한 늑재를 잘 맞추며 / 계속 일했다. 마침내 기다란 뱃전 널빤지로 마무리했다. / 그 안에는 돛대를 세우고 그에 맞는 활대를 만들었다. / 게다가 키를 만들어 배를 인도하게 했다. / 엮은 버드나무 가지로는 뗏목을 둘러서 / 파도를 막게 했다. 바닥에는 덤불을 수북히 쌓았다. / 그동안 가장 고귀한 여신 칼륍소가 천을 가져와서  / 돛을 만들게 했다. / 사내는 솜씨 좋게 돛도 잘 만들었다. / 그 안에 돛 조절 밧줄과 권양기와 아딧줄을 모두 한대 묶고 / 지렛대로는 뗏목을 신성한 바다에 끌어내렸다. 

 

그런데 5권의 이 부분들에서 뗏목을 아주 굉장히 준비하고 떠났는데도 불구하고 6권부터 스케리아 섬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고 있는데 5권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가까스로 파야케스족의 스케리아 섬 바닷가에 닿는다. 그래서 5권을 문학 고전 강의에서는 같은 마음에 관한 얘기한 책에 두고 말았다. 제6권 시작이 "많이 참는 고귀한 오뒷세우스가 그렇게 잠과 피곤에/ 제압되어 잠자고 있었다." 스케리아 섬에 도착했는데 스케리아 섬에 도착하는 과정,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의 마지막 부분이 382행부터 얘기가 나온다. 382~399행까지이다. 382행을 보면 "한편 제우스의 따님 아테네는 다른 걸 생각해냈다. / 여신이 나머지 바람의 길들을 한데 묶고는 /  모든 바람에게 멈추라고 명령하여 잠재우고 / 빠른 북풍을 일으켜 앞으로 달려드는 파도를 부수면 / 제우스 후손 오뒷세우스는 죽음과 사망을 피하고 나서 / 마침내 노를 사랑하는 파야케스족과 섞이게 될 것이다." 그래서 파야케스족이 살고 있는 곳으로 보내는데 그것이 394-399행까지 이 부분이 굉장히, "마치 오래 시달리며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 병상에 누워 있던 아버지의 생명이 아이들에게 반갑게도 / 되살아날 때처럼, 또 어떤 가증스러운 신이 공격했으나 / 다행하게도, 신들이 불행에서 아버지를 풀어줄 때처럼 / 그렇게 반갑게도 육지와 삼림이 오뒷세우스 앞에 나타났다. / 그는 두 발로 육지를 더디길 열망하며 헤엄쳐 갔다." 그리고 바다에 난파가 되고 "서둘러 양손으로 바위를 붙잡았는데" 파도가 계속 오뒷세우스를 뒤척뒤척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스케리아 섬에 도착했을 때의 장면이다. 그런데 오뒷세우스가 스케리아에 도착했다라고 했을 때 대개 이 서사시를 해설하는 해설들을 보면 점이지대라고 얘기한다. 그러니까 본격적인 모험에 들어가기 전에 스케리아 섬에 간다는 것이다. 그것을 점이지대라고 얘기한다. 죽음과 마주해서 새롭게 태어나게 된 오뒷세우스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도로까지 겪어야만 인생이, 인생을 한번 가져다대보면 우리가 이렇게까지 고생을 겪어야 하는가. 평탄한 삶을 살면 안되는 것인가. 평탄하게 사는 금수저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은수저와 동수저 중간쯤 되는,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수저라도 입에 물고 태어나서 고만고만하게 평탄하게 사는 삶은 안되는 것인가. 조금도 상처입지 않고 마음의 고통없이 사는 건 아예 불가능한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꼭 그런 점이지대를 겪어야만 할까. 지내놓고 보니까 그게 고통스러웠을 뿐이지 오늘의 나를 만드는데 전혀 도움이 된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것이다. 뭔가 겪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 혼자 힘으로 그 사태를 대면해서 이겨내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천병희 번역) 6.1-2 그리하여 참을성 많은 고귀한 오뒷세우스가 잠과 피로에 / 제안되어 그곳에 누워 자고 있는 동안
(김기영 번역) 6.1-2 많이 참는 고귀한 오뒷세우스가 그렇게 잠과 피곤에/ 제압되어 잠자고 있었다.

(천병희 번역) 5.382-387 그러나 제우스의 딸 아테네는 다른 것을 생각해내어 / 다른 바람들의 진로를 막으며 / 그들 모두가 그치고 자도록 명하고 / 세찬 북풍을 일으켜 그의 앞에서 너울을 부숴버리니, / 제우스의 후손 오뒷세우스가 죽음과 죽음의 운명을 피하여 / 노를 사랑하는 파이아케스족 사이에 섞이게 하려는 것이었다. 
(김기영 번역) 5.382-387 한편 제우스의 따님 아테네는 다른 걸 생각해냈다. / 여신이 나머지 바람의 길들을 한데 묶고는 /  모든 바람에게 멈추라고 명령하여 잠재우고 / 빠른 북풍을 일으켜 앞으로 달려드는 파도를 부수면 / 제우스 후손 오뒷세우스는 죽음과 사망을 피하고 나서 / 마침내 노를 사랑하는 파야케스족과 섞이게 될 것이다. 

