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사통史通(26) ─ 史通, 內篇 - 直書

 

2025.05.11 δ. 사통史通(26) ─ 史通, 內篇 - 直書

유지기, ⟪사통⟫(劉知幾, 史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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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서直書 ─ 직서의 모범과 전통

• "그릇되고 굽은 것은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는 일이며 소인의 길이고, 바르고 곧은 것은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일이며 군자의 덕이다. 그러나 세상이 대부분 그릇된 것을 따르고 바른 것을 버리며, 군자의 행적을 실천하지 않고 소인을 따라 행동하는 것은 왜인가?" (약사곡자若邪曲者 인지소천人之所賤 이소인지도야而小人之道也 정직자正直者 인지소귀人之所貴 이군자지덕야而君子之徳也 연세다추사이기정然世多趍邪而棄正 불천군자지적不踐君子之跡 이행유소인자而行由小人者 하재何哉) 

• 동요에 "활시위처럼 곧은 사람이 길 가장자리에서 죽고, 낚싯바늘처럼 굽은 사람은 도리어 후에 봉해졌네."라고 했다. 그래서 차라리 시세에 순종하면서 자신의 안전을 지키고, 시세를 거슬러 해를 입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어왈語曰 직여현直如弦 사도변𢀸道邊 곡여구曲如鈎 반봉후反封侯 고영순종이보길故寧順從以保吉 불위오이수해야不違忤以受害也) 

전한 순제 때 사건을 배경으로 낙양에 불리던 동요
대장군 양기가 외척으로 공로를 세워 조정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이고를 옥중에서 죽게 하고, 자신의 수하인 원탕 등은 후에 봉했다. 

• "대개 열사는 명분을 따르고 대장부는 기개를 소중히 여긴다고 했으니, 차라리 난초가 꺾이고 옥구슬이 부서질지라도" 기왓장으로 길게 연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개열사순명蓋烈士循名 장부중기壯夫重氣 영위난최옥절寧爲蘭摧玉折 불작와역장존不作瓦礫長存) 

난최옥절蘭摧玉折(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
"모백성이 자신의 재주와 기력을 자부하여 늘 난초와 옥을 꺾거나 부술지언정 보잘것없는 영예는 만들지 않는다"라고 했다. (영위난최옥절寧爲蘭摧玉折 부작소부애영不作蕭敷艾榮) 
(난최옥절蘭摧玉折:  어질거나 능력있는 사람이 세태에 꺽여 좌절함, 소부애영不作蕭敷艾榮: 무능한 자가 때를 만나 번창함. 난蘭은 군자君子를 상징, 애艾는 소인小人을 상징) 

 


오늘은 사통史通 내편內篇 제24장 직서의 모범과 전통, 직서直書, 똑바로 쓴다, 올곧게 쓴다는 얘기인데 이것은 서사敍事에 관련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직서直書에 바로 이어서 곡필曲筆은 왜곡해서 쓴다는 얘기이다. 번역자 오항녕 교수도 곡필曲筆은 직서直書와 짝이 되는 편으로 서사敍事의 연장이라고 했다. 직서直書도 마찬가지로 서사敍事의 연장이다. 품조品藻하고는 조금 다르다. 그래서 직서直書를 식識에다가 집어넣었는지에 대해서는 고민을 조금 했다. 그래서 번역자가 이것을 어떻게 분류를 했든 간에 23편부터 30편 인물人物까지는 식識에 해당한다 했는데 사실은 직서直書나 곡필曲筆이나, 그런데 서사敍事편의 연장이라고 해도 똑바로 쓴다고 하면 이 사람이 잘했나 못했나를 써야 되는데 그것 역시 쓴다고 하는 건 뭔가 평가를 해야 되는데 평가를 하는 것 역시 뭔가 식별을 할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봤다. 

비아 출판사에서 피터 브라운의 책 《마침내 그들이 로마를 바꾸어 갈 때》이 새로 나왔다. 《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를 번역한 양세규씨가 번역했는데, 양세규씨는 교회사를 공부하고 있으니까 이런 것을 하기에 딱 적당한 번역자이다. 피터 브라운의 《마침내 그들이 로마를 바꾸어 갈 때》은 《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와 일종의 짝을 이루는 책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는 로마 사람들이, 이른바 이교도pagan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어렇게 했는가, 그러면 로마 세계의 그리스도교화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이제 원서의 제목은 Authority and the Sacred, 권위와 신성함, Aspects of the Christianisation of the Roman World, 그러니까 로마 세계의 기독교화의 한 단면들이다. 부록에는 배우는 삶이라고 해서 피터 브라운과 관련된 사람들의 얘기가 있는데, 제가 요즘에 사상사 연구 방법론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는데, 피터 브라운이야말로 사상사 연구에 있어 큰 업적을 남기고 있는 분이다.  

