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J. 그렌츠,로저 E. 올슨: 20세기 신학
- 책 밑줄긋기/책 2023-24
- 2024. 7. 2.
20세기 신학 - 신재구/IVP |
역자 서문
머리말
서론
제1장 계몽주의:고전주의적 균형의 파괴
제2장 초월성의 재건:19세기 신학에서의 내재성
제3장 내재성에 대한 반란:신정통주의의 초월성
제4장 내재성의 심화:자유주의적 전통의 재편
제5장 세속 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급진주의 운동
제6장 미래의 초월성:희망의 신학
제7장 억압의 경험 속에 내재하시는 하나님:해방신학의 여러 유형들
제8장 인간 정신의 초월성:새로운 가톨릭 신학
제9장 이야기 내에서의 초월성:설화 신학
제10장 내재성과 초월성의 균형을 향하여:복음주의 신학의 성숙
결론 초월성과 내재성의 신학에 대한 전망
주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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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2 기독교 신학은 항상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성경의 이중적 진리를 균형 있게 표현하기를 추구해 왔다.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 대하여 초월자로서 관계를 맺으신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이 세상과 분리되어 스스로 자족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우주 위에 계시며 우주 저 너머로부터 이 세상에 오신다. 히브리 성경이 그렇게 힘있게 선언하듯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고 전도자는 쓰고 있다(전 5:2). 선견자는 여호와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다’고 보고한다(사 6:1).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서 보면, 하나님은 이 세상에 대하여 내재자로서 관계를 맺으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피조 세계에 존재해 계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 안에 활동적으로 존재하시며, 세계와 인간사 양자의 운영 과정에 관여하신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을 향해 아레오바고에서 행한 그의 유명한 설교에서 이 사실을 강조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행 17:27-28). 이와 관계된 주제로 피조 세계를 붙드시는 이인 하나님의 영에 대한 언급 또한 구약 성경에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지혜 문학에 많다. 또한 예수님도 햇빛이라든지 비, 또는 새들이 먹고 살며 꽃들이 아름답게 자라나는 등의 자연 현상에 대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하신 일이라고 말했다(마 5:45; 6 :25-30; 10:29-30).
성경이 하나님을 이 세상 너머에 계신 초월자이며 동시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내재자로서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각 시대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를 묘사할 때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이중적 진리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두 가지 모두를 인정하는 창조적 긴장과 균형의 방법을 찾아야 하는 도전에 직면했던 것이다. 두 가지 진리 모두를 균형 있게 수용해야 신학과 이성 혹은 문화의 관계가 적절히 수립된다. 이 둘 사이의 균형이 상실되면 곧 심각한 신학적 문제들이 고개를 들게 된다. 즉, 초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문화적 상황과의 관련성을 잃게 되고, 반면 내재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어떤 특정의 문화에만 얽매이는 신학이 되고 말 것이다.
19세기의 신학으로부터 흘러나온 20 세기의 신학은 하나님이 피조세계와 맺으시는 관계의 두 양상을 균형 있게 보려는 시도로서 흥미있는 사례 연구의 대상이 될 만하다. 사실 초월성과 내재성의 균형을 하나의 주요한 초점으로 볼 때 우리는 금세기 신학 전반에 흐르는 주조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시대에 제시된 주요한 신학적 주장들은 이 초월성과 내재성의 관계에 균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생기는 불안정이 무엇인지를 표현해 온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신학사의 진행 과정에서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라는 이 이중적 진리가 그 나름대로의 균형을 추구하듯이, 20세기의 신학이 보여주는 바도, 그 이중적 진리의 한쪽만을 균형 없이 강조하게 되면 그 반대적 측면을 강조하는 운동이 생겨나고 그 불균형을 극복하려다 보면 실제로는 그 과정에서 반대 방향으로 지나치게 나아가 버리게 된다는 이치이다. 따라서 한쪽 측면만이 강조되는 상황에 맞서 균형을 이루어 보고자 하는 시도를 하다 보면 그 시대의 신학 이야기를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관점을 찾을 수 있게 된다.
