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P. 샌더스: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 (간추린판)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 (간추린판) - 10점
E. P. 샌더스 지음, 박규태 옮김, 김선용 간추림/비아토르

간추린이의 말 - 김선용
40주년 기념판 머리말
40주년 기념판 서문 - 마크 챈시
1977년 저자 머리말
약어표

들어가는 글 
1부 팔레스타인 유대교
I장 탄나임 문헌
II장 사해사본
III장 외경과 위경
IV장 팔레스타인 유대교 (기원전 200년-기원후 200년)
결론

2부 바울
V장 바울

결론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
바울, 헬레니즘 그리고 헬레니즘 시대 유대교
간추린판 부록 1: 유대교와 기독교를 비교함: 내가 걸어온 학자의 길
간추린판 부록 2: 다시 살펴본 언약적 율법주의
An Annotated Bibliography for further study
참고문헌과 색인에 대한 안내
발행인의 말

 


503 나는 그 책에서 기원전 200년경에서 기원후 200년에 이르는 시기에 나온 팔레스타인 유대교의 주요 문헌은 (에스라4서를 제외하면) 모두 어떤 종교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와 관련하여 공통된 이해를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것을 "종교 패턴"이라 불렀으며, "안으로 들어감과 그 안에 머묾"을 어떻게 이해했는가가 바로 종교 패턴의 의미라 정의했다. 이 종교 패턴의 기초는 이스라엘 선택이었다. 이는 유대인이라는 백성〔민족〕이 어떻게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는가를 설명해주었다. 유대인은 그렇게 〔선택받아 안에 들어와 있는 이로〕 태어났다. 외부인은 회심하면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고, 내부인은 그들을 택하신 하나님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안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근본은 선택이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선택받은 이에게 율법을 수여함이다. 선택받은 이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그들이 언약 속에서 누리는 지위를 유지했다. 두 근본 요소는 출애굽과 시내산에서 이루어진 율법 수여가 완벽하고 생생하게 보여주며, 이 두 요소에서 나온 다른 요들은 각기 그 자리를 찾아 자리를 잡았다. 이제 내가 위에서 말한 종교 패턴의 두 주요 구성 부분을 고려하여 "언약적 율법주의"라 부른 것을 구성하는 여덟 개 항목을 인용해보겠다.  

에스라4서가 가진 독특함은 여기서 살펴본 문헌에 나오는 유대교가 "언약적 율법주의"라 부르는 것이 가장 적절한 종교 유형을 얼마만큼이나 공통으로 갖고 있었는지 밝혀내는 데 도움을 준다. 언약적 율법주의의 "패턴"과 "구조"는 이렇다: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2) 율법을 주셨다. 이 율법은 (3) 하나님이 그 선택을 유지하시겠다는 약속과 (4) 그 율법에 순종해야 한다는 요구를 함께 암시한다. (5) 하나님은 순종에 보상하시고, 범과를 벌하신다. (6) 율법은 속죄 수단을 제공한다. 속죄는 (7) 언약 관계가 유지되거나 재수립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8) 순종과 속죄,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 언약 속에 남아 있게 되는 이는 모두 장차 구원받은 그룹에 속한다. 첫 번째 요점과 마지막 요점에서 중요시해야 할 해석은 선택과 궁극(최종)의 구원을 인간이 그 공로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주어 지는 것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507 바울과 유대교를 대조했을 때 둘의 다른 점은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바울과 유대교는 "안에 머무르려면" 어떤 형태의 행실이 필요하다는 데는 의견을 같이 하나, 그 행실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할 때는 일부 의견을 달리 한다. 바울은 할례와 안식일 준수를 필수라 여기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이들에게 그가 이웃 사랑으로 정의한(가령 롬 13:9) "율법"을 강조했다.  

507 유대교가 "율법주의"라는 견해는 모든 유대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들 자신의 공로로 자신을 구원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 논지의 근본은 유대인이 아주 절박한 곤경에 처해 있었다는 주장이었다. 유대인이 그런 곤경에 빠진 것은 자신들이 선택받은 자라는 지위를 잃어버렸다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베버의 견해에 따르면, 유대인은 대개 황금 송아지 사건으로 말미암아 선택이 취소되었으며 그 바람에 자신들이 결국 버림을 받아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했다.  

509 유대인이 언약을 믿었다면, "율법주의"라는 비판은 공허하다一그런 믿음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행 은혜〔선재은총〕 개념과 얼추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 관계를 주도하시며, 인간은 감사함으로 자신의 뜻을 하나님 뜻에 일치시킨다. 루돌프 불트만의 용어를 빌리자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하나님의 요구보다 앞선다. 유대교는 이를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신 다움에 그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형태로 이야기한다. 따라서 고대 유대인은 성경의 전통적 선택 교리를 받아들였으므로 율법주의자가 아니었든지, 아니면 선택이 취소되었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기에 결국 모든 이가 극단적 개인주의자가 되어 이전에 그들이 집단으로서 가졌던 이점도 다 잃어버리고 이제는 각자 율법을 어기기보다 율법에 순종하는 일을 많이 함으로써 자신의 구원을 강구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든지, 둘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이 베버의 인식이었다. 이는 합리적 대안이지만, 베버는 그릇된 답을 골랐다. 선택과 언약 개념을 내버리는 이런 극적 변화를 인정하거나 거부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 가운데서 이런 논의가 없었다는 것은 그들이 물려받은 확신을 지키며 언약을 계속 확신했음을 일러준다.  

