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중국사학명저中國史學名著(7) ─ 左傳
- 강의노트/책담화冊談話 2021-25
- 2025. 8. 26.
강유원의 책담화冊談話(https://booklistalk.podbean.com)에서 제공하는 「중국사학명저中國史學名著」를 듣고 정리한다.
2025.08.24 δ. 중국사학명저中國史學名著(7) ─ 左傳
첸무, ⟪중국사학명저강의⟫(錢穆, 中國史學名著)
텍스트: buymeacoffee.com/booklistalk/ChienMu-03
좌전左傳
─ 좌전에 관한, 종전의 두 가지 문제
1. 좌전이 춘추春秋를 해석[전傳]한 것인가
2. 좌전이 좌구명左丘明의 작품이 맞는가
➞ 좌전이 해석한 것은 춘추春秋의 '사실'이었지 '의義'는 아니었다. [송대宋代의 의견]
좌전의 내용과 역사적 가치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좌전이야말로 중국에서 제일 먼저 등장한 가장 상세하면서도 주도면밀한 첫 번째 편년사 ··· 오로지 역사적 가치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공자의 춘추는 아직 좌절에 많이 미치지 못한다고 하겠다. 만약 춘추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오로지 공자의 춘추만을 연구한다면 장차 우리는 이 시대를 근본적으로 분명하게 밝혀낼 수 없을 것이며, 또 밝혀낸 것이라 하더라도 매우 간단한 사실들일 뿐이다. 때문에 우리들은 반드시 좌전을 읽어야 한다."
• 좌전에서 알 수 있는 것들.
1. 천문天文 · 역법曆法
진晉 · 주周의 역법 차이. 하夏 · 상商 · 주周의 차이 등에 관한 명백한 증거들 ─ 고대 천문학 연구의 기초자료
2. 지리연혁地理沿革
1백개에서 2백 개의 제후와 12개의 제후국(國)
읍邑, 도都, 지명地名. 고대 중국의 규모
3. 씨족氏族 [행위자]
귀족봉건貴族封建의 족보族譜
4. 정치제도政治制度
각 제후국의 제도 차이.
관제官制(정부조직), 병제兵制(군사조직), 전제田制(부세제도) ─ 이후 역사에 등장하는 제도들의 연원
5. 조빙朝聘과 회맹會盟 [일종의 국제관계론]
각 제후국과 주천자周天子, 여러 제후국 사이의 일종의 예禮.
성문법成文法이 아닌 것들, 일종의 국제공법公法
6. 인물人物 [행위자]
명호名號를 훈고적으로 배합하는 방식은 춘추시대에 시작
7. 군사軍事
진晉나라와 초楚나라 사이에 큰 전쟁들. 즉 성복의 싸움, 필의 싸움, 언능의 싸움
8. 사회예속社會禮俗 [사상사의 원재로]
당시 그들의 말한 천도天道 · 귀신鬼神 · 재이災異 · 상서祥瑞 · 복서卜筮 · 몽夢
9. 식화食貨와 경제經濟, 공상업工商業
10 사예四裔, 즉 만이蠻夷와 융적戎狄
─ 좌전에 근거한 표준적인 관점
• 중국고대사 연구를 위해서는 오제五帝, 요순堯舜, 하夏 · 상商 · 주周를 알아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좌전의 기록이 상세하다.
• 좌전을 통해 중국고대사회의 성격을 알 수 있다.
봉건사회封建社會[Feudalism]가 아닌 "봉건정치封建政治"가 있었다는 것
• 사사四史(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를 읽는 기준은 좌전
─ 보유補遺
서주西周의 봉건체제, 정치체제는 기존에는 Feudalism의 틀 안에서 해석되었다.
• 봉신封臣과 주왕周王의 계약에 따른 의무로써 느슨하게 결속한 원형原形 독립 정치체의 복합군
• 주왕실정부周王室政府는 왕의 개인적 고용인에 불과한 세습 관리, 왕王은 자신의 영역을 넘어서면 권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된다.
주周의 봉건封建
• 지역적 요소를 가지면서도 왕王과 왕실王室 관리에 의해 상당한 수준으로 작동된 국가 구조. 독립왕국이 아니라 서주 국가의 정치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 지역 국가인 봉국封國을 세우는 것에 관한 명문銘文, 의후측궤宜侯夨簋. "왕은 의후측宜侯夨에게 책령을 내렸다. 의宜로 옮겨가 통치하라." 봉국은 주의 도읍 방어 목적으로 지역 정치체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왕으로부터 받았다. 왕의 소유였거나 국가 재산이었던 사람까지 받았다.
