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게네스 알렌: 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3. 11. 20.
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 - 디오게네스 알렌 지음, 정재현 옮김/대한기독교서회 |
서론·그리스도교 신학의 기초: 이 세계는 창조되었다.
플라톤: 이 세계는 정신의 제작품이다.
플라톤: 이 세계는 인간의 본향이 아니다.
플라톤주의의 전통: 스토아학파, 플로티누스, 위 디오니시우스
아리스토텔레스: 그의 『범주론』과 신의 신비성
아리스토텔레스와 스콜라 신학의 태동
아퀴나스의 신학적 기획과 그 현대적 비판: 칼 바르트와 과정신학
근대 세계의 여명: 유명론, 인본주의, 과학혁명
근세초기 철학: 이성론, 경험론, 계몽주의
칸트: 인식의 한계들
헤겔과 낙관주의의 부활
현대 철학에서의 의미 추구: 실존철학, 현상학, 분석철학, 해석학
지은이가 권하는 책들
서론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초 :
이 세계는 창조되었다
17 그리스도교 신학의 주요한 두 원천은 성서와 헬라적인 문화, 특히 그리스의 철학이다. 세계의 시초에 관한 성서적 관점은 우리들에게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초로서의 역할은 오히려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성서적 창조관은 중요한 면에서 모든 고대철학자들의 관점들과는 다르다. 창조에 관한 창세기의 설화들은 세계가 하나의 시작을 가지고 있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그것은 시작이 있음으로 해서 영원하지 않다. 즉, 궁극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제조자인 하느님은 시작과 끝이 없으므로 궁극적인 존재이다.
이러한 성서적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에게는 우주의 시초란 없다. 우주는 항상 존재해 왔고 항상 존재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일 원인 또는 원동자(그는 이를 부동의 동자라고도 불렀다)는 우주 안에서 가장 탁월하고 높이 받들어진 존재이지만, 그것은 사실상 우주 안에 있으면서 우주의 한 부분일 뿐인 존재이다. 즉, 그 존재는 우리가 지구와 천체들에서 관측할 수 있는 운동들에서부터 추론된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의형적으로 단순한 창세기의 설화와 다른 두 근본적인 방식들을 살펴볼 수 있는데 그것은 존재론적인 것과 인식론적인 것이다.
18 이 같은 방식으로, 창세기에서 태초에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셨다고 할 때, 창세기의 저자가 비록 존재론의 숙달된 실행자는 아니지만 하느님과 우주 사이의 존재론적 구분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질서 지워진 세계)에는 하나의 시작이 있어서 영원하지 않으며 따라서 궁극적일 수 없다. 하느님은 우주와 구분되어서 시작이 없으며 영원하시다. 하느님은 우주의 창조자이시지만 우주에 속하지 않으시며, 우주도 하느님의 한 부분일 수 없다. 피조물은 그 존재성을 하느님에게 의존하고 있다. 즉, 우주의 존재론적 지위(그렇게 있는 바의 실재)는 하느님의 존재론적 지위와 구별된다. 이렇게 도출된 존재론적 구분들이 곧 창세기 (그리고 창세기의 해석에 준거해서 그 의미를 상정하고 있는 성서의 나머지 부분까지 포함해서)가 존재론적 작업을 수행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창세기의 창조론의 인식론적 근거가 존재론적 작업을 수행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들의 인식론적 근거와 다르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이러한 점을 명백히 파악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제기하는 모든 주장은 어떤 근거나 배경을 가지고 있다(그것이 비근거적인 것이 아닌 한에서 그러하며 우리는 비근거적인 주장들을 걷어 치우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어떤 주장의 근거는 우리가 보거나 들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주장을 제기하는 근거의 종류에 관해서 팀구하고 이 다른 종류의 근거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연구하는 철학분야를 인식론(epistemology; 그리스어 episteme에서 유래함) 또는 지식론이라고 한다.
