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중국사학명저中國史學名著(2) ─ 尙書

 

2025.07.19 δ. 중국사학명저中國史學名著(2) ─ 尙書

첸무, ⟪중국사학명저강의⟫(錢穆, 中國史學名著)
텍스트: buymeacoffee.com/booklistalk/ChienMu-02

 

상서尙書 [서경書經]
 • 상서尙書. 원고遠古, 상고上古 (오랜 옛날)
  서書. 운韻이 없는 글. 시詩는 운韻이 있는 글
   우虞 · 하夏 · 상商 · 주周. 네 시기에 대한 역사서. 5제와 3대에 관한 책
 • 상서尙書 가운데 가장 믿을만한 부분은 서주서西周書, 즉 주서周書 중에서 서주西周 부분. 동주서東周書도 있으나 이는 후일에 첨가된 부분. 
  시詩 · 서書 · 역易은 공자孔子(551-479 BCE) 가 태어나기 300년 전에 갖추어진 것
   서書의 각 부분은 별개로 전승되다가 서기전 4세기 말에 완결된 문헌의 일부로 통합


─ 상서尙書 전승사傳承史, 즉 판본의 문제
 • 고문古文. 전서篆書로 쓰여진 텍스트, 
    금문今文. 진한대漢秦代대의 예서隸書로 쓰여진 텍스트
 • 진시황의 분서焚書시기. 복생伏生이 상서를 몰래 가지고 있었다. 이는 고문古文. 진이 망한 후 조정에서 조조를 보내서 이를 예서로 정리하여 가져왔다. ─ 복생상서伏生尙書. 이는 금문今文. 
 • 한무제漢武帝 때 공자의 집을 수리하다 벽에서 나온 고문서古文書에 상서尙書가 있었다. ─ 전서로 된 책 
    공자의 후손 공안국孔安國의 이름을 붙여 공안국상서孔安國尙書. 이는 고문상서古文尙書 

 

─ 고문古文(44편)과 금문今文(28편)의 차이. 변위辨僞의 문제
    주자의 제자 채침蔡沈이 집전集傳을 정리하면서 각문各文의 차이를 밝혀보였다.
 • 원대元代의 오징吳澄과 명대明代의 매작梅雀에 이르러 고문상서가 위작이라는 의문이 시작. 청대淸代 고증학자 염약거閻若璩(1636-1704)는 이를 명확하게 증명(《고문상서소증古文尙書疏證》, 소증疏證. 거짓을 가려낸다) 
혜동惠棟(1697-1758), 고문상서고古文尙書考 염약거의 증명을 발전시킴

➞  • 상서에는 두 종류의 책이 있는데, 그 가운데 '고문상서'에는 위조된 내용이 많다는 것
     • 상서尙書를 읽고자 한다면, 채침의 집전이 가장 쉬울 것이다.
     • 금문상서 역시 모두가 진짜라고 할 수 없으며 가짜가 적지 않다.
     • 상서尙書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과 대조해서 검증하는 작업이 진척되지 않았다.

─ 강유위康有爲,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의 변위辨僞 작업
 • 경학經學, 한학漢學은 모두 왕망王莽의 신학新學이다.
 • 경經은 유흠劉歆이 왕망을 위해 위조한 것이다.
 • 공자가 언급한 그 이전의 사실은 모두 공자가 탁고개제託古改制한 것, 즉 공자가 새로운 제도 개혁을 위해 고대에 가탁했다. ─ 이는 지나치게 변위辨僞 한 것 

─ 몇가지 고증 
1. 상서尙書 제1편 요전堯典
   현대의 천문학天文學의 관점에서 보면 고대 요순시대의 천문을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
2. 요堯 · 순舜의 선양과 관직
  연대문제가 분명하지 않다.
  고대 중국에 체계적 관직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 이는 사실 전국시대 말기 이상적인 정부에 대한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탁고개제託古改制이다. 
3. 단어의 문제
  후일에야 쓰이던 단어가 고대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노자老子》의 현덕玄德이라는 단어는 요순시대에 쓰이지 않았고, 심지어 공孔 · 맹子 시대에도 쓰이지 않았다. '중국문화中國文化'라는 네 글자 단어만해도 청말기淸末技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4. 우공禹貢편의 지리地理에 관한 것
  구주九州를 지역地域으로 나는 것은 전국시대 이후의 일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상서』를 읽는다면 다만 그 대의大義[사상서로서 읽기]를 얻고자 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글자 하나 문장 하나를 모두 이해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 고서를 읽기 어렵다고 백화문으로 번역한다고 해서 이해하기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주를 붙여서 해석을 도와도 이해하기 어려운 형편이니, 고문을 백화문으로 번역해도 그 뜻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수천 년 전의 사람들이 남긴 말들을 오늘날 사용하는 백화문으로 꼭 맞게 번역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번역과 이해] 