• 주왕周王과 지역 통치자 사이에는 혈통관계. 봉건 관행을 통해 주가문은 실질적으로 중국 동부 전체에 걸쳐 같은 혈연에서 갈라진 세력 건립.
• 봉국의 위치는 무작위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이전에 상商의 본거지, 즉 잠재적으로 위협이 되는 장소이면서 중국 동부의 주요 교통로 지점에 건설됨으로써 주 왕국 방어에 효과적인 연계망들을 건설
• 주의 영토領土로 인식이 되는 지역의 모든 인구에 대한 행정 권한을 해당 지역의 대리인에게 위임하는 방식
•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주왕周王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왕王과 지역 통치자 사이의 연대가 약화. 동시에 지역 통치자는 자신의 뿌리를 각자의 지역사회에 깊게 내리면서, 필연적으로 서주 국가를 약화시키게 되었다. ─ 동주시대東周時代의 지역적 문화의 뿌리
• 좌전左傳 희공僖公 24년
"옛날에 주공이 관숙과 채숙의 현명하지 못함을 슬퍼하여, 친척을 제후국에 봉하여 주나라 왕실을 병품처럼 호위하게 했습니다." (석주공제이숙지불함昔周公弟二叔之不咸 고봉건친척故封親戚 이번병주以蕃屏周)
봉封: 제후에게 통치할 강역을 구획하여 정함. 흑을 쌓는다.
• 봉방건국封邦建國
주공周公이 정치를 보좌하던 시기에 가장 불안정했던 곳은 산동지역이었으므로 주공 자신의 노나라와 여상의 제나라가 모두 그것에 있었다. 소공석召公奭의 연燕나라도 지금의 북경北京 근방에 있었다.
• 청동기 장식도안. 주 왕조의 중심도시의 것과 봉국들의 지배층 문화의 유사성. 긴밀한 통교의 증거. 그러나 서주 후기가 되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위하渭河 지역의 형식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으며, 지역 자체의 토기(실용성 높은 지역의 물질문화)를 모방한 새로운 형식의 청동 그릇을 만든다.
• 주초기周初期에 남동지역, 즉 장강長江 삼각주와의 관계는 논쟁거리. 태호太湖 주변 장강 삼각지와 정치적으로 접촉했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다. 이 지역은 후에 오吳의 핵심 지역으로 등장하는데 전승된 역사 기술에 따르면 그 왕실의 조상은 주 왕실에 연결된다. 그러나 이는 주 나라의 이상이 지배적인 서기전 5세기 초에 오吳가 자신의 패권을 합리화하기 위해 억지로 연결시킨 것으로 보인다.
지난번에는 춘추 삼전春秋 三傳에 대해서 얘기했다. 춘추 삼전春秋 三傳은 좌구명左丘明의 좌전左傳 그리고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이다. 그런데 그중에서 역사책이라고 하면 좌전이다. 예전에 유지기의 사통史通을 할 때도 좌전이 가장 좋은 역사책이라는 얘기를 한다. 유지기는 역사 서술의 구체적인 방법이나 표현 이런 것들을 집중적으로 이야기했지만 그래도 좌전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아주 분명했다. 특히 사통史通 초반부에 육가六家, 6개의 갈래라고 해도 오늘날의 역사책을 생각하는 기준에 따르면 6개는 지나치게 많고 대체로 보면 편년체編年體 역사와 기전체紀傳體 역사, 중국 역사는 이렇게 둘로 나뉜다. 육가六家에서 세 번째가 좌전가라고 했다. "기원은 좌구명左丘明. 춘추의 경徑을 이어 전傳을 만들었다." 유지기는 좌구명의 좌전을 전傳으로 봤다. 이게 사실은 좌전에 관한 두 가지 문제 중에 하나이다. 전목 선생은 이 두 가지에 대해서 얘기를 했는데, 오늘날에는 이것을 가지고 그다지 많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을 한다. 중국사를 전공하신 분들에게 굉장히 중요하겠지만 우리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경문의 뜻을 옮겨 받아 뒷사람에게 전해주는 것"이 전傳이다. 전수경지轉受經㫖 이수후인以授後人, "경문의 뜻을 옮겨 받아"라고 할 때 이 뜻이라고 하는 것은, 경전이 가지고 있는 것이 뜻이다. 그러니까 좌전은 전인가 아닌가를 가지고 논란이 되는데 좌전이 춘추를 해석한 것인가, 해석을 하려면 춘추가 경이어야 하는 것인데 춘추는 이미 경이 되었다. 경이라고 하는 것은, 거기에 담겨 있는 뜻을 중시하는 것이 경이다. 뜻을 보고서 그것을 경으로 삼는다. 여기서 뜻이라고 하면 보편타당한 진리, 언제 어디서나 적용되는 진리라 여겨지는 것을 담고 있는 것을 경이라고 말한다. 