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중국사학명저中國史學名著(6) ─ 春秋 三傳

 

2025.08.16 δ. 중국사학명저中國史學名著(6) ─ 春秋 三傳

첸무, ⟪중국사학명저강의⟫(錢穆, 中國史學名著)
텍스트: buymeacoffee.com/booklistalk/ChienMu-03

 

춘추삼전春秋三傳,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 좌전左傳
• 춘추春秋의 위치, 왕관학王官學과 백가언百家言
 왕관학王官學(경학經學) - 조정의 아문衙門에서 생산. 귀족학
 백가언百家言(제자학諸子學) - 민간에서 생산되는 것. 평민학

 상서尙書는조정의 사관史官, 시경詩經은 악관樂官이 관할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육예락六藝略 / 제자략諸子略

─ 왕관학王官學이 사회에 전해져 평민과 개인의 학문으로 변했고 이것이 백가언百家言이 되었다. 공자의 춘추春秋는 평민이 편찬한 것. 평민의 신분으로 왕관王官의 일을 행하였다. 따라서 춘추는 왕관학과 백가언의 중간 과도기에 위치.
그러나 후일에 사람들이 춘추를 왕관학으로 존중하며 경전經典에 포함시켰다. 이로써 한서 예문지에서도 육예락에 포함되었다. 
경전經典이 되었으므로 전傳이 만들어졌다.

• 삼전三傳의 이동異同
송대宋代의 섭몽득葉夢得. "좌전은 사실(事)을 전하면서 의義를 전하지 않았고, 공양전과 곡량전은 의는 전하면서 사실은 전하지 않았다." 
송대宋代의 주희朱熹. "좌전의 사학이 사실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이치(理)가 미진하고, 공양전과 곡량전의 경학이 이치는 정교하지만 사실에 대해서는 착오가 많다." 
본래 공자의 춘추春秋는 '의리를 취한 것', 즉 대의大義를 위한 것. 따라서 사서史書로서는 좌전左傳이 탁월하지만, 의義를 취했다고 하는 본래의 취지에서 보면 공양전과 곡량전이 탁월 

• 한대漢代의 춘추
무제武帝 때는 공양전公羊傳, 선제宣帝 때는 곡량전穀梁傳을 가르치기 위해 박사관을 설치. 좌전左傳은 사학私學으로 간주.
즉 좌전左傳은 전傳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이는 사事에 충실하고 춘추의 대의大義를 해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
춘추의 대의大義를 말하고 있는 것은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과의 대립은 제학齊學과 노학魯學의 대립對立.

• 좌전左傳
체계적이고 자세한 240년의 편년사
"역사적 관점으로 말하자면 좌전의 가치는 마땅히 공자의 춘추 위에 있어야 한다."
" 적어도 좌전은 사학상 진일보한 편년사였다. 공자의 춘추는 다만 개척자였고, 좌전이 비로소 정식으로 편년사를 완성했다."

"당나라의 유지기는 사통史通에서 고대의 역사에는 두 체제가 있다고 했는데, 하나는 상서이고 다른 하나는 좌전이라고 했다. 이 책이 중국사가들에게 얼마나 중시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오늘날 이어받을 수 있는 것은 좌전가와 한서가 뿐이다."(유좌전급한서이가이이唯左傳及漢書二家而已)
상세한 서술을 중심으로 한 단대사斷代史
편년체編年體(좌구명左丘明 좌전左傳)
기전체紀傳體(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전목 선생의 중국사학명저 강의, 지난번까지는 춘추에 대해서 했다. 춘추는 공자가 썼다고 하는 책이긴 한데 사실 역사책으로서의 춘추는 이미 있었다. 그것을 놓고 여기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공자가 뭔가를 썼고, 그게 춘추인데 엄밀하게 말하면,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역사책이라기보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놓고 공자가 코멘트한 것들이다. 그러니까 지난번에 역사책이라기보다는 역사철학 책이라고 말했다. 이것을 오늘 이렇게 정리해서 구분해서 봐야 된다 라고 말하는 것은 춘추삼전春秋三傳에서 갈라지는 지점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공자가 쓴 건 춘추라는 역사책이 아니라 역사에 대해서 자신이 코멘트한 것들을 썼다. 그러니까 "공자가 춘추를 짓자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하였다." 역사적인 평가인 포폄을 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얘기이다. 사실 오늘날 역사책이라고 하면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물론 역사책이 반드시 사실을 기록하는 것에 그쳐야 하는가는 아니다. 우리는 역사책으로부터 뭔가 교훈을 원한다. 그리고 역사가가 그런 교훈적 통찰을 우리에게 제시해 줄 것을 기대하기도 한다. 그런데 실증적 역사를 논의하는 사람들은 역사가가 그렇게 하는 건 과잉이라고 말을 한다. 오늘 얘기하는 게 춘추삼전春秋三傳, 널리 알려진 게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 좌전左傳이다.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 좌전左傳이 역사책이냐 하면 꼭 그렇진 않다. 좌전左傳은 역사책이라고 분류를 할 수 있는데, 공양전公羊傳과 곡량전穀梁傳은 역사책이라고 말하기는 좀 어렵다. 왜 그러한가를 오늘 말할 것이다. 그래서 전목 선생도 춘추삼전春秋三傳을 이야기하면서 공양전公羊傳과 곡량전穀梁傳이 왜 역사책이 아닌가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있다.  

