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중국사학명저中國史學名著(10) ─ 史記

 

2025.09.13 δ. 중국사학명저中國史學名著(10) ─ 史記

첸무, ⟪중국사학명저강의⟫(錢穆, 中國史學名著)
텍스트: buymeacoffee.com/booklistalk/ChienMu-05

 

사기史記
• 사마천司馬遷은 '정사正史' 분류分類의 창시자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의 분류分類
       육예락六藝略: 역易, 서書, 시詩, 예禮, 악樂, 춘추春秋, 논어論語, 효경孝經, 소학小學
       제자략諸子略                                                ┃
       사부략辭賦略(시부략詩賦略)                   사기史記
 경학에 포함되어 독립적인 학문으로 인정받지 못한 상황

• 열전列傳. 인문을 중심으로 한 서술. 역사는 사事를 기록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물 중심의 역사는 부차적인 것일 수 있으나 "구체적인 사실에서 특별히 드러낼 것이 없으면서도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 된 경우가 매우 많다." ─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 

•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저술의 의의를 밝힌 글. 이것 역시 새로운 체재.  이 자서自序를 읽음으로써 '사기史記'라는 저작이 어떻게 성립하였는지, 저작의 의의는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 사마천司馬遷의 조상은 대대로 주周의 역사를 관장하는 사람. 부친 사마담司馬談 "천관天官은 당도唐都, 역易은 양하楊何, 도론道論은 황자黃子에게서 각각 배웠다." (학천관어당도學天官於唐都 수역어양하受易於楊何 습도론어황자習道論於黃子) 

• '여섯 학파의 핵심 주장을 설명함' [논육가요지論六家要旨] 
 (음양가陰陽家, 유가儒家, 묵가墨家, 법가法家, 명가名家, 도가道家)
 "최후의 결론에서 도가에 탐복했다. 그는 한나라에서 태사령太史令을 맡아 있으면서 경학뿐만 아니라 제자학에도 능통했지만, 그가 존중한 것은 황로黃老였다." 
 
 도가사인정신전일道家使人精神專一 동합무형動合無形 섬족만물贍足萬物 ··· 지약이이조指約而易操 사소이공다事少而功多
 ("도가는 사람의 정신을 하나로 모으고 움직임을 형체 없는 것에 합치시키며 만물을 넉넉하게 충족시킨다. ··· 요지는 간략하지만 파악하기가 쉽고 하는 일은 적어도 그 효과는 많다.) 

• 사마담의 말들
"천하가 주공을 칭송하는 것은 그가 능히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덕을 칭찬하고. 주공과 소공의 작품을 선양하며, 태왕太王과 왕계王季의 사례에 통달하게 하여서 마침내는 공류公劉의 공적에까지 이름으로써 결국은 후직后稷을 추존했기 때문이다." 
 ─ 주공周公이 존경받는 것은 사학史學을 선양하는 데 공헌했기 때문이다. 
"이제 한漢이 일어나 천하가 통일되었으나, 나는 태사로서 현명한 군주와 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의 행적을 기록하지 않았으니 천하의 역사적인 문장이 폐기될까 심히 두렵다." (폐천하지사문廢天下之史文 여심구언余甚懼焉) 
 ─ 사마천이 사기를 지은 것은 사마담의 이러한 두려움을 알고 있었고, 그에 남긴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다. 

• 사마천의 말
 "공자가 죽은 지 이제 5백년이 되었으니 누군가 그 뒤를 이어 세상을 밝히기 위해 역전易傳을 바로잡고, 춘추의 정신을 계승하여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의 정신을 찾는 사람이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공자졸후지어금오백세孔子卒後至於今五百歲 유능소명세有能紹明世 정역전계춘추正易傳繼春秋 본시서예악지제本詩書禮樂之際) 