춘추는 이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춘추는 그게 맞다. 춘추에는 사건historical event, 그러니까 historical fact는 적고 그것에 대한 공자의 코멘트는 많다. 그러면 그건 경이다. 경에 있는 뜻을 해석해내면 그게 전이다. 그런데 좌구명의 좌씨전은 공자가 놓쳐버린 사실들을 더 많이 기록을 했기 때문에 공자의 뜻을 해석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게 송나라 때의 의견이다. 유지기가 코멘트 했던 것은 말은 "좌전에서 춘추의 경문을 해석한 것을 보면, 말은 경문에 나오지만 사건은 전에 상세하며, 전에는 없어도 경에 있는 것도 있고, 경에 누락된 것이라도 전에 남은 것이 있다."" 유지기는 당나라 때 사람이고 송나라는 당나라 다음 시대이니까 송나라 시대의 의견을 가지고 당나라 때 의견을 뭐라고 하는 건 좀 그렇다. 그런데 거기보면 "사실은 상세하고 넓으니, 실제로 성인의 보좌라 할 만하며, 으뜸가는 역사서라고 하겠다." 이제 좌구명의 평가이다. 좌구명의 평가를 여기서 새삼 가지고 오는 것은 당나라 때에 있어서나 송나라 때에 있어서나 굉장히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는 의미에서 지금 들춰봤다.
그러면 좌전左傳에 관해서는 두 가지 논란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춘추를 해석한 것인가 이것인데, 춘추를 해석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그냥 이름이 좌구명의 좌전이라고 붙었기 때문에 전傳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해석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다음에 좌전은 좌구명의 작품이 맞는가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은 좌구명의 작품이든 아니든, 조금 뒤에 말할 것인데, 그게 좌구명의 작품이든 아니든 간에 굉장히 훌륭한 역사서인 건 틀림없다고 볼 수 있다. 좌전의 내용과 역사적 가치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전목 선생의 평을 묶어서 보면 "좌전이야말로 중국에서 제일 먼저 등장한 가장 상세하면서도 주도면밀한 첫 번째 편년사"이다. "오로지 역사적 가치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공자의 춘추는 아직 좌절에 많이 미치지 못한다." 여기서 역사적 가치라고 말하는 것은 역사 책으로서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사상사의 측면에서 보면 춘추가 가치 있고 순수하게 중국 고대사의 측면에서 본다면은 좌전이 더 가치가 있다. 중국 고대사 연구자는 그러므로 반드시 좌전을 열심히 읽어야 된다. 그러니까 전목 선생도 이렇게 분명하게 얘기를 한다. "춘추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오로지 공자의 춘추만을 연구한다면 장차 우리는 이 시대를 근본적으로 분명하게 밝혀낼 수 없을 것이며, 또 밝혀낸 것이라 하더라도 매우 간단한 사실들일 뿐이다. 때문에 우리들은 반드시 좌전을 읽어야 한다." 그러니까 춘추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공자의 춘추만을 연구한다면 분명하게 밝혀낼 수 없다. 좌전이라고 하는 텍스트가 역사책으로서는 두말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가 없다 라는 것을 알고, 그러면 도대체 역사책으로서의 좌전이라고 하면 좌전이 어떤 측면에서 역사책으로서 훌륭한가. 지금 봐도 훌륭한 지점들이 꽤 많이 있다. 역사책을 판단하는 기준이라는 게 있을 수 있다. 역사책을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면 이러이러해서 좋은 역사책을 골라낼 때는 요러요러한 것을 갖추고 있는가 이것을 살펴봐야 한다 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게 되면 그런 기준들이 좌전이 그런 기준들을 과연 충족시키고 있는가를 본다면 분명히 그렇다는 것이다. 이번에 전목 선생의 좌전에 대한 해설을 읽어보니까 정말 굉장한 역사책이다.