요즘에 당시唐詩도 읽으면서 사통史通도 읽고 하는데 사통을 하는 이유가 한문 공부를 하기 위해서 하는 것도 있지만 학문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이것은 사실 서양 철학 전공자로서는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인데, 왜 이걸 공부를 해야 하는가, 하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국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순우리말로 뭔가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한자어가 들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개념어라는 말 자체가 다 한자어이다. 그러니까 개념어를 순우리말로 바꿀 수가 없다. 그냥 개념어라고 얘기를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한자어로 우리 말로 바꾸자고 할 때이다. 이를테면 헬라스어 aretē를 우리말로 옮길 때 탁월함, 여기서 탁월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한자어이다.  그다음에 덕이라고도 옮긴다. 그리고 라티움어 virtus도 덕이라고 옮긴다. 그런데 헬라스어 aretē와 라티움어 virtus가, 플라톤 철학에서 aretē라고 말을 하면 정말 남들보다 잘난 것이다. 지적으로 탁월하다고 얘기하기도 하고, 또 읽어보면 구두장이에 aretē가 있다고 하면 구두를 잘 만드는 능력을 말하는 것인데, 가령 폴리비우스나, 폴리비우스는 희랍 사람이니까 헬라스어로 썼고, 만약에 리비우스나 타키투스나 이런 사람들이 virtus를 얘기하면 공화정 시민의 virtus는 어떤 능력dynamis이 아니라 태도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그럴 때는 덕이라는 말로 번역을 할 수가 없다. 시민다운 시민의 태도를 갖췄다 라고 해야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도 유럽 어족에 속하는 헬라스어나 라틴어를 덕이라는 한자 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그 언어들은 개념어인데, 한자어는 사실 개념어가 아니다. 지금 사통史通을 하면서도 여러 차례 말한 적이 있고 또 당시唐詩를 번역하면서도 그러한데 단어 하나에 속해 있는 뜻이 굉장히 많다. 게다가 한자 언어 이미지 언어이다. 그러니까는 이 번역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문제들이 굉장히 많다. 대표적인 그런 경우가 벌써 당나라 때 생겨났다. 구마라집이나 현장 법사 이런 사람들이 산스크리트어로 되어 있는 불전을 한역 불전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굉장히 고민들을 많이 했다. 그러니까 그 고민이 있었는데 가령 sūnya라고 하는, 그러니까 우리가 공空으로 번역하는 단어가 처음에는 무無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다가 나중에 공空이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觀⾃在菩薩 ⾏深般若波羅蜜多時 照⾒五蘊皆空 度⼀切苦厄에 나온다. 우리는 공空이라고 하는 말을 한국어로 옮긴다면 헛되다, 비어 있다 이런 식으로 번역을 할 수 있다. 색⾊이라는 단어도 color라는 뜻도 되지만 사실은 물체body라는 뜻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는 온전한 한국어 번역어를 찾아내려면 한자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것, 이것이 없는 상태에서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예전에 칸트 철학 번역 논쟁이 있었다. transzendental을 초월론적으로 하느냐 초험적으로 하느냐 초월적으로 하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논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한자 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것이다. 초월超越이라고 하는 한자에서 초超라는 한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서 먼저 고민을 해야 되는 것이다. 넘을 월越자도 도일체고액度⼀切苦厄에서 넘을 도度이다. 도이치어 Übergehen도 도度로 번역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용 적절하다 그럴 때의 희랍어의 metrion도 마찬가지이다. 예전에 산스크리트어를 한자로 옮길 때 고민했던 것과 똑같은 고민을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이다. 산스크리트어나 희랍어나 라티움어나 다 서구어, 인도 유럽어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그것을 우리말로 옮기는 것은, 한자어로 옮기는데 결국 이 한자를 쓰면 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서양의 개념어를 한국어로 옮긴다 할 때는 그 과정에 한자어가 반드시 매개적에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른바 서양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도 반드시 한자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구름meaning cloud, 의미 연관들 그리고 이 단어가 어느 정도의 무게를 가지고 쓸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을 고민해 봐야 된다. 그러면 transzendental 번역을 가지고 논쟁하기 이전에 당신들이 사용하고 있는 그 한자어들의 적절함을 고민해 보는 것 그리고 그런 교육을 스스로 했는가 이런 것에 대해서 먼저 따져야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릇되고 굽은 것은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는 일이며 소인의 길이고, 바르고 곧은 것은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일이며 군자의 덕이다. 그러나 세상이 대부분 그릇된 것을 따르고 바른 것을 버리며, 군자의 행적을 실천하지 않고 소인을 따라 행동하는 것은 왜인가?" (약사곡자若邪曲者 인지소천人之所賤 이소인지도야而小人之道也 정직자正直者 인지소귀人之所貴 이군자지덕야而君子之徳也 연세다추사이기정然世多趍邪而棄正 불천군자지적不踐君子之跡 이행유소인자而行由小人者 하재何哉) 천하게 여긴다, 천賤 자는 한자어지만 그렇다고 천하게 여긴다 라는 말을 낮게 여긴다라고는 할 수 없다. 천하다 라는 말과 낮다 라는 말은 의미가 조금 다르다.  바르고 곧은 것은 직直이라는 단어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한자어로는 직直 자 하나로 끝나는 건인데 우리는 그것을 바르다, 곧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는 수밖에 없다. 바를 정正 자 곧을 직直자, 그러니까 바르고 곧다. 어쨌든 한자로는 글자 두 개인데 그렇다. 약사곡자若邪曲者, 곡曲은 왜곡된 것, 굽은 것, 그런데 이 곡曲 자가 음곡吟曲으로 쓰이면 단테 《신곡神曲》 할 때 그 곡曲 자는 노래라는 뜻이 되어 버린다. 한자어는 곡曲이라는 것은 왜곡되었다 라고 할 때도 쓰지만 굽이굽이 흘러가는 가락을 가리킬 때도 쓰인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곡曲이라는 글자 하나 가지고 전혀 다른 범주에 속하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쓴다. 그러니까 제가 말한 산스크리트 sūnya를 없을 무無자를 쓰는 것과 빌 공空 자를 쓰는 것은 다르다. 허공虛空이라고 하는 거 할 때 어쨌든 하늘은 있지만 뭐가 채워져 있지 않은 것 같은 것을 가리킬 때 empty, 그럴 때는 무無를 쓰지는 않는다. 