530 속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기본 약정인 언약, 말하자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이 된다는 약정, 이스라엘은 번영할 것이요, 심지어 그들이 곤고한 시절에 빠지더라도 하나님은 이 민족의 연속성을 확실히 보장해주실 것이라는 약정의 일부다. 이스라엘 사람은 율법에 순종해야 한다. 율법에 순종하지 않았을 때는 속죄해야 한다. 그리고 1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모든 범과를 씻는다. 랍비들은 나중에 대속죄일에 더하여 참회를 말하곤 했다. 따라서 속죄를 논의할 때는 엄격한 율법주의를 가정하고 논의를 시작해서는 안 된다. 엄격한 율법주의는 학자들의 결정이지, 고대 유대인들이 내린 결정이 아니다. 

531 참회와 속죄가 유대교에서 하는 역할은 기독교에서 하는 역할과 같다. 두 종교에서 참회와 속죄는 완전한 치유책이다. 인간은 이 둘을 통해 용서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용서를 베풀어주신다는 보장이 이 둘 안에 들어있다. 몇몇 형태의 기독교는(신자라면 세례를 받게 되어 있다고 보는 기독교 형태들은) 참회가 원죄로 고통받는, 버림받은 사람을 구해준다고 본다. 그러나 이와 다른 형태의 기독교, 그리고 특히 랍비 유대교를 포함하여 유대교의 대다수 형태는 속죄가 속죄하는 이를 그가 하나님과 가졌던 좋은 관계로 회복시켜주며, 이 좋은 관계는 하나님의 행동(그 행동이 아브라함 선택과 출애굽이든 아니면 그리스도의 죽음이든)에 달려 있다고 본다. 

540 바울은 나아가 이렇게 써놓았다. "우리 모든 이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아가, 각사람이 선이든 악이든 그 몸으로 행한 것을 그대로 되돌려 받게 하려 함이다"(고후 5:10). "우리 모든 이"라는 말은 십중팔구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킬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사람이 죽어도 남는 죄(아마도 죽은 뒤에야 제대로 벌을 받는 죄를 가리키는 것 같다)는 그리스도께 제시될 것이며, 그리스도는 이 죄를 정의를 따라 처리하실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만일 이 본문이 염두에 둔 이들이 정녕 그리스도인이라면, 보상과 벌이 구원으로 이어지는 체계 안에서 작동한다는 것이 더더욱 분명해진다. 즉 보상은 구원이 아니요, 벌은 영벌〔저주〕이 아닌 셈이다. 벌은, 고린도전서 5:3-5과 11:29-32이 말하는 것처럼, 구원에 이르는 머리말인 셈이다.  

542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이요 올바른 행위에 보상하시고 잘못한 행위는 벌하시는 분이라는 생각과 벌은 효과가 있으며 죄를 속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은 은혜로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생각은 상반된 생각이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 아니다. 하나님이 행위를 합당하게 벌하시고 보상하신다는 말의 반대말은 하나님은 변덕스러운 분이요 보상과 벌을 시행하실 때도 개인이 한 행동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으시다는 말이다. 유대인은 물론이요 그리스도인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545 나는 일부 프로테스탄트 신지들이, 어떤 면에서 보면, 올바른 행위가 신앙생활에서 행하는 역할에 지나칠 정도로 예민해져, "행위"와 "구원"을 아주 밀접하게 결합하여 사용하는 것이 마치 로마가톨릭이나 다른 이단으로 돌아가자는 암시라도 되는 것처럼 두려움을 조장했다고 본다. 헤이키 레이세넨은 그런 지나친 예민함을 보며 이런 유머를 던진다. "율법을 지키려는 열심이 율법을 어김보다 위험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549 바울은 사람이 유대교 율법을 지킴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음을 아주 명확히 말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의롭다 하심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는 유대인이라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유대교의 견해를 공격한 말도 아니요,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보편적 견해를 공격한 말도 아니었다. 도리어 바울의 그 말은 율법의 행위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가 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천명한 것이었다. 

552 마지막으로 율법주의에 관하여 한마디 해둔다. 역사를 살펴보면, 철저히 자신들의 노력으로 자신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구원이 가능하려면, 고립된 개인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즉 한 민족 단위 그룹이 아니라, 집단에서 아무런 혜택도 얻지 못하고, 어떤 형태의 구원사와도 연결점이 없으며, 오로지 그들 각자 각자가 심판을 행하시고 용서를 모르시는 하나님과 대면해야 하는 개인들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이런 공동체는 논박이 지어낸 허구다. 설령 그런 공동체가 있었다 해도, 1세기 유대인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1세기 유대인에 관하여 알고 있는 주요 사실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그들의 하나님과 그들의 동포에게 굳건히 성실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끼리 서로 동일하게 여겼고, 그들에게 독특한 율법과 관습을 주신 하나님과 그들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들은 모두 그들이 성실을 다하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이 택하신 그룹의 지체들임을 알았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고립된 개인으로 여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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