지난번까지는 유지기의 사통史通을 읽었는데 지난주부터 전목 교수의 사학명저강의를 읽고 있다. 지난주에는 소개의 내용을 말했고,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내용을 살펴가면서 읽어보려고 한다. 사학명저강의 목차를 보면 서경書經에 해당하는 게 상서尙書이다. 이를 역사책이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지만 어쨌든 역사책의 범주 안으로 넣고 있다. 상서尙書라고 하는 것은 오래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상고지서上古之書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한문에서는 운韻이 없는 글을 서書라고 하고 운韻이 있는 글을 시詩라고 한다. 그래서 오래된 운韻이 없는 글, 그냥 문서이겠는데, 이것을 상서尙書라고 한다. 상서가 첫 번째 책이고 그다음에 널리 알려져 있는 춘추, 그다음에 춘추3전, 공양전, 곡량전, 좌씨전, 그리고 나서 좌씨전을 좀 더 집중적으로 다루는 좌전과 국어, 그리고 전국책, 그다음에 사기는 중국 역사책에서 아주 대단한 것이니까 상, 중, 하 세 번에 걸쳐서, 사기가 굉장히 중요하다 라고 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얘기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그다음에 반고의 한서 그리고 범엽의 후한서와 진수의 삼국지 그다음에 후한으로부터 수에 이르는 시기의 사학 발전, 그리고 고승전 · 수경주 · 세설신어 신어 그다음에 유지기의 사통을 다루고 있고, 두우의 통전을 상하로 나눠서 다루고 있다. 그다음에 당나라 때의 텍스트인 정관정요, 그리고 구양수의 신오대사와 신당수, 그다음에 이건 꼭 우리가 한 번쯤 봐야 되는 책인 사마광의 자치통감, 그다음에 주희의 자치통감강목과 원추의 통감기사본말, 그다음에는 문헌통고, 황종희의 명유학안, 전조망의 송원학안, 그다음에 정학성의 문사통의까지, "오늘 첫 시간 강의 주제는 상서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상서는 두 번에 나눠서 얘기를 하겠다. 

상서尙書라는 것은 앞에서도 얘기했던 것처럼 '아주 먼 옛날', 원고遠古, 그다음에 '오랜 옛날', 상고上古를 말한다.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쳤을 때 텍스트로 사용했던 게 바로 이것이겠다. 시詩와 서書를 가르쳤다. 공자는 시를 읽지 않은 자하고는 대화를 못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옛날 책이라기보다는 그때만 해도 서書라든가 시詩라든가 이런 것들이 고전 텍스트였기 때문에 진짜로 서書를 가르치기도 했겠지만 그것을 조금 확대해서 해석을 해보면 고전 텍스트라는 얘기이겠다. 공자 때만 해도 이게 읽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았겠지만 오늘날에는 몹시 어려운 텍스트라고 볼 수 있다. 상서尙書는 어떤 시기를 다루고 있는가. 우虞 · 하夏 · 상商 · 주周 시기를 다루고 있다. 우虞 나라는 요순 시대이다. 요순 시대를 당우唐虞 시대라고 하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상서는 우虞 시대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역사 시대로 들어가게 되면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가 바로 이제 역사시대이다. 그러니까 역사책을 보면 하나라부터 다루고 있다. 상商 나라라고 하기도 하고 은殷 나라라고 하기도 한다. 상 제국, 은 제국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제국이라기보다는 성읍 국가라고 할 수 있다. 5제와 3대에 관한,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 시기를 3대라고 하는데, 서경書經은 5제와 3대, 5제는 우虞를 포함한 시대인데, 5제 중의 일부인 우虞나라, 그다음에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 5제와 3대에 관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를 다루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오늘날 이것을 역사책이다고 본다면 역사책으로서 믿을 만한 부분이 있을 것이고, 나머지는 아닐 수도 있고, 역사 문헌으로서 이렇게 검토를 해보면 주나라에 관한 부분이, 상서 가운데서도 가장 믿을 만한 부분은 서주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주나라에 관한 부분이라고 한다.  

