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22 제9강 오뒷세이아

 

2023.05.23 문학 고전 강의 — 22 제9강 오뒷세이아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9강 
“가장 우수한 발견은 ‘오이디푸스’에서의 그것과 같이 급전을 수반하는 발견” “이와 같은 발견은 급전과 결합될 때 애련이나 공포를 일으킬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시학⟫, 11장)

발견(anagnōrisis)을 통해서 급전(peripeteia)이 일어난다. 
‘변화’, 즉 “이행”(metabasis)이 중요한 까닭: 인간의 뇌는 안정되고 통제된 상태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 인간을 움직이려면 변화를 일으켜야만 한다. 이 변화는 인간의 행동에 의해 생겨난다. 행동을 통해 사람이 변화해야 관객이 관심을 갖게 된다.

 

오늘은 제9강 고난과 불안을 감내하는 오뒷세우스을 읽는다. 오뒷세우스의 모험이라고 하는 환상적인 여행 이야기를 담고 있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재미있는데 재미를 찾아서 읽는다고 할 때 굳이 《오뒷세이아》를 읽을 필요는 없겠다. 재미있는 책은 많이 있으니까.  어떤 책을 읽을 때 그 책을 읽는데 필요한 해설서, 《문학 고전 강의》도 일종의 고전 해설서이다, 그런 해설서가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까. 해설서를 들자면 밑도 끝도 없고 그냥 아예 처음부터 그 책을 읽자니 막연하기도 하고 갑갑하기도 하다. 어떤 책을 읽는데 필요한 가장 적절한 참고서가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가장 적절한 참고서는 자기자신이다. 오늘 오뒷세우스가 제9강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자기 서사이다.  

제9강 101 이제 오뒷세우스의 환상적인 여행 이야기를 담고 있는 제9권을 읽기로 합니다.

 