(천병희 번역) 5.394-399 마치 자식들에게 아버지의 되살아는 생명이 반갑듯이 / ━어떤 신이 화가나서 아버지를 공격한 까닭에 아버지는 / 병석에 누워 오랫동안 심한 병고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 반갑게도 신들이 아버지를 불행에서 풀어주었던 것이다━ / 꼭 그처럼 오뒷세우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는 육지와 숲이 반가웠다. / 그는 두 발로 뭍을 밟기를 바라며 헤엄쳐 갔다. 
(김기영 번역) 5.394-399 마치 오래 시달리며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 병상에 누워 있던 아버지의 생명이 아이들에게 반갑게도 / 되살아날 때처럼, 또 어떤 가증스러운 신이 공격했으나 / 다행하게도, 신들이 불행에서 아버지를 풀어줄 때처럼 / 그렇게 반갑게도 육지와 삼림이 오뒷세우스 앞에 나타났다. / 그는 두 발로 육지를 더디길 열망하며 헤엄쳐 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근대세계가 되면서 각각의 개인이 가지고 있는 권리를 자각하게 되었다. 그 권리right라고 하는 것, 그러니까 자연권natural right이라고 하는 것은 근대인이 가지게 된 근대세계가 가지게 된 아주 중요한 업적이다. 각각의 개인이 가진 개인의 자연권individual natural right에서 가장 첫번째 나오게 되는 것이 자유liberty이다. freedom은 ~부터 벗어난다는 뜻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럴 때는 사용하지 않고, 그래서 liberalism이다. 자유주의가 liberalism이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무리 미성년자라고 할지라도 부모로서의 친권이 자기 자녀이 가지고 있는 개인의 권리를 침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liberty라고 하는 것, natural right로부터 도출되는 제일의 항목이 liberty인데 그 liberty라고 하는 것은 부모도 침해할 수 없는 것이다. 자연법natural law라고 하는 것은 원래 신의 법에서 나오는 것이고 신의 법이라고 하는 말을 근대사회에서는 사용하기 곤란하니까 자연법이라는 것이 원래 있던 상태가 있었다 라고 하는 자연상태라고 하는 가상의 상태를 설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법은 명령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자연법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사실은 liberty가 아니라 내가 알아서 자연법을 지킨다고 할 때 freedom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 자연법에서 벗어난다고 할 때는 free from이다. 자연법의 내용은 사실은 억압일 수 있고 어떤 특정한 인간 공동체가 오랫동안 지켜온 도덕적 명령일 수도 있다. 자연권과 자연법은 그렇게 구별할 수 있다. 자연법은 일종의 covenant이다. 인간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자연권만 가지고는 안된다. 그래도 존중되어야 하는 그 공동체가 공동으로 인정해야 하는 도덕적인 명령이 있다. 인간은 누구나 다 학대가 아닌 경험, 어떤 겪음을 통해서 성장한다고 하는 것이 자연법적인 명령이다. 지금 여기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오뒷세우스가 고난을 겪고 하는 것이 그냥 새디즘적인 발상에서 나온 얘기가 아니라 이 이야기 《오뒷세이아》, 《일라이사》와 같은 이야기들이 헬라스 공동체에서 널리 읽혔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삶은 이런 과정을 겪어서 이루어진다 라고 하는 일종의 공동체가 공통으로 받아들이는 삶에 관한 관점perspective이다. 즉 세계관이다. 이 세계관을 수용한 다음에 뭔가가 이것을 공통으로 가지는, 그런데 지금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자연권은 즉 liberty는 인간 개개인의 권리는 누구나 다 받아들이는 세계관이다. 굉장히 주요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무리 그렇다고 할지라도 누구나 다 공통적으로 준수해야 하는 의무적으로 준수해야 하는 세계관은 공통되어 있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다 경험을 통해서 고난이 있더라도 그것을 이겨내면서, 학대가 아니라 고난이라는 말과 학대라는 말은 구별해야 한다, 그런 고난이 있더라도 그것을 이겨내면서 스스로의 자아를 단단하게 만들어야 한다라는 세계관은 공통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까 세계관의 충돌인 것이고, 세계관이 무너져 있다는 것이다. 아동인권 조례도 굉장히 필요하고 교권도 굉장히 필요하다. 그런데 그 모든 얘기들이 권리의 측면에서 논의되고 있다. 그 이전에 세계관이라고 하는 것이 공통되어 있지 않다. 지금 현재 《오뒷세이아》에서 왜 오뒷세우스를 이렇게 괴롭히는가, 이것은 지금 헬라스 세계 사람들이 공통으로 받아들여야 할 하나의 자연법적인 명령 즉 세계관을 알려주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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