전목錢穆의 사학명저강의,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상 · 중 · 하 셋으로 강의로 나눠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첫 번째 부분은 지난주에 얘기했다. 사마천의 사기를 집중적으로 설명했다기보다는 중국의 역사체제, 상서尙書는 사건을 기록하고, 춘추春秋는 연대에 따라 썼고,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열전列傳, 인물 중심이라는 얘기를 했다. 그게 체제에 관한 얘기이다. 오늘은 사마천에서 사기에서 태자공자서太史公自序, 영어로 말하면 preface, 서문이 맨 뒤에 붙어 있다. 이것을 중심으로 해서 어떻게 해서 사마천이 사기를 썼는가 그리고 사기의 저술의 의의는 무엇인가, 이것을 그것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중국의 역사, 그러니까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예문지藝文志라고 하는 것은 문서에 관한 기록이다. 예문지藝文志에 보면 육예락六藝略, 제자략諸子略, 사부략辭賦略 등이 있다. 사부략辭賦略이 아니라 시부략詩賦略인데 크게 다르지 않다. 이것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 육예락六藝略 안에는 역易, 서書, 시詩, 예禮, 악樂, 춘추春秋, 논어論語, 효경孝經, 소학小學 등의 텍스트들을 다루고 있는데, 사기史記라고 하는 텍스트는 춘추春秋의 하부 영역으로 들어가 있다. 그러니까 이 분류 영역을 보면 역사학이라고 하는 것은 경학經學에 포함되어 있고 독립된 학문으로 인정받지 못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이제 사마천은 중국 역사에서 24사, 24개의 역사 책이라는 얘기이다, 역대 연대기인데 그런 것을 정사라고 부르는데, 그런 분류의 창시자라고 볼 수 있다. 

