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왈저: 출애굽과 혁명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3. 6. 19.
출애굽과 혁명 - 마이클 왈저 지음, 이국운 옮김/대장간 |
서문
도입: 출애굽 역사
1장. 예속의 집 : 이집트의 노예들
2장. 원망하기 : 광야의 노예들
3장. 언약 : 자유의 백성들
4장. 약속의 땅
결론:출애굽 정치
도입: 출애굽 역사
27 나는 정치사에 나타났던 출애굽 이야기를 재진술하면서, 다양한 해석들의 조명 속에서 텍스트를 다시 읽으며, 이러한 흐름 속에서 출애굽 이야기의 의미를 발견하기를 원한다. 나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텍스트를 활용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이 텍스트가 허구라거나 단순한 창작이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출애굽기의 텍스트는, 하나님의 행위이기도 하지만, 해방이나 혁명과 같은 정치적 용어들 속에서도 잘 이해된다. 크로아토는 묻는다. "구원의 하나님을 '드러낸' 최초의 모범적인 해방사건이 정치적이고 사회적이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 왔는가?" 나는 출애굽기를 주의 깊게 혁명적 정치의 패러다임으로 상술하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는 느슨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출애굽기는 혁명의 이론이 아니며, 성서의 설명에는 이론을 구축하려는 의도가 거의 없다. 출애굽기는 하나의 이야기, 서구의 문화의식의 일부가 된 거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각기 다른 사건이지만 특정한 범위에 속하는 정치적 사건들은 출애굽기가 제공하는 이야기의 프레임 속에 위치해 왔으며 또 이해되어 왔다. 출애굽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들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원래의 텍스트로 돌아가서, 나는 출애굽기의 저자들이나 편집자들의 실질적 의도에 대하여 어떤 주장도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실증사학의 특수한 관점을 주장하지도 않을 것이다.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출애굽기가 묘사하는 사건들로부터 수세기가 지나 쓰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사건들보다 더 중요하며 논쟁에서 인용되고 민간전승에서 꾸며지며, 계속적으로 반복되고 성찰되면서 점점 더 중요해졌다.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저자들의 의도였을 것이다. 확실히 그들은 빈번하리만큼 자주 반복을 요구했다. 출애굽기는 공적 읽기와 다시 읽기, 그리고 유비적인 적용을 위해 고안된 종교적, 법적 텍스트에 속한다. 그와 같은 텍스트의 저자들은, 그들이 누구이든 간에, 자신들이 부여한 의미를 근접 통제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물론 저자는 하나님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명백하게 근접 통제권을 행사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우리는 주류적 유대교 해석의 한 줄기를 따라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그 모든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도록 만드셨다고 추정해야만 한다. 나는 그러한 의미들 중 오로지 하나만을 다룰 것이다. 그러나 혁명으로서의 출애굽이라는 이 의미는 지난 수 세기 동안 해석적 문헌들 속에서 일관된 자리를 차지해 왔다. 또한 이는 출애굽기와 민수기의 실제 단어들 속에 확실한 토대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와 같은 단어들을 나타나는 그대로 솔직하게 읽어 볼 생각이다. 텍스트에는 우리에게까지 전해 내려온 우연적 혼동과 불명료함이 존재한다. 하지만 최종적인 저자들과 편집자들의 문학적 기교에 의하여 어느 정도 일관된 내러티브가 뚜렷하게 만들어졌다. 권위주의 전통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내러티브 내에서 처음 만들어진 부분과 나중에 추가된 부분을 확인하려는 현대 비평가들의 노력은 내가 보기에 오랫동안 사람들이 읽고 다시 읽었으며 또 인용하고 꾸며왔던 출애굽 이야기에 대해 더 나은 이해를 확실하게 산출해내고 있지 못하다. 노스럽 프라이가 썼듯이 "〔이러한 노력〕은 시인이 왜 그리고 어떻게 성서를 읽을 수 있는지에 관하여 어떤 점에서도 실질적 조명을 제공하지 못한다." 정치이론가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앞으로 내가 참조할 주석과 인용의 전통에서도 텍스트는 여러 부분으로 쪼개졌다. 모든 문장과 모든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되었고, 독립적 해석을 확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들은 동시에 전체의 일부로서 이해되었다. 만약 전체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매우 자주 그러한 해석들 중 가장 깊은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는 예전 해석과 최근 해석을 구분해야 할 것이며, 신명기의 저자들과 예언자들에 의한 출애굽 이야기의 가장 오래된 해석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근접성의 원칙 같은 것이 인식될 필요도 있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가장 이른 시기의 예언자들까지도 처음 출애굽 이야기를 구술한 사람들의 상황이나 감각을 공유하지 못했으며, 출애굽 이야기를 처음 기록했던 사람들 또한 그러했다는 점을 즉각 덧붙일 필요가 있겠다. 그들은 오로지 텍스트가 묘사하는 경험만을 상상할 수 있었다. 사보나롤라나 크롬웰처럼 자신들이 처한 고유한 상황 속에서 이 텍스트를 읽었던 나중의 독자들을 가치 없게 여기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많은 다른 텍스트들을 읽을 수 있었음에도 이 텍스트를 택했으며, 그 속에서 자신들의 고유한 정치적 필요와 현실적합성과 미래에 대한 비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로지 그들의 독해가 이 성서 말씀을 더 지적이고 더 명료하게 이해하도록 만드는지를 물을 수 있을 뿐이다.