주나라는 서쪽에 있던 주나라를 서주西周라고 하고, 주나라가 조금 어수선해져서 동쪽으로 옮겼는데 이를 동주東周라고 한다. 주나라 역사책은 서주시대를 다룬 부분을 서주서西周書라 하고, 동쪽으로 천도한 다음을 주의 동천이라고 하는데 이를 다룬 부분은 동주서東周書라고 하는데, 상서에 서주서가 있고 동주서가 있는데, 동주서 부분은 나중에 첨가된 부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동주서 부분은 믿을 만한 텍스트가 아니라고 본다. 결국 이 텍스트 중에서 믿을 만한 텍스트는 어떤 것인가. 역사책으로서 믿을 만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서주서, 서주에 관한 부분이다. 그 앞에 있는 하나라, 상나라에 관한 부분은 역사책으로는 믿을 만하지 않고 고대 문헌으로서 읽을 만한 것 그런 것이다. 그런 것들을 좀 생각을 해봐야 한다. 그다음에 시경, 서경, 역경은 대체로 보아서 공자가 태어나기 300년 전에 갖추어진 것이라고 본다. 공자는 서기전 551년에 태어났으니 300년 전이라고 하면 서기전 한 800년쯤 문헌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상서의 각 부분은 사실상 별개로 전승되다가, 그러니까 서기전 800년쯤에 이것도 쓰여지고 저것도 쓰여졌는데, 그때 갖추어져 있다가 서기전 4세기 말에 완결된 문헌의 일부로 통합이 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그러니까 공자가 교재로 이것을 가르쳤다고 하면 이렇게 저렇게 흩어져 있는 텍스트들을 가지고 가르쳤다고 보면 되겠다. 

전목 선생이 여기서 판본 문제를 제기하는 거 있는데 어떻게 전승되었는가를 한번 보겠다. 옛날 글자로 쓰여진 것이 고문상서古文尙書이고, 그다음에 옛날 글자보다 나중 글자로 쓰여진 게 금문상서今文尙書이다. 고문상서古文尙書는 전각 글자, 그러니까 전서篆書로 쓰여진 텍스트, 진나라 이전에 쓰여진 텍스트이다. 그다음에 진나라와 한나라 때 사용된 텍스트는 예서隸書이다. 그래서 예서로 쓰여진 텍스트는 금문이라고 말한다. 진시황이 분서焚書를 하게 되니까, 복생伏生이라는 사람이 상서를 몰래 가지고 있었는데 당연히 전서篆書로 쓰여져 있는 텍스트였으니 고문古文이다. 그것을 몰래 훔쳐서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진나라가 망한 다음에 복생이라는 양반이 산동 지방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한 나라의 수도가 장안인데, 오늘날 중국의 수도는 북경이고, 당나라의 수도는 장안, 한 나라의 수도도 장안이다. 장안은 중국 내륙 한가운데 있다. 우리가 흔히 장안이라고 말할 때는 중국 내륙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북경과는 꽤 멀다. 그 당시에 복생은 100세가 다 되어 가는 노인이라 수도인 장안까지 오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당시 한나라 조정에서 학문의 조예가 깊은 조조라는 사람을 보냈다. 가서 보니까 전서로 쓰여져 있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조조가 보기에도 가지고 와봤자 자기도 정확하게 잘 모른다는 얘기이다. 게다가 지금도 그렇겠지만 장안에 살고 있는 사람과 산둥성에 살고 있는 사람과는 서로 잘 대화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조조가 가서 복생한테 이 텍스트를 배우는 것이다. 그때 복생의 딸이 곁에서 번역을 도왔다. 그렇게 해서 예서隸書로 받아 적어왔다는 것이다. 이를 복생상서라고 불렸다. 그게 바로 금문今文이다. 복생이라고 하는 양반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도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복생상서라고는 하지만 복생이 가지고 있던 게 아니라 복생이 가지고 있는 것을 조조라는 사람이 예서로 정리해서 가져온 것이다. 그러니까 복생상서라고 불리기는 해도 금문으로 쓰여진 것이다. 그리고 이때가 한나라 경제 때이다.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박사관을 세우고 교재로 삼아서 교육을 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박사관상서라고 불리기도 하고, 금문상서라 불리기도 하고, 그다음에 복생상서라고 불리기도 하고, 그렇게 세 가지 이름으로 불렸는데 어쨌든 이 텍스트가 예서로 쓰여져 있었다는 것을 꼭 기억해 둬야 한다. 그런데 한나라 무제 때,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의 무렵이다.  

