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중국사학명저中國史學名著(3) ─ 尙書

 

2025.07.26 δ. 중국사학명저中國史學名著(3) ─ 尙書

첸무, ⟪중국사학명저강의⟫(錢穆, 中國史學名著)
텍스트: buymeacoffee.com/booklistalk/ChienMu-02

 

─ 서주서西周書, 주공周公: 서주西周와 주공周公의 정신
• 상서 가운데 가장 믿을 만한 부분.

• "넓은 하늘의 상제께서는 그의 원자에게 내린 이 큰 나라 은의 명을 바꾸었습니다. 왕께서 명을 받으시니 이는 무궁한 경사이며, 또 무궁한 근심이기도 합니다. 아아! 어찌 근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황천상제皇天上帝 개궐원자改闕元子 자대국은지명玆大國殷之命 유왕수명惟王受命 무강유휴無疆惟休 역무강유휼亦無疆惟恤 오호嗚呼 갈기나하불경曷其奈何不敬) 

• "우리[주周]는 두 나라[하夏, 은殷]의 명운을 거울삼아 그 업적을 이어받아야 합니다." (금왕사수궐명今王嗣受厥命 아역유자이국명我亦惟玆二國命) 

 

• 주공周公의 천명론天命論과 공주론共主論은 후세에 큰 영향
   천명天命이 무상無常하다라는 관점
      주周에 천명天命이 주어진 것은 문왕文王이지 무왕武王이 아니다. 즉 문덕文德이지 무공武功은 아니다. 분명 무왕武王이 천하를 평정했지만 상제는 문왕文王에게 천명을 수여했다는 것 
    공주론共主論. 천자天子는 대국對國의 제후諸侯 · 신하臣下들과 함께 천하를 통치한다는 것

─ 신유神遺
• 섬서陝西, 위하渭河 지역에서 선주先周 시기로 추정되는 유물 발굴
  서기전 12세기 후반에 고공단보古公亶父를 따라서 움직임

• 역사적 이주를 통하여 주 사람들의 중심지가 웨이하 계곡의 서쪽 지역으로 바뀐 것이 분명하다. 고공단보의 손자인 문왕文王 시절 두 개의 작은 정치체 사이에 영토 분쟁에 외교적으로 개입 

• 왕조 이전 시기의 주 가문은 자신의 조상뿐만 아니라 가장 최근에 죽은 상 왕들을 포함한 상나라의 선조까지도 숭배. 명문銘文들은 주가 웨이하 유역에 지역 세력으로 확고하게 자리한 뒤에도 적어도 일정 기간 상이 북중국의 막강한 정치적 세력이라는 현실을 인정했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 주周의 상商 정복
   서기전 1059년 5월 말 태양계의 다섯 주요 행성(목木, 토土, 화火, 금金, 수水)이 치산岐山 기슭 주 도성의 북서쪽 하늘에 모이게 된다. 오성취五聖聚가 만들어지 진 것. 

• 문왕文王은 왕권을 선언하고 공식적으로 상의 체제에서 독립. 문왕이 하늘의 명령[천명天命]을 받았다는 믿음이 주 국가의 이상적 토대가 되었으며 서주 전 기간동안 주 나라의 명문銘文으로 칭송되었다. 문왕文王 사망 이후.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른 무왕武王은 서쪽지역 여러 부족 및 공동체와 연합하여 상을 정복. 서쪽 연합과 동쪽 연합의 대결 / 첫번 째 정복 

• 주공단周公旦 ─ 무왕武王의 동생
  서기전 1043년에 무왕이 죽고 주공이 주 궁정의 실질적 지배자. 두 형이 동부 평원의 이전 상에 속했던 세력을 끌어들여 반란. 3년 동안 상의 잔여 세력과 반란 의혹이 있는 세력들을 제거. 
  성왕成王은 아주 어렸다는 것이 강조되는데, 이는 실질적 건국자 주공의 역할을 부각시키기 위함. 죽은 무왕의 또다른 동생인 소공석召公奭의 협력 
  제태공齊太公 강상姜尚의 공헌 / 두번 째 정복

 

리펑李峰, 《중국고대사》, 사회평론


지난주에는 중국사학명저中國史學名著에서 첫 번째 텍스트인 상서尙書에 관한 설명을 정리해서 말했다. 상서尙書에서 역사적으로 믿을 만한 문헌이 서주西周에 관한 부분인 서주서西周書이다. 서주의 수도가 서쪽에 있으면 서주이고, 동쪽으로 옮기게 되면 주의 동천이라고 하는데, 도읍을 동쪽으로 옮겼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춘추시대가 시작이 된다. 주의 동천이 춘추시대의 시작이다. 그런 역사적인 것들은 중국사를 읽어보면 나오는데 아주 필요한 것만을 조금 이따가 말하겠다.  