창세기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각각의 주장의 근거들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지각하고 있는 세계의 질서를 설명하는 데에 관심을 두었다. 그 질서의 설명에 필요하지 않은 어떠한 것도 주장되거나 요청된 바 없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의 하나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도대체 이 세계가 없지 않고 왜 있는가 라는 질문이 결코 제기된 적이 없었다. 즉, 그는 세계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 존재성이 전혀 문제시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주요 관심은 세계 운행의 원리들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심은 우주 안에 있는 다양한 종류의 존재자들에 관한 탐구(즉, 존재론적 작업의 수행)로 이어졌으며, 이 탐구를 통해서 그는 가장 높이 받들어지는 지고의 존재로서의 첫 부동의 동자가 있다고 추론하게 되었다. 최초의 원인으로서의 부동의 동자가 있다는 주장의 근거들은 일련의 복잡한 구분들과 논의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종국적으로 모든 추론은 세계의 운행에 대한 설명을 위해 주장되어야 할 것만을 주장한다는 인식론적 원리에 의존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탐구에 동기를 부여한 것은 세계운행의 원리들이었으며 이에 관한 그의 주장들에 타당성을 부여한 것은 운행에 대한 성공적인 설명이었다. 그에게는 사제들에게 내린 신탁이나 신적 영감의 상태에서 씌어진 것으로 전해진 시들은 세계의 운행에 관한 적절한 설명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대조적으로, 창세기를 포함한 이스라엘의 성서에 의해 제기된 주장들은 자연의 운행 원리들을 규명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우주의 존재성을 설명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창조자에 대한 신앙이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서는 세계의 존재성과 질서를 설명할 목적으로 추구되지 않았다. 즉, 세계의 존재와 질서가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의 근거를 형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그들은 그들 종족의 창시자인 아브라함에게 우선 전달되었고 그 이후 이삭이나 야곱과 같은 족장들에게, 그리고 또한 예언자들에게 전달된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믿었기 때문에 하느님을 신앙했던 것이다. 신성에 대한 그들의 신앙은 자연의 질서와 근원에 대한 탐구의 결과라기보다는 하느님의 주도권에 대한 반응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는 최고의 지위를 점하긴 하지만 세계의 한 부분일 뿐이며 따라서 이스라엘인들의 우주 창조자와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지위를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부동의 동자가 그런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그의 주장의 근거들도 창조자의 존재에 대한 이스라엘인들의 주장의 근거들과는 인식론적 차원에서 다른 것이다.
지금까지 논한 바에 의하면 "도대체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테르툴리아누스의 퇴거적인 언명을 강력하게 정당화시킬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하지는 않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과 비교할 때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아무리 자연의 원리들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욕이 부족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교 신학은 본유적으로 헬라적이다. 여기에서 나는 그리스의 문화와 사고방식이 비그리스 민족들에게 퍼짐에 따라, 그리고 더욱이 알렉산더 대제와 로마의 정복에 의해 막강한 기동력을 행사했던 그리스의 광범위한 영향력을 지칭하기 위해서 '그리스적'이라는 한정적 용어 대신에 '헬라적'이라는 포괄적 어휘를 사용하고자 한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고대그리스에서 독특하게 나타났던 지적인 호기심 없이는 하나의 학문으로 성립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다분히 헬라적이라 하겠다.
23 물론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따라서 신학을 더욱 잘 연구하고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철학적인 개념과 관념들을 파악하는 것을 주요 관심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신학이라는 학문을 창설한 정신적인 배경과 구조에 대해서도 숙지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엄격한 학문으로서의 신학의 존재 자체를 구성하는 태도를 지닌 정신 구조는 또 하나의 엄연한 사실과의 관계에서 조절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이 태도가 아무리 완전한 이해를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신성의 존재론적 지위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해 있음을 그 정신은 인식해야만 한다.
이러한 한계 인식은 신학에서 논쟁을 일으킬 만한 주요한 의제를 제기하게 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연신학의 가능성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식론에 미친 하느님의 존재론적 지위의 영향 또는 파급 효과를 볼 수 있는데, 이를 다시 표현하자면 신학에서 다루어지는 존재의 종류가 우리가 파악하기를 원하는 대상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우리가 제기하는 주장들의 근거나 배경의 정체에 끼치는 파급 효과라 할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하느님에 대한 지식은 하느님의 주도권에 연유한 것임을 그들 스스로 명백히 주장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들은 그들에게 전달된 하느님의 자기계시에 근거해서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일으킨다. "하느님은 그러한 신적인 주도권의 개입 없이도 알려질 수 있었는가? 만일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자기계시를 하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이나 다른 어느 누구라도 신성의 존재를 인식했었겠는가?" 이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다시 표현해 본다면, "이 창조된 우주 자체와 그 질서, 그리고 바로 그 존재성에 관한 그 어떤 것 중에서라도 이 우주는 마땅히 창조자를 갖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것이 있는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4 종교철학자들은 전통적인 논증들의 타당성에 대한 판정("신은 존재한다"라는 결론이 전제들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된 것인가?)과 그 결론이 도출된 근거로서의 전제들의 전위성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왔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방대한 양의 연구서들이 펼쳐졌으며 그 핵심들만을 간략히 개괄하는 데에도 대학의 교과과정에서 반 학기 정도는 소요될 것이다. 개신교 신학자들 중 많은 수가 자연신학에 대해서 자주 반의를 표명해 왔다. 어떤 신존재 증명이 아무리 견고하더라도 그들은 그 존재가 논리적으로 입증된 '신'은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들에게서 그러한 신은 우주의 최고위충(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이거나 우주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자연신학이 거부되어야 하는지의 여부와 그에 대한 이유의 규명이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주요한 연구 영역으로 등장했다. 자연신학을 옹호하는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은 자연신학을 통한 신에 대한 지식과 계시를 통한 하느님에 대한 지식 사이에는 중요하고도 의미심장한 차이들이 있음을 동의하는 것 이상으로 주장하고자 한다. 신에 대한 지식의 이러한 두 방식들이 어떻게 연관되어야 하는가도 또한 신학에서의 주요한 연구과제 중의 하나이다.