노나라가 공왕이 집을 수리하면서 공자의 옛 거처를 허물었는데 벽에서 많은 고서가 나왔다. 당연히 공자의 후손들이 진시황의 분서를 피해서 거기다가 감춰놨은 것이다. 그 고서 중에 상서가 있었다. 그때 공자의 후손 중에 공안국孔安國이라고 있었는데 공안국이 무제의 조정에서 관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안국의 이름을 따서 공안국상서라고 했는데 전서篆書로 쓰여져 있었다. 그러니까 나중에 발견된 것은 고문古文이고 먼저 고문으로 되어 있는 것을 조조가 베껴 쓴 것은 금문今文이다. 그런데 이것은 금문이 아니어서 연구하지 않았다. 이것은 교재가 되지 않아서 박사관에서 이 책을 이용해서 학생을 가르치지는 않았다고 되어 있다. 그러면 일단 상서의 판본는 이렇게 되어 있다. 고문상서古文尙書가 있고 금문상서今文尙書가 있다. 그러면 고문과 금문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고문이 진짜고 금문은 가짜인가. 변위辨僞의 문제가 있다. 어떤 것이 거짓인지 어떤 것이 진짜인지를 판별해 내는 것을 변변위辨僞의 문제라고 한다. 이제 심각한 문제가 될 텐데 어떻게 해서 이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는가를 한번 생각을 해보겠다. 고문은 일단 옛날 거니까 44편이고 금문은 28편이다. 편수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이것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하다가 그래도 가장 잘 정리된 것이, 주자의 제자 채침蔡沈이라는 사람이 정리를 해서 집전集傳이라고 하는 것을 만들었다. 집전集傳이라는 것을 만들면서 이것은 고문상서에는 있는데 금문상서에는 없다. 이것은 금문과 고문 모두에 있다 하는 것을 그 차이를 밝혀서 말을 했다. 이렇게 상서를 갖다가 새롭게 밝혀 보였다. 송나라 때 주자는 유교를 교과 과정으로 세팅을 시킨 사람이다. 주자학이 말하자면 국가의 기본 학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서경을 뚜렷하게 문헌 비판을 해서 텍스트로 만들어야겠다고 했던 것이고, 주자의 제자인 재침이 이것을 잘 정리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 보면 원나라 때 오징이吳澄라는 사람이 있다. 또 명나라 때 매작梅雀이라는 사람이 아무리 봐도 금문은 모르겠는데 고문은 위작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변위의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나라 때까지만 해도 고문에는 이런 게 있는데 금문에는 없더라 또는 고문과 금문에는 모두에 있다. 금문에는 이런 것이 있는데 고문에는 없다 하는 정도만 밝혔는데, 원나라와 명나라 때에 이르게 되면 아무리 생각해도 고문이라고 하는 게 옛날 문헌이라고는 하지만 후대에 만들어 놓은 일종의 위작이 아닐까 라는 그런 의심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까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을 했다. 문헌 비판이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고 청나라 때 오면 고증학이라고 하는 학문이 생겨나서 청나라 초기에 염약거閻若璩라는 사람이 이를 명확하게 증명해서 고문상서소증古文尙書疏證이라고 하는 책을 썼다. 소증疏證이라는 말이 거짓을 가려낸다는 말이다. 염약거의 증명을 발전시켜서 혜동이라는 자가 고문상서고라는 책을 써서 드디어 고문 상서가 위서임을 밝혀냈다. 그러니까 이제 고문상서는 읽을 필요가 없고 금문상서만 읽으면 되는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중국 역사 속에서 고문상서를 사람들이 연구했는데 알고 보니까 거짓 문서였더라는 것이다. 그러면 얼마나 허망하겠는가. 일단 이런 고문과 금문의 차이가 있었고, 문헌 비판을 통해서 고문상서가 거짓 문서임이 밝혀졌다. 그렇다고 해서 고대의 문서가 거짓 문서라고 해서 그 의미가 없는가. 그런 것만은 꼭 아니다.