춘추春秋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 바 있다. 춘추는 일반적으로는 역사책이다. 그런데 공자가 쓴 춘추는 역사책이 아니다. 그것을 꼭 기억을 해야 된다. 그러니까 공자는 기왕에 있던 춘추라고 하는 역사책을 보고 자기가 뜻을 취했다 라는 얘기를 했다. 그러니까 공자가 쓴 춘추는 역사책이 아니라 역사철학 책이다. 먼저 중국 고대의 텍스트를 한번 보겠다. 반고班固가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서 유향의 칠략에 근거하여 왕관학王官學과 백가언百家言이라는 구별을 한다. 왕관학王官學은 경학經學이다. 그러니까 오늘날로 치면 조정의 각 부서에서 생산한 문서에 대한 학문이 왕관학이다. 그러니까 경전이經典이라고 불리는 텍스트들은 원래 조정에서 만든 문서를 말한다. 상서尙書[서경書經], 시경詩經 이런 것들이다. 중국은 왕관학王官學의 전통이 강하다. 왕관학, 왕의 관청에서 만든 텍스트들에 대한 학문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조정의 아문衙門에서 생산한 학이고, 이게 귀족학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경전經典이라고 부르고 이것을 경학經學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원래 경전經典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에서 생산한 문서를 말했고, 경전에 대한 학문을 경학經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경전經典에 대해서 주석을 달아놓은 것을 전傳이라고 했다. 이것의 차이에 대해서는 예전에 유지기의 사통史通을 하면서 말한 적이 있다. 이 구별을 잘 알아둬야 한다. 경전經典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에서 만든 문서이다. 그리고 관청에서 만든 문서인 경전經典을 연구하는 걸 경학經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경전經典에 대해서 주석을 달아놓은 것을 전傳이라고 한다. 그렇게 알아두면 되겠다. 그다음에 민간에서 생산된 것을 백가언百家言이라고 부른다. 민간의 여러 선생들을 제자諸子라고 부른다. 제자백가諸子百家는 관청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관청에서 박사관博士官을 설치하고 그 박사관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을 박사라고 했다. 제자백가諸子百家 이런 말들은 민간에서 유명한, 말하자면 라이센스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다. 민간인인데도 굉장한 학식을 쌓아 올려서 무리들을 이끌고 다니는 사람, 그래서 여러 학자와 백가, 아주 많은 수의 일가를 이루었다고 할 때의 백가百家이다. 그래서 제자백가諸子百家이다. 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텍스트는 경전이 아니다. 논어를 경전이라고 하는 것은 공자님이 거의 관학을 이끌어 나가는 교재를 만드는 정도로 수준이 됐기 때문에, 국가에서 공인을 해줬기 때문에 논어가 경전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국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구별을 해두면 되겠다. 예를 들면 상서尙書[서경書經]는 조정의 사관史官이 만든 것이고, 그다음에 시경詩經은 악관樂官이 관할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서는 육예락六藝略, 그러니까 6개의 학문이 있고, 그다음에 제자략諸子略이 있다. 제자략諸子略은 관학官學에 반대되는 의미에서의 사학私學이다. 춘추시대가 되면서 왕관학王官學이 사회에 전해지고 그러면서 평민과 개인의 학문으로 변했고 이것이 백가언百家言이 되었다. 그러니까 원류는 관학官學이다. 민간에 관학官學을 열심히 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고, 그들이 이제 관학에 버금가는 또는 관학을 뛰어넘을 만한 그런 탁월한 학문을 보여줬기 때문에 그게 제자백가諸子百家가 되었다.  