《모비딕》이나 《오뒷세이아》나 같은 계열에 있다. adventus, 앞 날을 알 수 없는 자기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을 알 수 없는 어떤 그런 불안과 고난이 예감되는데 그것 때문에 불안하다. 제9강 제목이 고난과 불안을 감내하는 오뒷세우스이다. 《모비딕》이나 《오뒷세이아》와 같은 서사시들은 그런 것들을 보여준다. 그런데 자기가 살아오면서 그런 정도까지는 아닌데 조금이라도 파토스가 없는 사람이라면 《모비딕》이나 《오뒷세이아》를 읽으면서 '저 사람들은 사서 고생하는거 아냐, 가만히 있으면 되지 않나' 이런 식의 냉소밖에 없겠다. 가장 좋은 참고서는 자기 삶이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 삶에서 어떤 고난이 없었으면 힘들고 고난이 있었다 해도 그 고난 때문에 심하게 사람이 다쳐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다쳐서 그것을 되돌아볼 시간 자체가 없는 되돌아봐야 자기 서사가 만들어 지는데, 되돌아볼 시간도 없고 또 정신의 힘도 남아있지 않아서 그것을 스스로의 서사로 만들어 내서 반성적 사유로서 해내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모비딕》을 읽든 《오뒷세이아》을 읽든 아무런 의미가 없겠다. 그런 점에서 '청소년 오뒷세우스' 같은 것은 결사반대이다. 그냥 지식으로서 《오뒷세이아》를 읽는 것과 지금 우리가 읽는 것은, 지식으로 읽는 것이 아니다. 자기 서사가 있어야 되겠다. 자기 서사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문학 고전 강의》의 부제가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이다.  바깥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자기 안으로 끌어당겨오면 그것이 자기 안으로 내재한다. 그리고 그것을 또 바깥으로 내놓을 때 내재하는 체험을 매개해주는 서사 그것이 문학이다. 어쨌든 자기가 자기 삶을 되돌아볼 때 어떻게 되돌아보는가. 그냥 서술하는가.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읽기가 힘든 것이 그런 점이다. 도대체 어디서 뭐가 중요한 것인지 고통이 계속 있다. 체험은 서술이 되어있는데, 카메라의 눈처럼 서술이 되어있기는 하다. 그러면 자기의 체험을 자기가 발견하는 것이 이를테면 자기 서사겠는데 자기가 인생을 지극히 평탄하게 평범하게 살았다고 할지라도 그 삶이 분명히 우여곡절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그것이 뭘가. 그 우여곡절이라고 불리는 것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 있다. 정말 엄청난 영웅 서사가 아니라고 해도 그런 것이 반드시 있다. 그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발견(anagnōrisis)이라고 한다. 드라마에서 그것을 발견했을 때 '그것은 정말 극적이야' 이런 말을 하거나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 때 그 영웅 서사시의 주인공들만이 드라마틱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도 다 드라마틱한 인생을 한다. 드라마틱하다는 것 극적이다라는 것은 발견을 통해서 급격하게 전환된 것이다, 그것을 바로 드라마틱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드라마틱이라는 말을 쓸 자리에 급격한 전환이라는 말을 쓰면 된다. 《시학》 제11장을 보면 "가장 우수한 발견은 ‘오이디푸스’에서의 그것과 같이 급전을 수반하는 발견"이라고 되어있다. 급전, 급격한 발견 그것이 바로 급격한 전환이 일어나는 발견이 가장 우수한 발견이고 이와 같은 발견은 급전과 결합될 때 애련이나 공포를 일으킬 것이다." 안타까움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는 말이다. 즉 드라마에서 변화, 이행 이런 것이 왜 중요한가. 인간의 뇌는 안정되고 통제된 상태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관객을 움직이려면 아주 급격한 변화를 일으켜야 하고 이러한 변화가 인간의 행동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고 행동을 통해서 사람이 변화해야 관객이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의 삶에서도, 아리스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한 것처럼, 급격한 전환이 일어났는가 그렇게 해서 그때는 두려움에 떨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바로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어떤 새로운 사태로 가는 길목이 아니었는가 하는 것들이 있지 않았는지 살펴보는 것 그것이 좋을 것 같다. 그래서 《모비딕》을 읽는 가장 좋은 참고서는 자기가 자기 인생을 돌이켜보고 급격한 전환이 일어났던 사태들이 무엇이 있었는가 과연 나는 그 사태들을 직면했을 때 무엇을 했던가 이런 것들을 한번 돌이켜보는 것이 그것이 그 어떤 책을 읽는 것보다도 좋은 참고가 아닐까 보충해서 얘기한다. 《관촌수필》을 쓴 소설가 이문구는 '마을로 간 한국전쟁'이 정말 실시간으로 눈 앞에서 펼쳐졌던 그런 동네에서 살았다. 고향이 바로 관촌이다. 그의 인생살이의 신조로 사람을 대할 때나 어떤 사태를 직면했을 때 가지게 되는 스스로 만든 격언 같은 것이 "나중에 어찌 될지 모른다"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게 정말 '마을로 간 한국전쟁'의 장면에서 가장 생생하게 가슴에 각인 되었을 것이다. 저도 여러 번 자기 서사를 떠들었는데 똑같은 사건 그리고 급격한 전환을 이루었던 사건은 대체로 있는데 그런 것들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되는, 어제 하나의 사건을 여러 번 생각했다. 그 사건을 두고 내가 왜 그렇게 했나 후회도 되기도 하지만 아니다 이 지점에서는 잘한 것 같아. 그러니까 어떤 사건을 돌이켜볼 때 전적으로 후회되거나 전적으로 스스로 감탄하게 되는 일은 드물다. 그 사건 자체에 대한 자신의 평가가 항상 후회와 감탄이 뒤섞이고 얽혀 있어서 결국에는 미묘한 반대물의 복합체가 되지 않나 생각해본다.  

 