14 20세기 이전의 신학의 관점에서는 1차 세계대전을 놓고 역사적 흐름의 궤도 이탈이며, 역사적 추이의 상승세에 미세한 일시적 후퇴라고 불렀을테지만, 사실 1차 세계대전은 장차 다가올 일들의 전조였다. 중부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한 이래 유럽에서는 수십 년 간 전쟁이 멎지 않고 계속 악화일로의 갈등으로만 치달았다. 금세기에 접어들면서 시작된 수차례의 군사적 대결은 인명 피해만이 아니라 문화적 삶의 상실을 가져오게 했다. 서구 문화를 잠식해 들어가던 절망의 정서는 지성적 삶의 풍경 전반에 끊임없이 진입해 가면서 신학의 영역에까지 그 상흔을 남기게 되었다. 금세기의 역사에서 전쟁이 차지하는 역할이 이 정도쯤 되다 보니 전반적으로 볼 때 1900년대의 신학은 우리의 세계를 휘청거리게 만든 지속적인 군사적,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과연 우리가 해결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한 상황은 결국 가물거리는 나머지 희망―곧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뿐 아니라 혹 하나님이 위로부터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마저 산산히 깨뜨려 버린다.
포스트모던 세계에 만연한 이러한 문화적 절망의 한가운데서, 신학자들은 지난 수십 년 간 그들의 과업을 꾸준히 수행해 오고 있다. 때로는 현대 신학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내재성의 의미를 되살리는 방법을 동원하든지, 혹은 초월자를 찾아나서는 방법을 기용해 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20세기 이전의 신학은 세기말에 이르자 칼 바르트의 표현대로 행복한 학문’으로서 수백 년 간의 여정을 시작했지만 해체주의라는 불행한 막다른 골목을 향하여 제동이 풀린 듯이 치달아갔다.
20 세기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사건들이 신학의 종언을 고할는지에 대해서는 21세기에 가 봐야 알 일이지만, 어쨌든 이 시대의 신학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분명해지고 있다. 본래 내재적으로 불안전한 기초 위에━그 기초가 초월성에 대한 강조이든 내재성에 대한 강조이든━세워졌기에 한쪽으로 기울어 버린 신학은 단순히 누락된 요소를 덧붙이는 식의 보수 작업을 통하여 고쳐질 수는 없는 것이다. 신학을 제대로 세워 보려면 그 기초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기초가 제대로 다져지지 않은 경우에는 어떠한 외장적 변화를 가미한다 하더라도 내구성이 강한 구조물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20 세기의 신학은 1914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신학 이야기는 훨씬 더 먼 과거, 즉 20 세기 이전의 시대로부터 시작된다. 왜냐하면 그 시대로부터 또한 그 시대의 흐름에 대한 반동으로서 이 시대의 신학 사상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0세기의 신학을 가장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의 대략적 흐름과 대조해 보아야 한다. 19세기는 인간의 갈등과 투쟁으로 단련된 시기였으며 20세기의 신학은 그러한 19세기에 대한 통렬한 반동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한편 19세기 신학은 계몽주의라 불리는 서양 지성사의 대혁명으로 말미암아 개시된 변화들 가운데서 그 역사적 맥락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야기는 이성의 시대와 더불어 시작한다.
결론
496 각 시대마다 신학의 과제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를 명료하게, 정립하는 것이었다. 그 방법에서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쌍둥이 진리를 확증하고, 양자의 균형을 맞추며, 창조적인 긴장을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성경의 하나님은 이 세계 위에 계시고 이 세계 저편으로부터 오시는 자기 충족적인 분이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또한 역사적 · 자연적 과정에 관여하면서 이 세계 속에서 활동하시는, 창조 세계에 현존하시는 분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신학자들은 선배들이 남겨 준 불균형의 영향 하에서 신학적 과업을 수행했다. 그들이 처한 작업 환경은 중세의 의견 일치를 깨뜨린 계몽주의의 산물이었다.