공자는 귀족이 아니라 평민이었기 때문에, 귀족이었던 사람도 있지만 일단 기본적으로는 평민이다. 평민의 신분으로 조정의 관리가 하는 일을 했다. 그래서 "춘추는 왕관학과 백가언의 중간 과도기에 위치하고 있다." 이것은 예전에 유지기의 사통史通을 얘기할 때 거론한 바가 있다. 그러나 후일의 사람들이 춘추를 왕관학으로 존중을 해서 오경五經에 포함시켰다. 그러다 보니까 앞서 얘기한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육예락六藝略에도 춘추가 포함이 된다. 다시 말해서 본래의 춘추는 그 본래의 위치에 따르면 제자의 학이다. 공자도 제자백가 중에 한 사람이다. 그런데 후일의 후세 사람들이 춘추라고 하는 것은 상서尙書에 버금가는 정도로 탁월한 역사 책이라고 생각을 했던가 아니면 본래 춘추는 역사책이라기보다는 대의를 밝힌 것이니까 이건 경학에 해당한다 라고 생각을 해서 정경에 포함을 시켰다. 다시 말해서 경전이 된 것이다. 그러면 앞서 말한 것처럼 경전經典은 전傳이 만들어진다.  

춘추에 대해서 전傳이 만들어졌는데 그 전傳이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 좌전左傳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 좌전左傳이 있는데, 본래 춘추는, 오늘 이 얘기를 여러 번 하는데, 본래 춘추는 역사책이 아니라 사람의 도리를 밝히는 책이다. 그러니까 본래 공자의 춘추는 의리를 취한 것, 즉 대의大義를 취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역사책이 아니다. 따라서 춘추가 말하는 의리가 도대체 무엇인가를 굉장히 열심히 밝히는 전傳이 있을 수 있고, 그다음에 어떤 전傳은 가만히 춘추를 읽어보니까 역사적인 서술은 좀 소홀한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공자의 춘추가 역사적인 사실은 소홀히 하고 의리를 밝혀 쓴다고 얘기를 했으니까 그렇다. 그래서 뜻밖에도 춘추가 누락시킨 역사적인 사실을 열심히 기록한 전傳이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전傳은 춘추가 내놓은 의에 대해서 그 의는 이런 것이다 라고 해석한, 그러니까 춘추의 본래의 목적은 의의를 밝히는 데 있다, 그래서 춘추 본래의 목적에 충실한 전傳이 있을 수 있고, 그다음에 춘추가 의를 너무 밝힌 나머지 역사적인 사실이 부족한 것 같다고 생각해서 역사적 사실을 보충하는 또는 춘추가 기록한 역사적 사실 기록을 뛰어넘는 것을 의도한 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춘추의 성격을 보고 그 성격에 맞춰가는 전이 있는데, 그게 바로 공양전公羊傳과 곡량전穀梁傳이다. 그러니까 의를 밝히는 데 충실한, 춘추 본래의 의도를 따라간 것이다. 그런데 의를 밝히는 데 충실하다 보니 역사가 모자란 것 같아서 역사에 충실한 전이 있는데 그게 바로 좌구명이 썼다고 알려진 좌전左傳이다. 이렇게 구별을 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공양전公羊傳과 곡량전穀梁傳이 한 부류 그다음에 좌전左傳이 한 부류, 그것에 대해서 이제 송대의 섭몽득葉夢得이라는 사람이 한 말이 있는데, "좌전은 사실(事)을 전하면서 의義를 전하지 않았고, 공양전과 곡량전은 의는 전하면서 사실은 전하지 않았다." 그와 유사하게 주희가 한 얘기가 있다. "좌전의 사학이 사실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이치(理)가 미진하고, 공양전과 곡량전의 경학이 이치는 정교하지만 사실에 대해서는 착오가 많다." 그러니까 송대의 섭몽득과 주희는 대체로 공양전과 곡량전이 공자의 본래 의도를 잘 따라갔다라는 점, 그리고 좌전은 공자의 본래 의도를 잘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역사적인 사실을 드러내는 데 충실했다 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춘추삼전春秋三傳 중에서 역사책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좌전左傳이 탁월하고, 그다음에 의의를 밝힌다, 대의를 밝힌다 라고 하는 춘추 본래의 의도에 취지에서 보면 공양전과 곡량전이 탁월하고 말할 수 있겠다. 이렇게 일단 구별을 해야 된다.  