서주에 관한 기록을 보면 가장 믿을 만한 부분이라고 했는데, 믿을 만하다 라고 할 때 어느 정도로 믿을 만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 중국 고대사도 그렇고 상당히 신화적인 부분, 그리고 한 번 이것이다 라고 정해져 버리면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그것이 가지고 있는 신뢰성 자체가 검증되지 않은 상태로 지속되었기 때문에, 청나라 때는 그게 또 아니다 라고 하는 문헌 비판도 있었다. 일단 전목 교수의 얘기를 보면 위하渭河 지역이다. 거기 그런 말이 있는데, 이 문장은 중국 사상사에서도 많이 다루는 문장이다. 사실 고대 역사 책들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한 역사책이라고 보다는 이랬으면 좋겠다 하는 부분들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있는 그대로 믿으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넓은 하늘의 상제께서는 그의 원자에게 내린 이 큰 나라 은의 명을 바꾸었습니다. 왕께서 명을 받으시니 이는 무궁한 경사이며, 또 무궁한 근심이기도 합니다. 아아! 어찌 근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황천상제皇天上帝 개궐원자改闕元子 자대국은지명玆大國殷之命 유왕수명惟王受命 무강유휴無疆惟休 역무강유휼亦無疆惟恤 오호嗚呼 갈기나하불경曷其奈何不敬. 여기서 경敬이라는 단어를 근신으로 번역을 했는데, 두려워한다는 말이다. 존경한다 할 때 쓰는 경敬 자인데, 밑에다 말 마馬자를 써놓으면 놀랄 경驚 자로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명이라고 하는 것, 하늘의 명이 은나라에 있다가 주나라로 왔다, 그런데 무궁한 근심이기도 하다. 명이 왔으니까 좋기도 한데 잘해야 된다는 말이다. 즉 하늘의 명이라는 것은, 우리가 왕권을 쥐고 있는 것은 언제나 영원히 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똑바로 안 하면 또 우리도 멸망한다. 이것을 조금 달리 생각해 보면 정체순환론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정체순환론은 한 나라 안에서 1인 통치인 군주정 그다음에 귀족정 그다음에 여러 사람이 다스리는 통치, 그러다가 다시 또 참주정으로 이행해서 다시 1인 통치 그다음에 소수의 통치 그다음에 여러 사람이 다스리는, 한 나라 안에서 정체가 순환하는 것을 정체순환론이라고 하고, 흥망성쇠는 계속 되풀이된다는 하는, 국가가 바뀌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이 두 개를 혼동하면 안 된다. 중국에서는 대체로 60년 단위로 이것을 얘기한다. 한 나라가 있는데 이 나라가 30년 동안 흥하다가 30년 동안 쇠한다. 이게 우주의 이치라는 얘기들을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세계사 연표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명이라고 하는 것은 끝없이 바뀐다. 그러니 오로지 기뻐하지만 말고 조심해야 될 것이라는 말을 지금 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주周]는 두 나라[하夏, 은殷]의 명운을 거울삼아 그 업적을 이어받아야 합니다." 서주서西周書에 나와 있는 얘기라고 한다. 그리고 이제 이 구절들로부터 전목 교수는 서주서가 현재 전해오는 것 중에 가장 믿을 만한 부분인데,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두 가지 얘기를 하는데 그게 하나가 천명론天命論 그리고 또 하나가 공주론共主論으로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라고 말한다. 천명론天命論이라고 하는 건 하늘로부터 명을 받는 것이라는 말이다. 명을 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천명론의 핵심 포인트는 천명天命이 무상無常하다는 관점이다. 이 무상無常이라는 말에 포인트가 있다. "주나라의 천명이 주어진 것은 문왕이었지 무왕이 아니다."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은 또 중요한 지점이 있다. 문왕이 먼저이고, 무왕이 문왕의 아들이다. 왕을 지칭하는 명칭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문왕은 말 그대로 문덕文德이고, 천명은 무공武功에게 주어지는 게 아니라 문덕文德에게 주어진다. 무왕은 역사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가는 조금 이따 다시 이따 살펴보기로 하고, 분명히 무왕이 천하를 평정했지만, 상나라를 직접 멸망시킨 왕은 무왕이다, 주나라는 상나라의 영향권 안에 있던, 상나라의 헤게모니 아래에 있던 나라이다. 문왕은 내가 명을 받았다 라고 천명을 했다. 그러니 이제 우리도 독립적으로 주체적으로 뭘 해봐야겠다 라고 했고, 문왕이 죽은 다음에 왕이 된 무왕이 천하를 평정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무력의 업적은 무왕에게 있다 하더라도 상제는 문왕에게 천명을 수여했다는 개념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문왕이라고 하는 사람은 이상화되어서idealized 공자의 논어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다음에 공주론共主論이라고 하는 게 중요한 점인데, 천자天子는 혼자 독재를 하면 안 되고 본국의 제후諸侯들과 함께, 또는 신하臣下들과 함께 천하를 통치한다. 왜 이런 얘기가 나왔을까를 생각해 보면 신하들, 제후들이 가지고 있는 그 권력을 정당화하는 이론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혈통으로는 왕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무력을 갖고 있지도 않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정권에 가담해서 자기네들의 발언권을 강조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공주론共主論을 얘기해야 한다. 그런데 이때 강조되는 사람이 이제부터 얘기할 주공周公이다. 논어에 보면 공자가 꿈에 주공을 뵌 지가 오래되었다고 말하는데, 공자가 왜 그렇게 주공을 좋아했는가를 생각해 봐야 될 지점이 있다.  