26 신학생들과 성직자들에게 자주 일어나는 또 다른 혼동스러운 점을 여기에서 지적할 필요가 있다. 신존재에 대한 논리적 증명이나 또는 우주에서의 신의 궤적이라는 의미로서의 자연신학이 철학 전반과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개신교 신학생들과 성직자들은 칼 바르트가 자연신학을 거부했다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서 그들은 모든 철학이 신학적 연관성이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부해 버린 그들의 태도가 바르트에 의해 지지받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바르트는 자연신학을 거부하면서 철학을 통째로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바르트는 철학적으로 매우 숙련된 단계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초대교회 교부들처럼 그 자신도 그의 신학적 작업에서 재해석된 철학적 개념들을 상당히 많이 사용했다. 초대교부들과 함께 바르트는 신학적인 확신에 준거하여 재구성한 철학적 어휘와 관점들을 그들의 신학적 목적을 위해 빈번하게 사용했던 것이다.
28 본유적으로 영원하신 하느님과 그 밖에 다른 모든 개연적인 사물들 사이의 존재론적인 차이는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행위가 자유로운 창조였다는 이해에 의해서 더욱 충만하게 표현될 수 있다. 하느님은 우주를 창조할 필연성에 지배되지는 않으셨다. 즉, 그는 창조해야 할 어떠한 외부적 또는 내부적 압박감도 느끼지 않으셨다. 한편으로는 하느님은 만물의 원천이기 때문에 창조 이전에 하느님에게 창조할 것을 강제하는 어떠한 외부적 요소도 있었을 수 없다. 그러나 만일 하느님이 본유적으로 불안정 상태였다면 내부적인 강박성이 있어서 이로부터 창조를 강제하게 되고 그 결과로서 피조세계가 주어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며,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플로티누스가 이러한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또한 하느님이 완전성의 차원에서 결핍이나 부족이 있었다면 창조에로의 내적인 강압이 있어서 세계를 창조하게 되었고 이로써 신적이지 않은 것들로 인하여 그 스스로 더욱 풍성하게 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성서의 하느님은 자유롭게 행위하시며 따라서 본유적으로 안정상태이시며 충만하시고 완전하시다고 고백된다. 따라서 창조 행위는 전적으로 신의 관대함에 의한 행위인 것이다.
31 하느님이 인간들에게 관계하시는 두 가지 주요방식이 있다. 우선 하느님은 세계에 대해서는 창조자로서, 그리고 고대 이스라엘인들과 새로운 이스라엘인 그리스도교회에 대해서는 스스로 계시하는 자로서 관계를 맺으신다. 신적인 주도권과는 별도로, 세계의 존재성과 질서로부터 하느님에 관한 지식이 도출될 수 있는가의 여부에 관한 문제는 하느님이 우주에 대해 창조자로서 관계되어 있다는 주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자연신학에 대한 각 신학자들의 입장이 아무리 서로 다르더라도 하느님은 창조자이시고 우주의 존재와 질서는 그가 관대하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는 데에는 그들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신적 존재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은 없더라도 우리는 그의 창조행위로부터 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한 세계의 본성으로부터 신적 자비의 광대함에 대해 조금이나마 감지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정도의 선물로써는 하느님의 관대성의 영역을 다 드러낼 수는 없다.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와 관계하는 두번째 방식, 즉 이스라엘 민족을 불러 특별한 사명을 맡기시고 스스로 성육화하신 사건들을 통해서 인간에게 관계하시는 방식에서 이러한 점을 배우게 된다. 창조에서는 하느님은 이 물리적 우주에 그 본성을 부여하셨고 인간들에게는 그 종류에 합당한 생명을 부여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우리를 위해 육신을 입으신 사건을 동해서 우리는 하느님이 그와 함께 하는 삶을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하시려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존재 양식을 초월하는 신적인 삶을 누리도록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신적인 자비는 단순히 하느님이 우리에게 창조자로서 관계하신다는 고백에서 인식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위대한 것이다. 하느님을 구원자로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자로서 고백함으로써만 신적 자비의 더욱 위대한 깊이를 깨달을 수 있다.
34 신에 대한 인간의 지식의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한계들로 인하여 위협을 느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전적으로 암흑 속에서 헤매고 있음을 뜻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피조물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것들을 완전히 파악하지 않고서도 상당히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빛이 무엇인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능력 없이도 그 빛을 수단으로 해서 만물을 보고 그 속성들을 알 수 있다. 빛은 입자와 파동이라는 속성들을 동시에 갖고 있는데,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현대물리학의 정설이다. 따라서 우리는 빛의 정체를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빛의 그러한 역설적 속성들의 연관에 대해서 신뢰할 만한 지식이 주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은 원리적으로 피조물의 완전한 파악을 초월해 있는 신에 대해서도 유비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우리는 신이 제공해 주신 '빛'으로 신적 본성에 대한 완전한 파악 없이도 신에 대해서 신뢰할만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신의 본성에 대해서 신 스스로가 우리에게 제시해 주신 것에 대해 견고한 이해를 갖게 되면 신학을 창조와 계시 속에서 드러난 신의 신비에 대한 반성으로 인식하고 이를 수행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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