중세 사상가들은 하나님의 내재성과 초월성 간의 균형을 공간적 개념에 호소함으로써 이룩하려 했다. 즉, 하나님은 상층부 하늘에 거하시지만 하늘 아래에 있는 이 세계에도 현존하신다. 이 하나님은 먼저 ‘태초에' 자신을 창조주로서 인간에게 나타내셨고, 후에는 예수의 성육신을 통해 구속주로서 드러내신 것이다. 중세적 모델은 이 세계에서의 하나님의 현존이 일차적으로 교회를 통해 중개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교회는 하늘과 땅 사이의 연결 고리에 해당한다. 교회의 활동 중 특히 성례식을 통해서 이 땅의 상황은 더 깊은 차원의 하늘의 · 실재를 반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계몽주의는 이 두 영역을 갈라놓았던 간격을 없애 버렸다. 그 사상은 피조물이 창조주와 직접 접촉할 수 있게 해주었는데, 그 접촉에 필요한 것은 오직 이성의 중개, 즉 이성이 우주와 공유하는 바 로고스를 파헤칠 수 있는 이성의 능력 뿐이었다. 이성은 만물의 바탕인 로고스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실재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탐구할 수 있다. 이성의 시대는 오늘날 우리가 지칭하는 '현대적' 정신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절대적인 지식과 확신을 추구하는 (어떤 때에는 이미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세계관이다.
19세기 사상가들은 계몽 사상의 합리주의를 극복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들은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이성의 시대에게서 물려받은 내재주의로부터 피할 수 없었으며, 과연 피할 의지가 뚜렷했는지도 불분명하다. 결국 그들은 신학적 과업, 곧 신학이 어떻게 내재적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해 논할 수 있는지를 20세기에 숙제로 넘겨주었다. 그래서 20세기 신학자들은 새롭게 내재성과 초월성 사이의 적합한 균형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498 하지만 해석학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어떻게 우리는 ‘말씀' '하나님' '천국’ 등을 이해해야 하는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는 우리의 세계와 충돌하는가? 우리에게 이런 방식으로 말씀하시는 이 하나님은 누구인가? 그리고 하나님은 어디로부터 말씀하시는가? 이런 질문들이 20세기 신학자들이 씨름했던 것들이다. 그리고 주요한 신학 운동들은 각각 특정한 기여를 했다.
물론 신정통주의는 저편으로부터 이 세계로 오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주제를 울려퍼지게 했다. 이에 덧붙여 이 운동은 징계의 역할도 담당했다. 즉, 우리에게 고전적인 기독교의 죄론을 상기시켜 주고 신학자들로 하여금 잠시 멈춰 서게 함으로써, 현대 정신의 자만에 휩싸여 우리가 자신의 이성적 노력으로 궁극적인 진리를 획득할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하지 않게 경고했다. 바르트가 자연 신학을 절대적으로 배척한 그의 입장이 좀 지나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다른 신정통주의 사상가들과 함께 고전적 자유주의의 지나친 낙관주의에 대응하여 음울한 색조를 칠한 것은 영구적인 가치를 지닌다. 우리가 타락한 사실은 인간의 타고난 능력에 힘입어 인간의 곤경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시킨다. 우리에게는 이 세계를 초월하는 어떤 자원들이 필요한 것이다. 바르트와는 정반대로, 이 세계에 뚫고 들어오는 그 말씀과 인간의 그릇 사이에 어떤 접촉점이 있을지도모른다. 그러나 궁극적인 면에서 보면 우리 세계에 침입하는 그 자원은 인간 세계와는 절대적으로 상이한 질서에 속한 것이다.
금세기에 일어난 자유주의의 재발흥도 나름대로 던질 메시지가 없지 않았다. 폴 틸리히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 것은, 저편으로부터 오는 말씀은 갑자기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이 세계에 침투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계의 현실과 인간 존재가 제기하는 근본 질문들에 대한 대답으로서 온다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가 신앙의 진리를 전하려 한다면 우리의 현실에 침투하는 그 저편을 더 이상 낡은 공간적 은유로 묘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틸리히가 만족스러운 대안을 제공하진 못했지만 1960년대 신학이 씨름했던 그 문제를 훌륭하게 제기해 주었다.