여기서 전목 선생이 몇 가지 정리한다. 첫째 상서에는 두 종류의 책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 고문 상서에는 위조된 내용이 많다. 꼭 문헌학자가 아니라면 고문상서는 굳이 읽을 필요가 없다는 느낌이다. 그다음에 금문상서 역시 모두가 진짜라고 할 수 없으며 가짜가 적지 않다. 금문상서에도 거짓된 부분이 있다. 그다음에 가장 심각한 것은 상서가 역사책이라고 하니까, 그렇다면 상서의 내용 중에 역사적인 사실인가 아닌가를 대조해서 검증하는 작업이 진척되어야 하는데 그게 꽤 진척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중국사 책을 보면 상서의 내용을 검토해서 그 진위를 밝혀놓은 책들이 있다. 오늘날 나온 중국사 책을 보면 그 정도로 만족을 해야 한다. 이 위서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했던 사람이 강유위康有爲로 청말 민국초 사람이다.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라는 책이 있다. 여기서 강유위가 얘기를 하기를 경학經學이나 한학漢學은 모두 왕망의 신학新學이라고 얘기했다. 전한이 있고 후한이 있는데 그 사이에 신나라가 있다. 우리가 중국사를 배울 때 신나라는 왕망이 세웠던 나라라는 정도만 알고 있다. 그런데 왕망은 아주 엄청난 유학자였다. 오카다 히데히로가 얘기를 한 게 있는데, 왕망의 유학혁명이라고 말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다. 그런데 전한 말에 유흠劉歆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고문상서를 가르쳐야 된다고 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복생상서, 즉 금문상서는 박사관을 설치해서 가르쳤는데 고문상서는 안 가르쳤다. 유흠이라는 사람이 유학을 부흥시키고자 굉장히 노력을 했는데, 이 사람이 왕망과 한 무리였다. 그래서 이 무렵에 강유위가 말하기를 경학이라든가, 그러니까 유학에서의 중요하게 여기는, 경학 그리고 한학 이런 것들은 모두 다 유흠이 편찬한 것들이다. 그러니까 이게 다 왕망을 위해서 위조한 것이다 라는 얘기를 한다.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공자의 탁고개제託古改制라는 말이 있다. 고대의 옛것의 의탁에서 제도를 개혁했다는 말이다. 강유위가 말한 것이 이것이다. 공자는 주공을 그리워한다고 하면 이것이 시경의 주요 내용이다, 서경의 주요 내용이다 하는 것들은 사실 공자가 쓴 것이라는 것이다. 공자가 이것을 쓰면서 자기가 쓰지 않고 옛 얘기인 것처럼 썼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썼는가. 공자가 생각하기에 이런 제도를 만들고 싶어서, 공자가 주장하고 싶은 게 있어서이다. 이를 다 옛날에 있었던 얘기라고 하는 식으로 썼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도를 개혁하기 위해서 제도를 고치기 위해서, 뭔가 옛날 것을 가져다가 쓴 것처럼, 옛날 것을 되살린 것처럼 썼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탁고개제託古改制, 옛날 것에 의탁해서 제도를 개혁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옛날 것이 아니고 공자가 고안해 낸 것, 즉 공자가 새로운 제도 개혁을 위해서 고대의 어떤 문헌을 되살린 것처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에 쓰여져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사실 전목 선생이 보기에도 이건 좀 지나친 거 아닌가 하는 것이다. 신학위경고는 왕망을 위해서 유흠이 위조한 것이고, 공자개제고는 공자가 언급한 것은 사실 모두 공자가 거짓으로 말한 것이다, 옛날 것인 양 말한 것이다 라는 얘기이다. 그러니까 위서 문제들을 지나치게 많이 얘기해 버린 것이다 라는 말이다.  