일단 크게 보면 좌전에서 알 수 있는 것들이라고 해서 전목 선생이 항목을 나누는 게 10가지이다. 이를 다시 재분류해서 보면 먼저 천문天文과 역법曆法에 대해서 얘기를 한다. 진晉나라나 주周나라는 역법의 차이가 있었고 하夏 · 상商 · 주周의 역법의 차이도 있었다. 고대 사회에서는 역법을 만든다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주권자로서의 또는 자신이 제왕으로서의 권위를 드러내 보이는 일종의 통치 행위 중에 하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역법을 만드는 것은 그 나라의 근본을 세우는 것 중에 하나였다고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진나라, 주나라,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의 역법이 다 다르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달랐는가에 대한 증거들이 좌전에 있다. 그러면 일단 고대 천문학 연구의 기초 자료가 된다. 역법부터 시작을 해서 뭔가를 해 나가는 것이다. 그다음에 지리와 연혁은 공간에 관한 것이다. 주나라에는 1백개에서 2백개 정도의 제후와 12개의 제후국이 있었는데, 국國이라고 하는 것, 그다음에 국보다는 조금 작은 단위인 도都, 그다음에 마을이라고 할 수 있는 읍邑, 그다음에 지명地名 이런 것들을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고대 중국의 규모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적어도 황하 유역에 있던 제후국들의 위치나 관계 이런 것들을 알 수 있는 기초 자료가 된다. 주나라의 강토가 거기까지 간 건 아니니까 장강長江까지는 아니다. 그러면 천문과 지리를 둘을 묶으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geographical perspective, 즉 지리적인 전망들을 갖출 수 있게 해준다. 우리가 대한민국의 역사를 얘기할 때 한반도는 어떻게 생겼고 한반도의 기후는 어떻고 이런 얘기부터 한다. 《옥스퍼드 세계사》를 읽을 때도 그러했다. 기후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서 사람들이 그것에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가부터 다루게 된다는 얘기이다. 그다음에 세 번째는 씨족氏族이 있다. 귀족 봉건시대니까 씨족이 어떻게 되었는가, 누구는 누구의 자식이고, 누구의 아들을 어디에 제후로 봉했다. 그다음에 여섯 번째 항목을 전목 선생이 얘기한 것을 보면 인물人物이다. 그러니까 씨족과 인물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행위자, 오늘날로 치면 정치가, 예전에는 왕 이런 사람들이겠다. 그러면 씨족과 인물을 보면 명호名號를 훈고적으로 배합하는 방식이 춘추시대에 시작되었다. 제갈공명이라 하면 제갈은 성이고 공명은 자이다. 사람의 이름이 있고 자字가 있고 호號가 있다. 호는 여러 개가 있고 자는 어렸을 때 이름이니까, 이름을 잘 안 부르려고 노력을 했다. 그러니까 여기 씨족하고 인물은 행위자들에 관한 얘기겠다. 그러니까 역사 속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떤 행위를 했는가 이런 것이 중요하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자연사하고 다른 게, 인간이 어떤 행위를 했는가 이런 것에 관한 부분이니까, 행위자에 관한 얘기가 들어가겠다.
명호名號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면, 예를 들면 우리가 주자학朱子學이라고 부르는 게 주희朱熹를 선생으로서 높여 부를 때 주자朱子라고 한다. 이 시기에 학문을 송명이학宋明理學, 송나라와 명나라 두 왕조에 걸쳐서 뭔가 되었다 그래서 이학이라고 한다. 또는 도학道學이라고도 한다. 북송도학사北宋道學史라는 책들도 있고, 도가의 학문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송명이학, 이학이라고 그러기도 하고 도학이라고 그러기도 하고 공자의 유학을 개수하고 새롭게 탄생시켰다고 해서 신유학新儒學이라고 하기도 한다. 서양 사람들은 Neo-Confucianism이라고 신유학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 같다. 이것의 출발점은 정호程顥, 정이程頤이다. 둘이 형제인데 형이 정호이고 동생이 정이이다. 그래서 형인 정호程顥의 아호는 명도明道이고 동생인 정이程頤의 아호는 이천伊川이다. 형의 자는 백순伯淳이고 동생인 정이의 자는 정숙正叔이다. 그것을 이어받은 사람이 육구연陸九淵, 육구연의 아호가 상산象山, 자는 자정子靜, 그다음에 주희朱熹는 자가 회암晦庵, 아호가 고정考亭인데, 주희에 대해서는 주고정이라는 말은 잘 쓰고 주회암이라고 하거나 주자라고 한다. 육구연에 대해서도 육상산, 상산 육구연이라고 말하지 육자정이라고 잘 안한다. 그래서 육구연陸九淵과 왕양명王陽明이 양명학을 개창하고 발전시킨 사람들인데, 왕양명王陽明에서 아호가 수인守仁, 왕수인이라는 말을 쓴다. 도대체 어떤 경우에는 아호로 불러주고 어떤 경우에는 자가 주로 쓰이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자도 쓰고 아호도 쓰고 하는 것, 명호를 훈고적으로 배합하는 방식은 춘추시대에 시작되었는데 이제 좌전에 잘 나와 있다. 우리가 송명이학宋明理學이라고도 하는데 성리학性理學이라고도 한다. 성리학性理學이라고 하는 말은 정이천程伊川이 표방한 성이 곧 리다, 인간의 본성이 곧 하늘의 이치다, 성즉리性卽理라고 말에서 나왔다.