그다음에 동요에 "활시위처럼 곧은 사람이 길 가장자리에서 죽고, 낚싯바늘처럼 굽은 사람은 도리어 후에 봉해졌네."라고 했다. 그래서 차라리 시세에 순종하면서 자신의 안전을 지키고, 시세를 거슬러 해를 입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어왈語曰 직여현直如弦 사도변𢀸道邊 곡여구曲如鈎 반봉후反封侯 고영순종이보길故寧順從以保吉 불위오이수해야不違忤以受害也) 전한 순제 때 사건을 배경으로 낙양에 불리던 동요로 대장군 양기가 외척으로 공로를 세워 조정을 마음대로 휘둘렀다고 한다. 그래서 이고를 옥중에서 죽게 하고, 자신의 수하인 원탕을 후에 봉했다고 한다. 그래서 고영순종이보길故寧順從以保吉 불위오이수해야不違忤以受害也, 차라리 시세에 순종하면서 자신의 안전을 지키고, 시세를 거슬러 해를 입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다음 페이지에 보면 "대개 열사는 명분을 따르고 대장부는 기개를 소중히 여긴다고 했으니, 차라리 난초가 꺾이고 옥구슬이 부서질지라도" 기왓장으로 길게 연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개열사순명蓋烈士循名 장부중기壯夫重氣 영위난최옥절寧爲蘭摧玉折 불작와역장존不作瓦礫長存) "차라리 난초가 꺾이고 옥구슬이 부서질지라도"는 하나의 사자 성어가 만들어졌고, 그다음에 "기왓장으로 길게 연명한다"는 유지기가 붙인 말이다. 이것은 유지기가 붙인 말이고 그리고 뒤에 부대에 붙일 때는 이제 소부애영이라는 말을 붙습니다. 난최옥절蘭摧玉折, 소부애영蕭敷艾榮이 널리 쓰인다. 난蘭은 군자君子를 상징하는 말이다. 난최옥절은 어질거나 능력있는 사람이 세태에 꺽여 좌절한다는 말이고, 소부애영는 무능한 자가 때를 만나 번창한다는 말이다. 이런 사자성어는 하나의 이를테면 사상적 표현이다. "왕침이 위서에서 간사한 곡필로 고위 관직을 노렸던 일이나 동통이 연사에서 아첨하는 글로 영화로운 삶을 훔친 것과 비교하면", "위소나 최호는 생각하는 대로 분연히 붓을 놀려 아첨하는 데가 없었다." "대개 열사는 명분을 따르고 대장부는 기개를 소중히 여긴다고 했으니, 차라리 난초가 꺾이고 옥구슬이 부서질지라도 기왓장으로 길게 연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보고 어떤 사태를 가지고, 그러니까 왕침이나 동통이 어떤 짓을 한 것을 가지고 곡필을 했고 그다음에 아첨을 했는가, 곡필이나 아첨이라는 단어로 지칭할 만한 짓거리들이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공부를 하면서 요러요러한 일이 벌어지면 이것을 곡필이나 아첨이라는 말로 유지기는 썼구나 그렇게 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역사책을 읽을 때도 어떠어떤 사태가 벌어지면, 예를 들면 리비우스가 로마에 대해서 뭐라고 써놓은 거 있고, 그것을 읽을 때 이것은 어떤 사상으로 표현이 되었겠는가. 가령 키케로가 《신들의 본성에 관하여》를 썼는데 키케로가 쓴 것을 그냥 그 자체로 읽지 않고 도대체 키케로가 어떤 것을 겪었길래 이렇게 표현을 했을까, 키케로가 겪은 당시 로마에서 신을 숭배하는 것들에 대한 역사책을 보고 찾아보고 요러요러한 것들을 키케로는 이런 식으로 표현을 했구나 이렇게 이해를 해보는 것이다. 그런 데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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