출애굽기는 종교적 언어로 표현된 구원 또는 해방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속적이며, 이 세상에 속한, 역사적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출애굽기가 실제적인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 속에는 여러 기적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 기적들은 그 자체로서 기적적인 것이 아니다. 만약 출애굽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기적이라면, 나는 어떤 해석도 옹호할 수 없을 것이다. 현대 산학지들은 신적 개입에 대한 성서의 강조를 '종교적 언어에 특이한 것이며, 이는 출애굽기가 역사적으로 일어난 방식을 의미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한다. 나는 이들을 모방하여 그 기적들을 "통하여" 그 너머에 있는 추정적인 인간 실상을 "통찰"할 필요를 느낀다. 텍스트가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단순히 "정치적 사건의 윤곽을 가진 해방과정이 하나님의 의지라는 관점에서━기독교인의 양심을 위해서는 참으로 그래야만 한다━매우 잘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적 개입이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구분하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나는 이것이 출애굽 이야기를 읽는 최상의 전략이라고 보지는 는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 마술처럼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출애굽기 19장의 "독수리 날개"에 얹혀 옮겨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곳에 가기 위해 고난과 애통과 투쟁으로 가득 찬 행군을 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해결과 신의 해결을 모두 초대하듯이 현실적으로 등장한다. 출애굽기에 관한 초기의 랍비 주석서에서 저명한 현자 유다 하-나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주가 강력한 손으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냈다.'고 기록되었듯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강력을 통해 이집트에서 탈출했다." 그러나 주석서는 다른 해석이 있다"고 이어간다. "'그리고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유월절 어린 양을] 급히 먹으라.'고 기록되었듯이, 이스라엘은 그들 자신의 각성에 의하여 이집트에서 탈출했다." 억지스런 측면이 있긴 하지만, 나는 그래도 두 번째 해석에 마음이 간다. 어떤 경우에도 이 두 해석은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전능한 손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남녀들은 허리에 띠를 띠고, 자신들의 시대에 군림한 파라오들에게 도전했으며, 광야로 행군해 들어갔다. 그리고 출애굽기를 읽음으로써 자신들이 행하는 바를 이해했다. 이제 나는 그들이 읽었고 서로에게 거듭 말해주었던 이야기를 이해해 보려고 시도할 것이다.
37 유대인의 역사에서 메시아주의는 늦게 등장한다. 내 생각에 그것은 출애굽기 사유의 방식에 의하여 도래한다. 9세기 철학자 사디아 가온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이집트에서 포로로 살아가던 시절 받았던 첫 번째 약속으로부터 마지막 구원의 약속을 판단한다." 유대적 사유에서 역사의 종말은 바벨론 포로기를 지난 시기까지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사디아가 보여주듯 종말에 대한 사색은 일관되게 이집트에서 벌어진 오래된 "포로생활"을 회고한다. 마지막구원은 원래적 구원의 확대판이다. 유대 식으로 말하면 그에 앞서 종종 새로운 출애굽이나, 제2의 모세, 만나의 재등장 등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제는 가나안이라는 익숙한 땅보다는 "새하늘과 새땅"을 묘사하기 위하여,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있다면 그렇게 더 큰 기쁨을 제공하기 위하여 신의 약속이 재해석된다. 기독교에서도 메시아 이야기를 출애굽기 유형에 맞추기 위한 노력이 행해졌다. 아기 예수는 영아학살로부터 구출되고, 그래서 예수는 종말의 날의 모세로, 헤롯 왕은 종말의 날의 파라오로 일컬어 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결정적인 숫자들이 다시 나타난다. 열 두 사도는 열 두 지파와 일치하고, 광야의 사십일은 사십 년과 일치한다. 그러나 출애굽기는 또한 고유한 정합성을 가진다. 어찌되었든 모세는 메시아가 아니다. 그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나오는 데 성공한 정치적 지도자지만, 약속의 땅에 그들을 데리고 들어가지는 못한다. 또 약속의 땅은 적어도 통상 이해되는 의미에서 메시아왕국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이 둘의 차이는 제4장의 주요한 테마 중 하나이다. 출애굽기는 메시아주의적, 천년왕국주의적 사고의 모델인 동시에 그 대안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구원"의 세속적 역사적 설명이고, 물질세계의 기적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세상 속의 더 좋은 곳으로 행군하도록 요구하는 설명이다. 그렇기에 올리버 크롬웰은 출애굽기야말로 세계사에서 영국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다루심에 유일하게 비견할 만한 사건이라고 말했던 바로 그 연설에서 예수 왕이 통치하는 제5왕정의 몽상적 정치를 결정적으로 분쇄했던 것이다. 크롬웰은 광야를 통과하는 행군이 바로 자신과 같은 지도자를 요구한다는 점을 이해했다.
그러한 행군은 역사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도자는 사람이며, 그것도 그 대신 말하기 위해 아론이, 대신 노래하기 위해 미리암이 필요한 한계를 가진 사람이다. 나중에 그 지도자는 이드로의 제안에 따라 "천부장과 백부상과 오십부장과 십부장들"을 임명한다. "이 일이 네게 너무 중함이라. 네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출18:18) 정치적 조력자가 필요 없는 메시아에게는 누구도 이와 유사한 말을 한 적이 없다. 출애굽기는 인간의 축척에 맞추어 구조화된 사건이며, 따리서 천년왕국주의 문학만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정치적 인문학에도 공명을 불러일으킨다. 그와 같은 공명에 가까이 가면, 우리는 출애굽기를 급진적 희망과 차안 추구의 이야기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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