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로슬라프 펠리칸: 성서, 역사와 만나다 ━ 민족의 경전에서 인류의 고전으로

 

성서, 역사와 만나다 - 10점
야로슬라프 펠리칸 지음, 김경민.양세규 옮김/비아

들어가는 말
서론: 단 하나의 성서, 온전한 성서, 순수한 성서?
1. 말씀하시는 하느님
2. 히브리어로 된 진리
3. 그리스어로 말하는 모세
4. 기록된 토라를 넘어서: 탈무드와 계속되는 계시
5. 이루어진 율법과 예언서
6. 두 번째 언약의 형성
7. 성서의 백성들
8. 원천으로
9. 오직 성서
10. 정경과 비평가들
11. 인류를 위한 소식
12. 성서 안에 있는 낯선 신세계
나가는 말

참고 문헌 및 추천 도서
부록
옮긴이의 말
색인

 


나가는 말

379 19~20 세기에 전례 없이 성서가 배포되고 유통됨으로써 타낙과 선약성서는 사실상 세계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세계 모든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양적 변화는 질적 변화를 수반하기 마련이며 이 모든 변화의 싹은 기원전 마지막 몇 세기 동안 타낙이 그리스어로 번역될 때 심겼다고 할 수 있다. 번역의 첫걸음을 내디딘 이래 "민족들"(이방인을 의미한다)은 성서를 믿지 않더라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읽었으며 오늘날까지 읽고 있다. 성서에 신앙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진리가 있다는 말이 진실이라면 비신앙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진리가 있다는 말도 진실이다. 때때로 비신앙인들은 신앙인들이 관습에 젖어 특정 내용에 집착하거나 특정 문제를 다루기 곤란해하는 모습을 들추어냈다. 외부자들이 던진 무례한 질문들 덕분에 오늘날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모두 성서를 과학 교과서나 역사 교과서로 이해하지 않는다. 성서를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도 감상할 수 있게 된 것과 성서 문헌들의 '장르'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새로운 보편 독자층, 성서에 관해 지적 관심만을 가진 이들과 교류한 덕분에 가능했다. 유대인과 그리스도교인은 모두 기존에 자신들이 고수하던 방식, 자신들만이 성서를 읽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보다 보편적인 독자층에게 성서 읽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성서의 주主 독자층, 특별한 독자층을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공동체 바깥에 있는 사람들로 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70인역부터 오늘날 가장 생소한 언어로 번역된 성서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류가 성서를 읽게 하려고 힘을 기울인 이들은 바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구성원이었다. 성서가 증언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려는 종교적인 열망은 성서가 밀하는 바를 이해하려는 역사적, 문학적, 문헌학적 욕구보다 언제나 더 중요했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유대교 회당과 그리스도교 교회, 곧 시나고가Synagoga와 에클레시아Ecclesia에서는 언제나 성서 본문 연구를 자신들의 특별한 과업으로 여겼다. 그렇기에 두 전통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표현을 빌리면) "가르치는 과업을 맡은 사람들"은 성서를 가르칠 때뿐 아니라 성서에 관해 배울 때 특별한 책임의식을 갖고 배움의 내용과 태도 모두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선학 연구 경향이 시시각각 바뀔 때, 신학 교수들이 (자기 생각을 따르는) 제자 양성에만 신경을 쓸 때, 현대 사회에 어떠한 식으로든 발언을 해야 한다는 신념에 지나치게 함몰될 때 사람들은 거룩한 본문에 대한 연구 과정이 각 신앙 전통에서 전문적인 주석가들을 양성하기 위해 존재했고 존재해야 한다는 근본적이면서도 항구적인 진실을 간과하곤 한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성서 본문에 대한 새로운 통찰, 당대 상황과의 관련성을 여는 새로운 돌파구는 언제나 "거룩한 말씀에서 뻗어 나오는 새로운 빛"’에서 나왔다. 공동체를 향해,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 말하는 이들이 원문에 기초하여 적절하게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은 성서 해석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아닐지라도 하나의 주요한 조건이다. 성서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이들은 고전 연구자들이 베르길리우스나 단테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 라틴어나 이탈리아어를 익혀야 하는 것만큼이나 성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익혀야 한다. 

'들어가는 말'에서 언급했던 헨델의 《메시아》에는 다음의 성서 구절도 등장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니, 또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축은 사람의 부활도 옵니다. (1고린 15:21)

여기서 바울로는 하느님이 아담을 통해,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맺은 일련의 언약testaments과 계약covenants을 말한다. 성서에는 이 계약 외에도 노아, 아브라함, 모세를 통해 인류와 맺은 계약을 말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이 계약들이 그리스도를 통한 계약과 일종의 변증법적 관계를 이루는 것(아담을 통한 죽음과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 아브라함을 통한 약속과 그리스도를 통한 성취, 모세를 통한 율법과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으로 보았다. 그러나 히브리 성서를 더 깊이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이러한 변증법이 전체 내용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인간 존재라는 명백한 사실에서 아담을 통한 '생명'을, 유대인이든 무슬림이든 우리 모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점에서 아브라함을 통한 '성취'를, 토라가 묘사한 혼돈에서 해방되었다는 점에서 모세를 통한 '복음'을 읽어내는 것 또한 가능하다. 한 분 하느님,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인 분은 당신께서 주관하시는 구원의 역사 가운데 맺으신 일련의 계약을 결코 파기하거나 번복하시지 않았다. 그렇기에 궁극적으로 우리는 성서에 나오는 다양한 약속에 담긴 가르침을 복합적으로 숙고해야 한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전통은 모두 '성서를 거룩한 경전으로 대하고 이를 해석하기 위해 헌신하나 동시에 구분되는 두 개의 신앙 공동체'이다. 두 종교 전통이 헌신적으로 성서를 주석하는 방법은 반드시 상반되지는 않으며 때로는 상보적이다. 이러한 독자성과 상보성은 오래된 통념을 근본적으로 흔들며 학자들에게 옛 주석 방법론 성서의 다중 의미를 분석하는 것을 현대적으로 복원하도록 촉구한다. 성서 구절은 반드시 하나의 의미만을 갖지 않는다. 성서 구절들을 놓고 "너희의 것"이냐 "우리의 것"이냐, 너희가 맞느냐 우리가 맞느냐를 따지는 덧없는 논쟁은 대개 성서의 다중 의미를 간과함으로써 일어났다. 지금까지 인용한 수많은 타낙 구절은 모두 다중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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