그다음에 네 번째는 정치제도政治制度이다. 정치제도라고 하는 것은 역사책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룬다. 그다음에 조빙朝聘과 회맹會盟, 각 제후국과 각 제후국과 주천자周天子, 그다음에 여러 제후국 사이에 일종의 교류를 묘사하고 서술한 예禮가 있고 성문법成文法이 아닌 것들, 일종의 국제공법公法에 해당하는 것을 다루고 있다. 정치제도는 역사책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야 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조빙朝聘과 회맹會盟이라고 하는 것은 국제관계론이다. 그런데 주나라의 국제 관계라고 하는 게 제후국과 천자의 관계이기 때문에 하나의 독립적인 개체처럼 보이지만 주나라의 제후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완전한 독립적 개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늘 이제 보충 설명에다가 넣어놓긴 했는데, 서주의 정치제도가 아니라 정치체제라고 했다. 그러니까 political regime이다. 정치제도는 일단 관제官制(정부조직), 병제兵制(군사조직), 전제田制(부세제도, 조세제도)에 관한 것이 있다. 그런 것들이 이제 정치 제도이다. 조세제도는 사회적 제도인데 국가에서 시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 제도, 그리고 조빙朝聘과 회맹會盟은 국제 관계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주천자周天子와 천자가 봉한 여러 제후국 사이에 일종의 예라든가 어떤 관행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다루고 있다. 이게 일종의 국제 관계론이다. 왜 '일종의'라고 하는가 하면 엄밀하게 독립적인 주권을 가진 국가들끼리의 관계가 아니라 제후로서 봉해진 제후국과 천자의 관계,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국제관계론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이건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2번의 지리연혁地理沿革과 5번의 조빙朝聘과 회맹會盟은 서로 관계가 있다.
그다음에 일곱 번째가 군사軍事,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큰 전쟁들 즉 성복의 싸움, 필의 싸움, 언능의 싸움, 그다음에 또 관심 있는 것은 사회예속社會禮俗이다. 사회예속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사회사이다. 그러니까 주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얘기이다. 천도天道 · 귀신鬼神 · 재이災異 · 상서祥瑞 · 복서卜筮 · 몽夢 이런 것들이다. 이런 것들이 사상사하고도 연결이 되는 지점이 있다. 사상사의 원재료라고 할 수 있다. 그다음에 식화食貨와 경제經濟, 공상업工商業, 이런 건 오늘날에는 통틀어서 결제라고 얘기한다. 경제라는 말이 중국에서 계속 나온 말이니까,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준말이 경제經濟인데, 사실 오늘날에는 경제가 가장 넓은 의미에서 그 영역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이지만 경제는 오히려 political economy, 그러니까 정치적인 영역에서 개입해 들어가는 부분만을 가리켰다. 사람들이 뭘 먹고 살고 이런 것에 관해서는 경제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식화食貨에 관한 것이다. 먹는 것 하고 화貨는 재물 할 때 화貨자이니까 식화 경제 공상업 그리고 범위가 훨씬 넓다. 식화食貨와 경제經濟, 공상업工商業, 먹고 사는 것, 재물에 관한 것 그다음에 그것을 어떻게 규율할 것인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공업이나 상업도 관에서 통제하는 것이니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업들은 무엇인가, 일들은 무엇인가. 그래서 넓은 범위에서 좁은 범위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식화라고 하는 것이 가장 넓은 범위이다. 오늘날은 이것을 다 묶어서 경제라고 얘기하는데 경제라고 하는 것은 예전에는 좁은 범위의 것만을 가르켰다. 그다음에 사예裔, 즉 만이蠻夷와 융적戎狄, 만이蠻夷는 남만南蠻, 동이東夷, 융적戎狄은 서융西戎, 북적北狄, 중국 외부에 있는 오랑캐이라는 뜻으로, 오랑캐라고 하는 것이 문화 수준이 낮다라는 뜻으로 썼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뜻으로 쓰기보다는 그냥 이것이야말로 이제 국제관계론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런 것이야말로 사예四裔라고 하는데, 예裔라고 하는 것도 오랑캐이다.