499 과정신학이 정립한 논제는 그 후에 나온 모든 신학들이 채택했다(각각 자기 관점에서 원용하긴 했지만). 실재는 정적이지 않고 역동적이다. 이 논제에 담긴 신학적 의미는 매우 광범위하다. 신적 실재에 대해 무엇을 말하든지 간에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우주의 역동적 과정에 우리와 더불어 참여하신다는 근본 명제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명제는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1960년대의 급진 신학들은 신과 세상의 관계에 대한 과거의 공간 모델에 최후의 장례식을 거행한 운동이었다. 그들은 이 세계 위에 있는 하늘에 존재하는 하나님 상(像)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만약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현대의 세속 영역 내에 잠긴 내재적 목소리이다.
하지만 세속성의 신학자들이 주장한 논제가 초월성의 죽음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은유에 길을 열어 줌으로써 희망의 신학자들이 시간적 은유를 도입했다. 하나님은 공간적으로 위에서부터 우리의 영토로 침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저편에서부터 우리에게 온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은 미래의 시점으로부터 우리의 현재에 참여하시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몰트만과 판넨베르크(후자가 더 성공적이라 생각되는데)는 중세의 합의가 깨어진 이래 그 때까지 보이지 않았던 신학적 균형을 이룩하려고 시도했다.
시간적 은유를 사용하면 새로운 의견 일치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속에서, 해방 신학들은 시간성으로의 전이가 근본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위험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균형이 단지 또 하나의 낡은 '잠시 후 하늘에 나타날 떡' 신학이 된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고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희망의 신학은 하나님이 미래의 하나님이 아닌 한 현대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한편 해방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현재 해방자로 활동하시는 분이 아니라면 미래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경고했다. 환언하면, 어떤 올바른 신학이라도지금-여기에서의 삶에 영향을 행사하는 신학이어야 하는 것이다.
500 금세기의 중반을 넘어서면서 보수적 개신교 내의 복음주의 운동도 폭넓은 신학적 토론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 다룬 두 명의 신학자에게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계몽주의의 파괴적 영향 하에서 기독 신앙의 의미를 확정짓기 위해 노력했다.
복음주의자들은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이 고안한 과격한 사상에 대한 필요한 교정책을 제공했다. 그들은 신학이 내재성과 초월성 간의 균형을 향하여 힘껏 나아가야 한다고 부지런히 상기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의 권위에 철저하게 헌신했다. 우리가 새로운 모델과 패러다임을 찾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성경적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고 복음주의 전통은 경고한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복음주의는 21세기에 신학의 확고한 토대를 놓는 데 필요한 지향점을 제공해준다.
우리가 이 책에서 지난 수십 년 간 나타났던 신학적인 대안들을 모두 망라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금세기에 크고 작은 신학적인 문제를 안고 씨름하면서 나름대로 독특한 공헌을 한 인물들이 이 외에도 많이 있다. 그 중 어떤 이들은 우리가 개관한 주요 줄기 아래 둘 수 있을 것인데, 여기에서는 한두 명의 대표적인 대변인들만 다룬 셈이다. 한편 다른 이들은 독립적인 길을 걸었지만 어떤 이유에서든지━옳은 이유든 그른 이유든━금세기 신학의 주류에 합류되지 못한 경우 들이다. 그리고 최근에 등장한 새로운 그룹들은 아직 평가하기에 시기상조이며, 장차 그들이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지 아니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하찮은 인물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501 그러므로 현대와 포스트모던 시대 사이의 과도기에서 신학은 초월적-내재적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확신을 새로운 방법으로 정립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 하나님은 모든 실재가 지향하는 초월적 목표점으로부터 우리의 현대 상황으로 침입하시는 하나님이다. 동시에 마치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불완전성을 넘어 아직 성취되지 않은 완전성을 내다보도록 초청하시는 분인 것처럼, 이 하나님은 우리의 현재 상태를 공유하시면서 우리 상황 속에 내재하시는 분이다. 요컨대 신학은 20세기의 경험이 내린 판결━땅은 천국이 될 수 없다━을 수용해야 한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희망의 메시지━"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를 덧붙여야 한다. 저편으로부터━그때 저 곳에서부터━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현재━지금 여기에서━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다. 우리가 이 진리를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내재성과 초월성 간의 신학적 균형의 핵심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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