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아우어바흐: 단테 ━ 세속을 노래한 시인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4. 5. 13.
단테 - 에리히 아우어바흐 지음, 이종인 옮김/연암서가 |
옮긴이의 말 - 7
제1장 미메시스의 인간관 ------------------- 25
제2장 단테의 초기 시 --------------------- 70
제3장 『신곡』의 주제 ---------------------- 152
제4장 『신곡』의 구조: 물리적·윤리적·역사-정치적 체계 -209
제5장 『신곡』의 인물들이 재현되는 방식 -------- 270
제6장 리얼리티에 대한 단테의 비전: 그 존속과 변모 -342
인명·용어 풀이 - 352
주석 - 422
해설 | 미메시스와 피구라 리얼리즘 - 438
단테 연보 - 453
찾아보기 - 459
159 독자는 알레고리와 개인적 내용의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취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시인이 그자신의 인간적 체험을 가진 인간으로 등장함으로써 그 둘(알레고리와 개인적 내용) 사이에 연결 고리가 되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단테의 시적 호소력 덕분에 제3천의 무리들을 숭고하고 빛나는 영혼들의 집단으로 보면서도 그 집단의 각자가 어떤 철학적 개념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철학적 의미의 순수함은 훼손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단테가 그 현장에 있기 때문이다. 단테는 갈등으로 분열된 존재, 사랑에 의해 어떤 결단으로 밀려가는 존재, 운명이 아직 결정되는 않은 존재이다. 그런 존재가 이런 추상적 사변 속으로 밀려들어와, 그런 정신적 구도에 역사적 특징을 부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인물들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다. 설사 철학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불완전하더라도 그 역사적 인물은 자기-충족적이므로 우리는 그를 이해할 수 있다.
161 여기에 철학적 인간(단테)이 있다. 그는 성 토마스가 규정하고 논증한 그런 불완전성을 가진 보편적 인간이다. 그는 천부적 혹은 후천적 특성의 우발적 요소를 가진 존재로서 정신적 개념과 실체(천사)의 위계질서와 대면하게 된다. 자연히 그의 내부에서 자아-실현과 자아-완성이라는 강렬한 동경이 솟구친다. 그런 동경을 감각적 이미지들로 재현하는 것은 적절하다. 왜냐하면 그런 이미지들을 통해야만 개인의 드라마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미지들은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미지들은 내적 사건이 표명되는 언어이며 이미지의 의미는 그 사건과 일치한다. 이렇게 하여 칸초네는 조응(사건과 이미지 사이의 조응) 체계, 평행적 발전(사건과 이미지가평행하게 발전) 체계를구현하는데, 그 안에서 그 둘(조응들과 평행적 발전)은 하나로 통합된다.
161 단데의 이미지들은 그가 말하려는 것 이상으로 넘어가지 않으며, 또한 시인의 열정 때문에 표현이 과장되거나 부정확하게 되지도 않는다. 그의 의도와 천재성은 정확하게 일치된다. 가령 표현과 대상, 감각적 이미지와 합리적 의미, 한부분과 다른 부분, 작품 전체와 그 작품을 읽는 독자, 이런 것들 사이에서 일치가 이루어진다. 바로 이런 정신에 입각하여 단테는 그의 시행, 그의 연구, 그의 각운을 다룬다. 깊은 생각과 부드러운 느낌이 충만한 의미를 복잡한 시행 속에 자연스럽게 흘러들게 하는 기술, 이것이 단테 칸초네의 가장 높은 성취이다. 복잡한 운율 구조를 다루는 데 단테는 아르노의 사례와 스틸 누오보의 전통을 따르지만, 자연스러운 하모니나 주제와 시 형식 사이의 일치를 처리하는 데는 단연 독보적이며 선배 시인들을 능가한다.