그러면 춘추는 경전經典이 되었으니까 전傳이 만들어졌다 라고 말했는데, 그러면 공양전公羊傳과 곡량전穀梁傳을 쓴 사람들은 한나라 때 사람들인데, 그러면 이 사람들은 춘추를 역사책으로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경전經典으로 읽었던 것이다. 그래서 무제 때는 공양전을 중심으로 읽고, 선제 때는 곡량전을 중심으로 읽어서 곡량전을 가르치는 박사관이 설치되었는데, 좌전은 그냥 역사책으로 봤다. 그러니까 이때 좌전이라고 하는 텍스트는 그냥 개인이 쓴 민간의 사학 아닌가, 역사책으로 볼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닌가 라고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에는 춘추삼전春秋三傳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그 당시에는 전傳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춘추의 대의를 해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춘추의 대의를 말하고 있는 것은 공양전公羊傳과 곡량전穀梁傳이다. 그런데 여기서 공양전公羊傳과 곡량전穀梁傳은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문제가 나온다. 이것은 전목 선생도 뭐라고 얘기를 많이 하는데, 그것은 여기서 왜 생략을 했는가. 이건 역사책에 대한 텍스트이기 때문에 공양전公羊傳은 이렇고 곡량전穀梁傳은 이렇다라고 하는 것은 사상사에서 다루는 문제이다. 이것은 제가 나중에 다룰 예정이다. 공양전이 발전한 곳은 제나라이고 곡량전이 발전한 곳은 노나라이고, 그래서 제나라의 학문(제학齊學)과 노나라의 학문(노학魯學)의 대립도 있고, 그 대립이 공양전과 곡량전의 대립으로 나타나고, 이런 것들은 도대체 어떤 역사적인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들과 관련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사학명저강의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도 전목 선생도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길게 많이 하는데 그렇게 체계적이지 않다. 그래서 그 부분은 중국사상사를 다룰 때 한번 자세하게 다뤄보려고 한다. 

좌전左傳이라고 하는 것은 본격적인 역사 책이다. 예전에 유지기의 사통史通에서 "오늘날 이어받을 수 있는 것은 좌전가와 한서가 뿐이다."(유좌전급한서이가이이唯左傳及漢書二家而已)라고 했다. 상세한 서술을 중심으로 한 단대사斷代史, 이게 바로 좌전이나 한서의 특징이다. 사마천 계열의 기전체紀傳體 역사보다는 편년체編年體 역사를 유지기는 기본적으로 좋아한다. 좌구명을 좋아한다고 아예 서문에 그런 얘기를 한다. 좌전左傳이라고 하는 텍스트는 어떤 것인가. 다음 챕터인 "좌전과 국어 그리고 전국책"에서 굉장히 자세하게 얘기를 하는데, 이 챕터가 굉장히 괜찮다. 좌전은 체계적이고 자세한 240년의 편년사를 다루고 있다. 역사적 관점으로 말하자면 좌전의 가치는 마땅히 공자의 춘추 위에 있다. 그리고 좌전은 사학상 진일보한 편년사였다. 공자의 춘추는 다만 개척자였고, 좌전이 비로소 정식으로 편년사를 완성했다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다음 챕터에서 그 얘기를 한다. 그러니까 역사책으로는 좌전이 중요하고, 역사철학 책으로는 공양전이나 곡량전을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을 이어받은 게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이다. 그 점을 잘 유념해서 생각을 해 둘 필요가 있겠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