이런 정도로 전승사傳承史 또는 변위辨僞 문제를 정리를 한 다음에 전목 교수는 이런 얘기를 한다. 상서尙書 제1편 요전堯典을 보면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 난방칠수라는 별이 모두 나타나고, 낮의 길이가 가장 긴 때인 하지의 대화성이 정남쪽에 자리하며, 밤의 길이가 낮과 같아 북방칠수의 하나인 성허가 제자리에 돌아오고", 이런 천문현상 관측이 기록이되어 있다. 현대 천문학의 관점에서 보면 고대 요순 시대의 천문을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는 것인데, 꼭 이게 틀린 얘기만은 아니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상서에 있는 기록이 후대에 거짓으로 쓰여진 게 아니라 실제로 그때 해당하는 기록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일부는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부분이라는 얘기이다. 그거는 이제 맞는 얘기이고, 하나라의 시조는 우임금이고, 상나라의 시조는 설이라고 하는 사람이고, 주나라의 시조는 기라고 되어 있는데, 이 사람들의 관직은 연대 문제가 분명하지 않고, 그다음에 하나라, 은나라 에 9개 관직이 있었다고 서술이 되어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것이다. 9개 관직이라고 하는 것은 진나라 한나라 때도 없었다. 그러니까 상고시대에 체계적 관직이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고, 사실상 전국시대 말기에 이 텍스트를 쓰면서 이상적인 정부 구조는 어떤 것인가를 얘기하고 싶어서 옛날부터 이게 있었던 것인양 썼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문헌이 쓰여지던 시대의 이상적인 정부 구조를 생각한 저자가 뭔가를 써놓고 아주 먼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다 라고 하는, 말그대로 탁고개제託古改制를 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그다음에 세 번째로는 몇몇 단어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서 순전舜典편에 보면 "보기 드문 덕행에 대한 소문이 요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갔다"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현덕승문玄德升聞이라는 글자가 있는데, 순임금의 덕을 요가 알게 되었다 라는 것을 현덕玄德이라는 글자로 표현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문제가 될 수 있다. 현덕이라는 글자, 즉 두 개의 글자로 하나의 뜻을 하게 말하게 된 것은, 노자의 도덕경 시대에도 나올까 말까 하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은 사실 공자나 맹자 시대보다 나중에 쓰여진 문헌이다. 두 글자 단어는 공자나 맹자 시대에도 쓰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공자시대만 해도 어떤 관념어를 한 글자로만 썼다. 그러니까 이 텍스트 역시 최소한 전국시대 이후에 나온 텍스트에 불과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중국문화中國文化라는 단어만 해도 청나라 말기에도 안 쓰였다. 이렇게 하나의 사태를 가리킬 때, 그러니까 사자성어는 있었어도 중국문화라는 단어는 없었다. 그다음에 우공禹貢편의 지리地理에 관한 얘기를 보면 형주 · 연주 · 예주 등 9개 영역으로 나눴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된다는 얘기이다. 그렇게 9개 주로 나눈 것은 전국시대 이후의 일이기 때문에 하나라, 상나라 그다음에 주나라, 춘추시대 그리고 전국시대 초기까지도 9개의 주로 나눈다 라고 하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보면 역사적으로 맞는 부분도 있고 역사적으로 아닌 부분도 있고 후대에 쓰여져 있다 라고 하는 것이 명백한 부분도 있다. 그러니까 앞서 말한 것처럼 특정 부분은 맞고, 금문상서 역시 모두가 진짜라고 할 수는 없고 가짜가 적지 않다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것을 왜 읽어야 되는가. 그래도 읽어야 될 의미가 있는 부분들이 있는데 이것은 다음 주에 얘기를 하기로 하고, 오늘날에는 읽을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읽어야 되는가를 전목 선생의 얘기를 보면, "오늘날 우리들이 상서를 읽는다면 다만 그 대의大義를 얻고자 하는 표현이 더 나을 것이다." 우리가 읽어야 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 대강의 뜻, 그러니까 상서에 있는 것을 역사책으로 봐서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네 하고 읽으면 안 되고, 상서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냐를 찾아봐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의를 얻고자 하는 편이 더 나올 것이다. 이는 사상서로서 읽어야 된다는 것이다. 글자 하나 문장 하나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쉬운 말로 풀어서, 오늘날 중국의 문어는 이제 백화문이다, 오늘날 통용되는 언어로 이것을 를바꾼다 해서 이해하기 쉬워지는 것도 아니다. 그 줄을 붙여서 해석을 돕는다 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형편인데, 고문을 백화문으로 바꿔 놓는다고 해서 이해가 되겠는가 하는 것이 전목 선생의 말이다. 수천 년 전에 사람들이 남긴 말들을 오늘날 사용하는 백화문으로 꼭 맞게 번역하기란 불가능하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일단 수천 년 전에 사람들이 남긴 말을 오늘날 사용하는 언어로 번역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다음에 온갖 각주를 동원하고 주석을 붙여서 번역을 한다 하더라도 이해하는 것도 어렵다. 번역과 이해가 어렵다. 그러니 그저 사상서로서 대의를 파악하는 정도로 충분히 만족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전목 선생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이다. 그러면 다음 주에는 사상서로서는 어떤 대의를 우리가 여기서 찾아낼 수 있는가를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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