이제 리펑 교수가 쓴 《중국고대사》에 나와 있는 내용을 정리해서 설명하려고 한다. 여러 가지 얘기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서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부분과 관련된 것만을 추려서 정리한다. 일단 주나라는 어디에서 시작이 되었는가. 이거 섬서성陝西省(산시), 중국이라고 하는 나라는 대게 북경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가 생각을 하는데, 그건 동쪽에 해당하는 것이고, 황하黃河 유역이 있으면 황하 상류 지역이 섬서 지역이다. 위하渭河 지역에서 선주先周 시기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많이 발굴되었다. 위하渭河는 황하黃河의 상류 지역이다. 이렇게 약도를 그려놨는데, 원래 주나라는 풍豊이라는 지역에 문왕文王이 있었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 문왕文王이 있다가 호鎬라는 지역, 호鎬라는 지역에다 서울 경京 자를 붙여서 호경鎬京이라고 하는데, 무왕武王 때 호경鎬京으로 옮겼다. 호경鎬京이 말하자면 서주西周의 수도였다. 그러다가 오늘날 서안西安, 즉 장안長安이라고 불리는 지역으로 옮겨갔다. 동쪽으로 옮겨간 때부터를 동주東周 시대라고 부른다. 장안長安은 당나라의 수도였는데 원래는 한나라의 수도이다. 한 나라가 장안의 수도를 잡았고 동주의 수도이기도 했고, 그러니까 장안이 황하黃河 유역에서는 중요한 도읍지였다. 그러다가 왕망王莽에 의해 신新 나라가 세워지고, 신나라를 다시 무너뜨리고 한나라를 재건한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는 장안長安을 버리고 낙양洛陽으로 수도를 옮긴다. 거기도 장안長安에 비하면 낙양洛陽이 동쪽에 있으니까 그때를 동한東漢이라고 하고 그 이전에 있던 한나라를 전한前漢 또는 서쪽에 있으니까 서한西漢으로 부른다. 그리고 당나라 다음에 송나라인데, 송나라도 역시 황하 유역에서 개봉開封에 있을 때가 북송北宋이고 북송北宋에서 남송南宋이 되면서, 남송은 말 그대로 남쪽, 장강長江 이남로 도읍이 옮겨간 곳이 남송南宋이다. 그다음에 명나라 때는 남경南京에다가 도읍을 했는데 영락제永樂帝 때 북경北京으로 도읍을 옮기게 된다. 대체로 북송北宋까지는 황하黃河 유역에서 중국 왕조들의 수도가 있었다. 그다음에 남송南宋부터 남쪽으로 갔다가 명·청 때는 북경北京으로 갔다는 정도만 기억을 해두면 될 것 같다.  