지금 오뒷세우스가 이제 파이아케스족의 왕 알키노오스의 질문을 받아서 이야기하는 것이 일인칭 시점에서 이야기한다. 이게 바로 오뒷세우스의 자기 서사이다. 그래서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똑 떨어져서 원자적 개인atomic individual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항상 자신이 겪었던 상황 그리고 그 상황에 대한 자신의 관찰 결과, 이런 것 저런 것 온갖 것들이 복합적으로 합해져서 정체성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 정체성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아주 몫을 차지하는 것이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 자기 서사일 것이다.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야기로서 구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고 바로 그런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이야기가 문학이다. 문학이 무엇이냐는 것에 대해서 여러 번 물어보고 여러 번 대답을 만들어 볼 수 있겠는데 바로 그렇지 않겠는가 한다. 9권 16행을 보면 "먼저 내 이름을 말씀드리겠소이다." 그랬는데 나는 오뒷세우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라에르테스의 아들 오뒷세우스"라고 말한다. 라에르테스의 아들 오뒷세우스라는 말 누구의 아들이라고 말을 한다. 누구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자기가 정말 고립되어서 홀로 똑 떨어져 있는 그런 인간은 없다는 것을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자기 서사라고 하는 것은 일단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로 이루어질 것이고 그런데 과거의 나를 지금의 내가 본다고 할 때 내가 나를 보는 것인데 두 개의 나는 똑같을 수 없다. "이 미묘한 간격을 감지해낼 때에 우리는 비로소 자기 서사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기 싫으면 그냥 앞만 보고 가는 것이다.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앞만 보고 가다가 어딘가에 부딪쳐서 깨져버리는 것,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지나치게 연연해서도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앞만 보고 그냥 내달려서도 안된다. 자기 서사를 만드는 것이 참 어려운 것이다. 과거에 연연해서도 안된다고 하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세이렌이 부른 노래를 듣지 않는 오뒷세우스이다. 세이렌이 부른 노래는 정말 유혹적이다. "자! 이리 오세요. 칭찬이 자자한 오뒷세우스여. 아카이오이 족의 / 위대한 영광이여! / 이곳에 배우를 세우고 우리 두 자매의 목소리를 / 듣도록 하세요. 우리 입에서 나오는 감미롭게 울리는 목소리를 / 듣기 전에 검은 배를 타고 이 옆을 지나간 사람은 아직 아무도 / 없어요. 그 사람은 즐긴 다음에 더 유식해져서 돌아가지요. / 우리는 넓은 트로이야에서 아르고스 인들과 트로이아 인들이 / 신들의 뜻에 따라 겪었던 모든 고통을 다 알고 있으며 / 풍요한 대지 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인든 다 알고 있으니까요." 세이렌 자매가 오뒷세우스를 찬양한다. 찬란했던 과거들을 떠올리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이는 그가 자신의 빛나는 과거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지나간 일 따위는 딱 잊고 오뒷세우스는 불투명한 미래를 향해 전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과거에 휩쓸려서도 안되고 미래로 나아가기만 해서도 안되고 그 중간의 미묘한 지점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기 서사가 가지고 있는 힘이라고 하겠다. 어떤 책을 읽을 때 특히나 고난의 서사시라고 여겨질 수 있는 분야에 속하는 책을 읽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자기 서사를 한번 쯤은 만들어 보는 것 그것이 가장 좋은 참고 서적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제9강 101 이 이야기는 오뒷세우스가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부분입니다. 다시 말해서 일인칭 시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천병희 번역) 9.16-19 먼저 내 이름을 말씀드리겠소이다. 그대들도 내 이름을 알도록 / 그리고 내가 무자비한 날에서 벗어나 비록 멀리 떨어진 / 집에서 살더라도 여전히 그대들의 손님으로 남아 있도록 말이오, / 나는 라에르테스의 아들 오뒷세우스올시다! 
(김기영 번역) 9.16-19 지금 내 이름을 말하리다, 여러분이 알 수 있도록, / 나는 무자비한 날로부터 도망쳤으니 / 여러분의 손님일 것이오. 비록 먼 곳 집에 살더라도, / 나는 라에르테스의 아들 오뒷세우스요. 

제9강 103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와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타자는 아니라 하더라도 두 개의 '나'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이 미묘한 간격을 감지해낼 때에 우리는 비로소 자기 서사를 말할 수 있습니다. 

(천병희 번역) 12.184-191 자! 이리 오세요. 칭찬이 자자한 오뒷세우스여. 아카이오이 족의 / 위대한 영광이여! / 이곳에 배우를 세우고 우리 두 자매의 목소리를 / 듣도록 하세요. 우리 입에서 나오는 감미롭게 울리는 목소리를 / 듣기 전에 검은 배를 타고 이 옆을 지나간 사람은 아직 아무도 / 없어요. 그 사람은 즐긴 다음에 더 유식해져서 돌아가지요. / 우리는 넓은 트로이야에서 아르고스 인들과 트로이아 인들이 / 신들의 뜻에 따라 겪었던 모든 고통을 다 알고 있으며 / 풍요한 대지 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이든 다 알고 있으니까요. 
(김기영 번역) 12.184-191 자, 이리오세요. 명성 자자한 오뒷세우스. 아카이아인의 / 큰 영광이여, 배를 세우세요. 당신이 우리 목소릴 듣게요. / 아직 누구도 검은 배로 노 저어 이곳을 지나간 적 없어라. / 우리 입에서, 꿀처럼 달콤한 음새의 목소리를 듣기 전에는. / 이 노래를 들은 자는 한껏 즐기고 많은 지혜 갖고 귀향한다고요. / 아르고스인과 트로야인이 신들 뜻에 따라 드넓은 트로야에서 /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 모든 시련을 우리가 알고 있고 / 다산의 대지 위에 일어난 일은 뭐든 모두 알고 있지요. 

제9강 105 이는 그가 자신의 빛나는 과거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지나간 일 따위는 딱 잊고 오뒷세우스는 불투명한 미래를 향해 전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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