193 단테의 미메시스는 더 이상 아리스토텔레스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또 그 어떤 고전 장르의 미메시스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단테 미메시스는 중세의 기독교 예술과 닮은 점이 많다. 『신곡』은 온 우주를 포함하는 위대하고 체계적인 창작이므로 훨씬 의식적이고 뚜렷하게 미메시스의 기술을 발휘한다. 하지만 단테에게 이런 사실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고 그래서 단테는 『신곡』의 스타일을 말하면서는 다소 불확실한 자세를 드러낸다. 고대의 단편적 지식에 바탕을 둔 학자적 견해("비극은 행복하게 시작하여 불행으로 끝나고 희극은 불행하게 시작하여 행복하게 끝난다.")에 입각하여, 단테는 자신의 작품에 코미디(comedy: 희극)라는 제목을 부여했다. 그는 『신곡』이 고상한 비극인 『아이네이스』와는 다르게 사소하고 저급한 스타일을 구사하고, 또 여자들도 이해하는 구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런 제목을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193 반면에 단테는 호라티우스가 희극 작가들에게 때때로 '비극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또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지적했다. 『신곡』의 여러 문장에서 단테는 자신이 고상한 스타일의 시를 창조하고 있다는 의식을 드러냈다. 그런 문장에서 단테는 자신의 시를 가리켜 "신성한 시" 혹은 간단히 "비전"이라고 했다.
194 『신곡』은 서사시라기보다 훨씬 비극에 가깝다. 왜냐하면 이 작품속의 묘사적 · 서사시적 요소들은 자율적이지 못하고 다른 목적에 봉사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측면에서도 같은 말을 해볼 수 있다. 단테에게나 또 그의 인물들에게나 『신곡』의 시간은 운명이 서서히 전개되는 서사시적 시간이 아니고 인간의 운명이 완성되는 최종적 시간이다.
266 단테는 연옥의 제7둘레에서 마지막 코스인 불에 의한 정화를 받으면서 영혼에 자유를 수여받는다.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에게 왕관(세속적 권위)과 주교관(정신적 권위)을 씌워 주면서 그를 모든 권위로부터 해방시킨다. 이제 완전한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해도 무방하게 된 단테는 지상낙원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인간은 순진무구한 상태에서 평화로운 기질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물질은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은 경유지일 뿐이다. 가장 완벽한 지상 생활도 인간 공동체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 준비 과정이기 때문이다. 궁극적 목적은 비시오 데이(하느님의 비전), 즉 하느님을 뵙고 영원한 축복을 얻는 것이다.
266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천상 질서는 다른 두 질서와 완벽하게 공명한다. 『신곡』 전편은, 물리적 관점이나 윤리적 관점에서 살펴보든 혹은 역사-정치적 관점에서 살펴보든, 인간과 그 영혼의 운명을 구축하여 우리 앞에 아주 구체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 이미지는 하느님과 천지 창조, 완벽한 필연 속에 찰 내포되고 정돈되어 있는 정신과 자연이다. 인간의 지상 역사에서 비좁은 틈새, 즉 인간이 지상에서 삶을 영위하는 시기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미결 상태로 남아 있지 않는다. 지상의 삶은 위대하고 드라마틱한 결정이 내려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관점의 방향을 완전히 돌려서 인간 생활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이승의 삶은 그 다양한 현현에도 불구하고 그 궁극적 목표에 의해 측정된다. 그렇다면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가? 지상에서 인간은 자기의 개성을 발휘하여 실제로 성취하고, 모든 사회는 보편적 질서 속에서 미리 정해진 최종 휴식처를 발견하는 것이다.