일단 주나라는 고공단보古公亶父라고 하는, 주나라 태왕周太王으로 불리기 전의 이름이 고공古公이다. 서기전 12세기 후반에 고공단보를 따라서 움직인, 역사적 이주를 통하여 주 사람들의 중심지가 웨이하 계곡의 서쪽 지역으로 바뀐 것이 분명하다. 상商나라의 영향력이 있던 지역에서 고공이라는 사람을 따라서, 고공이 주나라를 후일에 세우게 된 사람들의 말하자면 부족장쯤 되겠다. 거기가 말하자면 풍豊 지역이다. 그 고공단보의 손자인 문왕文王 시절에 두 개의 작은 정치체 사이에 영토 분쟁에 외교적으로 개입을 하게 된다. 그런데 아직은 문왕도 왕조를 세우기 전이고, 사실 무왕이 상商나라를 멸망시킨 다음에 왕조를 세웠다. 그러니까 주 무왕이 실질적으로는 주나라의 건국자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니까 그 왕조를 세우기 이전에는 고공단보의 가문은 자신의 조상뿐만 아니라 가장 최근에 죽은 상 왕들을 포함한 상나라의 선조까지도 제사를 지낸 기록이 있다. 그래서 청동기 명문銘文에 새겨진, 청동기는 이때만 해도 생활용품이 아니라 제기祭器이니까, 웨이하 유역에 지역 세력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다음에도 적어도 일정 기간 제사를 지냈으니까 상나라가 북중국의 막강한 정치적 세력이라는 현실을 인정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일단 기본적인 사실이다. 

그다음에 주周나라가 상商나라를 정복하기 전에 말하자면 하늘의 조짐이 나타났다. 서기전 1059년 5월 말에 태양계의 다섯 주요 행성, 이게 바로 오행이다, 목성, 토성, 화성, 금성, 수성이 치산岐山의 기슭 주 도성의 북서쪽 하늘에 모이게 되었다고 한다. 오성취五聖聚가 만들어졌다. 그것을 보고 문왕文王이 왕권을 선언했다. 이게 바로 앞에서 전목 교수가 얘기한 천명天命을 받았다는 것이다. 문왕文王이 공식적으로 상의 체제에서 독립해서 하늘의 명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독립했는데, 하늘의 명령을 받았다는 믿음이 바로 주 국가의 이상적 토대가 되었고, 서주 전 기간 동안에 칭송이 되었다. 문왕이 하늘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니까 서주서西周書에 나와 있는 "왕께서 명을 받으시니 이는 무궁한 경사이며" 얘기이다. 그다음에 문왕이 사망한 후에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른 무왕이 서쪽 지역 여러 부족 및 공동체와 연합해서 상商을 정복했다. 그러면 상商은 동쪽 지역에 있는 연합체를 이끌었을 것이고, 그래서 동군연합, 서군연합이 말하자면 대결을 벌여서 이게 첫 번째 정복이다. 그런데 이제 얼마 안 있어서 서기전 1043년에 무왕이 죽자 무왕의 동생인 주 궁정의 실질적 지배자가 바로 주공단周公旦이다. 이 사람이 바로 공자가 꿈에서 많이 봤다고 하는 사람이다. 왕은 아닌데 왕보다 뛰어난, 그러니까 무왕의 아들이 성왕成王인데, 성왕이 아주 어렸다는 것이 자꾸 강조가 된다. 말하자면 혈통적으로는 정통적 후계자이다. 보통의 권력을 좋아하는 사람들 같으면 주공단이 수양대군처럼 조카를 죽이고 자기가 세력을 잡으면 되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대신에 신하로서의 역할을 아주 충실히 했다. 그러니까 공자 같은 사람도 자기도 왕이 될 수 있는 혈통은 아니다. 신하로서의 역할을 최대한 하되, 가장 뛰어난 신화가 누구였을까 이렇게 본다면 주공 단이겠다. 그러니까 내가 주공의 현신이야 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런데 주공단만이 아니라 무왕이 형제가 여럿 있었는데 두 형이 동부 평원에 이전에 상商에 속했던 세력들을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키니까 3년 동안 전쟁을 벌였다. 이 부분이 아리까리한 부분이다. 전쟁을 벌였는데 좋은 말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란 세력들을 제거하는 것이 말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고 아주 잔인한 살육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니까 덕으로서 그들을 굴복시켰다는 것은 택도 없는 것이다. 적어도 무왕의 동생들이 네명이다. 반란을 일으킨 놈 두 놈과 주공, 주공의 동생인 소공召公, 죽은 무왕의 또 다른 동생인 소공석召公奭의 협력이 있었다. 그다음에 한 사람이 더 있는데 제나라 제후로 봉해진 태공太公인 강상姜尚이에요. 그래서 흔히 태공망太公望 또는 강태공姜太公이라 불리는 사람이다. 강태공이 또 공헌을 했다. 이것도 역사책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간단치는 한다. 여튼 이게 바로 두 번째 정복이다. 

여기서 전목 교수가 얘기한 천명은 무상하다는 관점은 두고두고 큰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공주론도 마찬가지인데, 이것은 정치사상사에도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치고 공자를 읽는 데도 반드시 참조해야 하는 배경지식이다. 그런데 이때 일어난 역사적 사실은 적어도 이 정도쯤은 알고 있는 게 좋겠다는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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