이렇게 보면 좌전은 역사책이 갖춰야 될 거의 모든 것들을 다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로 괜찮은 역사책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전목 선생은 좌전에 근거해서 중국고대사 연구를 위해서는 삼황三皇, 오제五帝, 요순堯舜, 하夏 · 상商 · 주周를 알아야 하는데, 삼황三皇은 전설의 시대이니 아니고, 오제五帝는 알아야 한다. 요순堯舜, 하夏 · 상商 · 주周 시대를 알아야 되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좌전의 기록이 상세하다. 그다음에 좌전을 통해서 중국고대사회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고대사회의 성격이라고 하는 게 앞서 여러 차례 강조해서 말한 정치제도, 특히 조빙朝聘과 회맹會盟 그리고 사회예속社會禮俗, 그다음에 어떤 행위들을 했는데 칭찬을 들었다든가 이런 것들이 좌전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국고대사회의 성격이라고 하는 건 봉건 사회가 아닌 봉건정치가 있었다고 서술을 해놓았다. 중국고대사회, 특히 주나라는 봉건제 국가였다고 말을 하는데 그건 사실 Feudalism이라는 말이 봉건이라는 말로 번역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조금 이따 바로 말하겠다. 봉건제 국가였다고 말하면 그것은 서양 중세 봉건사회Feudalism와 주나라가 봉건제 국가였다 라고 하는 것이 겹친다. 그런데 서양 중세의 사회를 가리킬 때 봉건사회라고 한다. Feudalism이라는 단어의 번역어를 봉건사회라는 말로 쓴다. 그런데 그것과 중국 고대 주나라의 사회가 봉건국가였다 라고 하면 같은 봉건이라는 단어를 쓰니까 비슷한 성격의 사회처럼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아니다.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여기서 구별을 해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다음에 중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사사四史를 공부한다고 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반고의 한서漢書, 범엽의 후한서後漢書, 진수의 삼국지三國志를 공부한다고 한다. 이것의 기준이 좌전이다. 그리고 중국 역대의 역사를 다 모아놓은 24사 역시 좌전에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까 좌전이 출발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면 이제 방금 전에 말한 봉건사회라고 하는 말을 용어를 명료하게 구별해서 말하려고 한다. 봉건정치가 있었다 라고 하는 것은 이제 전목 선생의 표현이다. 저는 이것을 political regime으로 본다. 그러니까 봉건정치, 봉건사회 이런 말보다도 봉건체제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다. 서주의 정치체제는 봉건체제였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다. 그러면 봉건이라고 하는 단어는, 서양의 Feudalism의 어원이 어디에서 왔는가. 아주 많이 거슬러 올라가도 로마 라티움어이다. 로마보다도 주나라의 좌전이라고 하는 게 훨씬 더 예전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봉건이라고 하는 말은 1차 근원지가 이쪽이다. 청동기 명문에도 나오니까 이쪽이다. 그러면 우리는 앞으로 주나라의 정치체제political regime을 가리킬 때는 봉건체제, 봉건정치라는 말을 쓸 수 있겠다. 봉건사회라고 하는 말은 쓰기가 곤란하다. 서양 중세 교회사 이런 것을 가리킬 때도 봉건사회였다라는 말은, 마르크 블로크의 《봉건사회》라는 책이 있다. 그 말을 우리가 봉건이라는 단어를 가져다가 번역을 하면서 쓰이게 되었다. 그거보다는 서양의 장원제를 봐도 굉장히 다르다. 그러니까 봉건이라고 하는 말의 원작자가 중국 고대이니까 중국 고대 주나라를 가리킬 때는 봉건체제라는 말을 쓰는 것이 좋다. 서주의 정치체제, 즉 정치체제로서의 봉건체제라는 말을 쓰자. 그러면 서양 중세의 봉건체제, 봉건사회를 가리킬 때는 원어로 Feudalism이라고 쓰겠다. 번역어가 마땅하게 없다. 그리고 서양에서도 과연 Feudalism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정확한 규정이 안 나오고 있다. 그러니까 유럽 일부 지역에서 중세라고 불리는 시기에 공통적으로 나타났던 어떤 사회 조직, 정치 조직이라기보다는 사회 조직, 그런 현상들에 대해서는 Feudalism이라고 하고, 봉건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봉건적 사고 방식이라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이고, historical fact를 지칭하는 말로서의 봉건이라고 하는 말은 서주의 정치 체제로서의 봉건체제를 말한다.