268 하느님의 은총은 무한하지만 그 분의 정의 또한 무한하고 이 둘(은총과 정의)은 서로 배척하지 않는다. 『신곡』을 읽는 사람 혹은 듣는 사람은 이 저승여행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성취된 운명의 위대한 영역 속에서, 그(읽는 사람 혹은 듣는 사람)는그 자신만이 아직 성취하지 못한 것을 발견한다. 그는 위에서 내려오는 빛을 받지만 그래도 어두운 상태에서, 현실적이며 결정적인 단계에 들어서서 각종 행동을 취한다. 그는 위험 속에 있고 결정은 가까이 다가와 있다. 그는 자기 앞에서 펼쳐지는 단테의 저승 여행 이미지들 속에서 단죄 받거나(지옥), 속죄하거나(연옥), 아니면 구제된(천국) 자기 자신을 본다. 그렇지만 그의 개성은 사라지지 않고 그는 언제나 그 자신이고 자신의 본질을 유지한다. 언제까지나.
268 이렇게볼 때 『신곡』은 세속을 재현한 인간 드라마이다. 완벽한 폭과 깊이를 자랑하는 인간 세상이, 저승의 구조 속에서 잘 갈무리되어 완벽한구조를 갖춘 채 거기 우뚝 서 있다. 인간세상(속세)이 온전하고 거짓 없고 영원한 질서 속에 구현되어 있다.
269 때로는 『신곡』의 시행 한줄을 이해하기 위하여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그러나 일단 독자가 빛나는 테르자 리마 속에 집필된 100편의 칸토(곡)를 전반적으로 살펴본다면, 이 칸토들의 맺고 푸는 노래 가락들은 꿈과 같은 경쾌함과 아득함을 독자들에게 제공할 것이다. 그 통렬한 시적 온전함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함과 아득함은 마치 별유천지에 사는 인간들의 춤처럼 우리의 머리 위에서 너울너울 춤추며 흘러간다. 그러나 그 꿈을 만들어내는 법칙이 있다. 그것은 일정한 계획에 따라 행동하고 자신의 운명을 의식하는 인간의 이성이다. 이성은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고 조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성의 용감한 선의는 결국 하느님의 은총으로부터 힘을 얻기 때문이다.
349 단테에 이르러 역사적 개인은 신체와 정신이 온전하게 통합된 존재로 재탄생했다. 그는 오래된 사람인가 하면 새로운 사람이다. 그는 전보다 훨씬 큰 힘과 폭을 가지고서 오랜 망각으로부터 솟아났다. 이런 새로운 인간관을 탄생시킨 기독교 종말론은 그 통합성과 활기를 잃어버리게 되지만, 인간의 운명이라는 사상은 유럽인의 정신에 깊숙이 침투하여, 아주 비非 기독교적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기독교적 힘과 긴장이 보존될 정도였다. 바로 이것이 단테가 후대에 안겨준 선물이다.
350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에 이르러 역사적 세계는 완전히 지상에 내재된 자율성을 획득했고 이러한 지상 생활의 자기 충족성은 도도한 강물처럼 유럽의 나머지 지역으로 퍼져나가 열매를 맺었다. 이것은 겉보기에는 그 종말론적 근원으로부터 완전 절연된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그의 역사적 운명과 맺고 있는 긴밀한 유대관계를 통하여, 그런 근원에 은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문학과 예술이 오로지 실제 생활과 역사에서 나온 주제들만 다룬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런 주장은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신화적 · 종교적 주제들이 계속 다루어지면서 전보다 더 예리하게 통찰되고 있다. 이런 주제들이 우리가 묘사한 역사적 비전 속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신화와 전설은 그 상징적인 경직성을 잃어버렸고, 교리적 · 정신적 상징들 밑에 감추어져 있던 풍성한 소재들로부터 이제 작가는 성격이 곧 운명이라는 독특한 통찰을 통하여, 풍부한 증거와 본질적 진실을 제공하는 다양한 관점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351 이러한 흐름은 미메시스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는가 하면 중대한 위험을 제기한다. 그것을 논의하는 것은 이 연구서의 목적이 아니다. 나는 이 책에서 하나의 통합된 단위로서의 단테 저작을 보여주려 했고, 또 그것이 주제의 통합성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이러한 접근이 "말씀과 사실이 부합하는" 방식으로 단테의 역사적 리얼리티를 재현한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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