기존에는 서주의 봉건체제를 Feudalism의 틀 안에서 해석을 해 왔다. 그런데 그게 잘못됐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Feudalism도 봉건이라고 번역을 하고 서주의 봉건체제도 봉건이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다. 어느 정도 역사 전공자들 사이에 약정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서양 중세의 Feudalism의 번역어가 봉건이라고 해서 서주의 봉건체제와 같은 내용을 갖고 있다 라고 말하면 곤란하다. 만약에 그렇게 하게 되면 봉신封臣과 주왕周王의 계약에 따른 의무로써 느슨하게 결속한 원형原形 독립 정치체의 복합군으로 이해를 하게 될 가능성이 있는데 이것은 아니다. 이것은 유럽의 Feudalism이다. 유럽에서는 봉신과 왕이 쌍무계약을 맺는다. 내가 이런 것을 줄 테니까 그 대신에 너는 군대를 가지고 와서 도움을 줘야 해 하는 그런 결속체가 바로 서양의 Feudalism인데 주나라 왕실과 제후의 관계는 그런 게 아니었다. 만약에 서양의 Feudalism 방식으로 해석을 하게 되면 주왕실정부周王室政府는 왕의 개인적 고용인에 불과한 세습 관리가 된다. 그 앞에서 좌전左傳에서 알 수 있는 것들의 다섯 번째 항목에서 조빙朝聘과 회맹會盟을 말했는데 사실 조빙이라고 하는 것은 춘추시대에도 있었다. 회맹은 전국시대 동주로 넘어가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데, 여러 제후국 사이의 예禮가 조빙이다. 제후국들에서 천자에게 조빙을 왔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것은 의무 관계가 아니다. 속된 말로 싸가지 있게 행동해야 되는 것이고, 혈연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주의 봉건은 도대체 무엇인가. 유럽 중세의 일부 Feudalism적인 방식은 아니다. 지역적 요소를 가지면서도 왕王과 왕실王室 관리에 의해 상당한 수준으로 작동된 국가 구조, 그러니까 제후국들은 독립왕국이 아니라 서주 국가의 정치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예禮라는 것을 통해서 한다. 성문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게 청동기 명문에 나온다. 지역 국가인 봉국封國을 세우는 것에 관한 명문銘文인 의후측궤宜侯夨簋라는 것에서 나온다. 거기 보면 왕은 의후측宜侯夨에게 책령을 내린다. 왕은 누구냐 하면 주나라 왕이다. 너는 의宜의 땅으로 옮겨가서 통치해라. 그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 이것도 줄 테니까 가지고 가라. 이것도 줄 테니 가지고 가라 이렇게 한다. 그러니까 봉국封國은 주의 도읍 방어 목적으로 지역 정치체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왕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주나라는 상나라를 정벌하고 세워진 나라이다. 그러니까 상나라의 여러 잔존 세력들이 발호할 위험이 있었다. 그러면 황하를 따라서 주요한 교통의 요충지들에 군대를 주둔시킬 필요가 있다. 그런데 군대만 주둔시키면 안 되고 거기에다가 경계를 세우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Feudalism과는 구별이 되는 것이다. 핵심적으로는 주왕周王과 지역 통치자 사이에는 혈통관계가 있었다. 그러면 가부장제가 된다. 봉건적 관행을 통해서 주 가문은 실질적으로 중국 동부 전체에 걸쳐 같은 혈연에서 갈라진 세력을 건립했다. 유럽 중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어떤 그런 현상이다. 혈연이 아니다. 물론 정략적으로 결혼을 하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애초에 왕의 아들을 거기다 보낸다든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리고 측夨에게 책령을 내리면서 보냈는데 그냥 아무 데나 가봐 하는 무작위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이전에 상나라에서 중요하게 여겼던 곳에다가 봉한 것이다. 잠재적으로 위협이 되는 장소이면서 중국 동부의 주요 교통로 지점에 건설됨으로써 주 왕국 방어에 효과적인 연계망들을 건설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실 이제 주의 영토領土로 인식이 되는 것이다. 지역의 모든 인구에 대한 행정 권한을 해당 지역의 대리인에게 위임하는 방식이다.
일단 이렇게 시작을 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주 왕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게 되고 몇 대를 내려가게 되면 지역 통치자의 혈통이 주왕으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왕과 지역 통치자 사이의 연대가 약화된다. 그다음에 동시에 지역 통치자들이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그 지역 사회에 자신의 뿌리를 깊게 내리면서 이제 조빙朝聘을 소홀하게 하게 된다. 오히려 이웃에 있는 제후국과 사이를 좋게 지내야 되겠다 라는 것이 된다. 즉 회맹會盟을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이제 동주시대東周時代의 지역적 문화의 뿌리가 된다. 그러면 그림을 하나 그렸는데, 황하黃河가 있고, 주나라가 있고 호경鎬京이 있다. 호鎬가 종주從周이다. 거기가 주나라의 수도인데, 거기서부터 황하가 흐른다. 진나라 그다음에 위나라, 형나라, 연나라, 연나라가 있는 곳이 오늘날 북경北京이다. 그래서 예전에 청나라 때는 연경燕京이라고 했다. 보면 제齊나라와 노魯나라는 멀리 떨어진 곳이고, 송宋나라는 상商나라의 귀족들이 이쪽으로 많이 몰려갔다.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까 이 지역은 불안정해서 반란을 일으키는 놈들이 많았다. 그러니까 주공周公이 자신이 노魯나라의 제후가 된다. 주공은 중앙 정치하느라 바쁘니까 주공의 아들이 제후로 봉해진다. 그래서 공자님이 노나라 사람이고 그러니까 주공을 꿈에 봤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다음에 태공太公 여상呂尙을 제齊나라로 보냈다. 그래서 제나라와 노나라가 산둥반도에 멀리 있으니까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고, 이게 바로 봉국封國을 만들어내는 원리가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먼 북쪽에 주공의 동생인 소공석召公奭, 연燕나라도 북경 근방에 있었는데, 멀리 있다고 해서 미운 놈이 아니라 외부의 방벽을 든든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다음에 좌전左傳에서 인용문을 보면 희공僖公 24년에 "옛날에 주공이 관숙과 채숙의 현명하지 못함을 슬퍼하여", 주공의 형제들인데 반란을 일으킨다, "친척을 제후국에 봉하여 주나라 왕실을 병품처럼 호위하게 했습니다." 중요한 표현이다. 고봉건친척故封親戚, 봉封은 제후에게 통치할 강역을 구획하기 위해서 흙을 쌓는 것을 말한다. 흙을 쌓아 경계를 지어 나라를 세우는 것이 봉封이다. 사실은 봉건이라고 하는 게 봉방건국封邦建國의 준말이다. 그것으로써 이번병주以蕃屏周, 주나라 왕실을 병풍처럼 호위하게 했다. 봉건이라고 하는 것은 이번병주以蕃屏周가 목적이다. 좌전左傳 희공僖公 24년에 나와 있는 이 내용이 바로 봉건이라고 하는 말의 original meaning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그다음에 동주시대의 지역적 문화의 뿌리를 앞서서 말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 통치자의 혈통이 멀어지고 자연스럽게 봉을 받은 국가에 사는 통치자들이 그 지역의 문화와 엮이게 되고, 이런 과정 속에서 동주시대가 되는데 동주시대의 지역적 문화의 뿌리를 알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청동기에 들어가 있는 장식도안들이다. 주 왕조의 중심 도시에서 출토되는 청동기와 봉국에서 출토되는 청동기의 장식도안이 초창기에는 비슷하다. 교류가 잦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겠다. 긴밀하게 서로 왔다 갔다 했다, 긴밀한 통교의 증거라고 할 수 있겠는데, 서주 후기가 되면서부터는 위하 지역에서 통용된, 위하渭河라고 하는 것이 종주從周 호경鎬京 지역이다, 형식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그래서 그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던 토기를 모방한 새로운 형식의 청동 그릇을 만들게 된다. 그러니까 이런 청동기 장식이라고 하는 것이 문화 교류의 증거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그것을 통해서 주나라 중심지와 외곽 지역의 관계가 얼마나 멀어졌는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그래서 실용성 높은 지역의 물질 문화가 중요한 포인트이다. 전국 시대에 오게 되면 중국 문화의 실용성이라고 하는 것이 두드러지게 보이는데 바로 그것이 중국 문화가 가지고 있는, 지극히 사적인 생각인데 중국은 이때부터 토착 문화가 가지고 있는 어떤 그런 것들에 대한 선호가 생기지 않았나 한다. 비록 중국은 항상 통일 왕조를 목표로 하고는 있지만 토착 문화의 강인한 지속성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문제는 중국 고대사에서 보면 주나라 초기에 남동 지역, 즉 장강長江 삼각주와의 관계는 논쟁거리인데, 태호太湖 주변 장강 삼각지와 정치적으로 접촉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 양자강이라고 불리는 지역으로, 양자강扬子江이라는 말보다 장강長江이라는 표현이 더 일관성 있고 좋다고 본다. 원래는 하河라는 글자하고 강江이라는 글자가 보통명사가 아니라 황하黃河를 가리키는 말이 하河이고, 장강長江을 가리키는 말이 강江이었다. 중국에서 장강 이남으로 정치적으로 옮겨온 것은 당나라 다음에 북송北宋이다. 북송北宋의 도읍은 개봉開封인데, 이렇게 내려오면서 명明나라 때 남경南京), 영락제 때 북경北京으로 옮겨가고 했다. 그러니까 송나라 때 와서야 장강 지역이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곳이 되었다. 오吳나라는 서기전 5세기 힘을 이렇게 내세우고 있는데 주나라 왕실과 억지로 연결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게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통설이다. 이제 이어지는 주제가 주나라 왕조의 관료제와 사회 제도, 좌전에 나온 것처럼 정치 제도, 네 번째 항목이다.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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