전목 선생의 말처럼 "첫 번째 정사를 창조함으로서 이후 2천년 동안 모범이 되었으니", 사마천의 사기라고 하는 텍스트를 도대체 왜 읽어야 되는가, 옛날 것이니까 읽는다.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 읽는다. 역사는 사건을 기록하는 것이다 라는 관점에서 보면 사마천처럼 인물 중심의 역사는 부차적인 것일 수 있는데, 그러니까 그냥 평전 모음 아니야 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사기는 본기本紀가 있고 열전列傳이 있고 표表가 있고, 서書, 세가世家가 있는데, 전목 선생은 사마천의 사기라고 하는 텍스트의 핵심은 열전列傳에 있다, 사람을 중심으로 한다. 그런데 사람을 중심으로 한다 라고 하면 역사적으로 엄청난 업적을 남기지 않고, 그 사람이 한 일에 대해서 특별히 기록할 게 없는데, 그 사람을 열전에 넣는단 말인가 라는 의문이 생겨날 수가 있겠다. 그것을 옹호하기 위해서 전목 선생은 "구체적인 사실에서 특별히 드러낼 것이 없으면서도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 된 경우가 매우 많다"라고 했다. 그 예를 들어서 말할 때 공자의 제자 안연을 말하는데, 안연은 일찍 죽었다. 당연히 그 사람에 대해 얽힌 일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안연은 중요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게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후한 이후 사람들은 특별히 안현을 중시했다. 송명 시대에 이학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특히 안연을 중시했다. 어찌 안연이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그러면 안연에 대해서는 그러니까 사실 중요한 사람인 건 알겠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한 일이 없으니까 기록을 하려고 해도 날조를 하지 않는 한 뭔가를 많이 적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오늘날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는 인물만 중요하지는 않다. 지난 시간에도 말했듯이 어떤 사람의 행위가 어떤 시간 속에서 일어나면 그게 일affairs이 되는 것이고, 그게 historical affairs가 될 수 있겠다. 그것을 기록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서사가 만들어지는데, 사람과 시간과 그다음에 사건, 이것들이 얽힌 historical narrative가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다.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는 태사공이 스스로 쓴 것이다. 내가 왜 이 책을 썼는가 그리고 이 책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그래서 그것을 보면서 사마천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사기라는 저작을 만들어낼 수 있었는가를 보자면, 이렇게 시작을 한다. 사마천의 조상은 대대로 역사를 관장하는 집안이었다. 사마천의 조상은 주周의 역사를 관장하는 사관이었고 부친이 사마담司馬談이다. "사마천의 조상들은 대대로 주나라 역사를 관장하는 사관이었다. 춘추시대에 이르러 주나라 혜양과 양왕 때는 진晋나라로 갔고 그때 주나라는 이미 쇠약했다." 거기로 간 다음에 다시 위나라, 조나라 등으로 나뉘어졌고, 다시 진秦나라로 가기도 했다. 그리고 "사마천은 바로 황하의 서쪽 언덕인 섬서성 용문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부친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데 "그의 부친 사마담司馬談은 천관天官은 당도唐都, 역易은 양하楊何, 도론道論은 황자黃子에게서 각각 배웠다." 학천관어당도學天官於唐都 수역어양하受易於楊何 습도론어황자習道論於黃子. 그러면 역사가라고 해서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춘추春秋 아래에 경학經學에 포함되어서 독립된 학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라는 상황이었다 라고 하는데, 그 상황이라 하더라도 어찌 보면 그 상황이 좋은 것일 수도 있는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게 역사가가 되려면 이런 것을 해야 된단 말이다.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 중요한 내용이 하나 들어 있는데 자기 아버지가 음양가陰陽家, 유가儒家, 묵가墨家, 법가法家, 명가名家, 도가道家 또는 도덕가, 6개의 당대 학파들에 대해서 핵심을 설명해서 논육가요지論六家要旨, 여섯 학파의 핵심 주장을 설명함이라는 글을 썼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따로 전해지지 않고 사마천이 쓴 사기의 태사공자서에 말하자면 옮겨 실려 있다. 그래서 중국 고대의 6개의 학파에 대해서 간명하게 정리한 글을 찾는다고 하면 태사공자서에 있는 사마천 아버지 사마담의 논육가요지를 거론한다. 논육가요지를 읽어보면 전국 시대의 대표적인 여섯 사상을 구분하여 각각의 장점과 단점이 무엇인가를 서술하면서 유가에 대해서도 얘기를 한다. 그런데 그 최후의 결론에서는 도가에 탐복을 한다. 그러니까 한나라에서 태사령太史令을 맡아 있으면서 경학뿐만 아니라 여러 학문에도 능통했지만 존중한 것은 황로黃老였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우리가 체크해 둬야 될 부분은 사마담이나 사마천이나 모두 도가 사상의 말하자면 호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는 유가가 역사를 중시했으니까 이 사람들도 유가가 아니었을까 라고 말하는데, 유가가 역사를 중시한 건 공자님 얘기이고, 그 이후로는 역사를 중시하지 않았다. 현실 정치에 나아가서 있다 보니까 역사보다는 오히려 유가는 음양가와 가깝게 지냈다. 그것을 꼭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한나라 초창기에는 황로술黃老術, 그러니까 도가의 정치 술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채택된 건 아닌데 받아들였고, 그런 도가의 원리에 근거해서 정치를 했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사마담은 거기서 그렇게 말을 한다. "도가는 사람의 정신을 하나로 모으고 움직임을 형체 없는 것에 합치시키며 만물을 넉넉하게 충족시킨다." 그래서 요지는 간략하지만 파악하기가 쉽고 하는 일은 적어도 그 효과는 많다. 그 내용을 보면 그렇다. 도가사인정신전일道家使人精神專一 동합무형動合無形 섬족만물贍足萬物 ··· 지약이이조指約而易操 사소이공다事少而功多. 이게 사마담이 한 얘기이다. 도가에 탐복했다는 말을 알 수 있다.  

여기까지는 내력에 관한 얘기이고, 사마담은 자신이 역사가로서의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죽은 것에 대해서 굉장히 걱정을 했다. 그래서 사마천한테 우리 집안이 대대로 이런 것을 해왔는데 좀 뭘 좀 남겨야 되지 않겠냐고 얘기를 했다. 일단 사마담이 말하기를 "천하가 주공을 칭송하는 것은 그가 능히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덕을 칭찬하고. 주공과 소공의 작품을 선양하며, 태왕太王과 왕계王季의 사례에 통달하게 하여서 마침내는 공류公劉의 공적에까지 이름으로써 결국은 후직后稷을 추존했기 때문이다." 주공을 칭송하는 까닭이 이것이라는 말인데, 주공이 존경받는 것은 역사학을 선양하는 데 공헌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을 한 것이다. 주공의 아버지가 문왕이고, 무왕과 주공, 소공이 형제이다. 주공은 공류의 공적에 이르고 결국은 후직을 추전했다 라고 하는데, 공류는 주나라의 시조라고 알려진 사람이고, 그다음에 그 공류는 후직의 후손이라는 것은 거슬러 올라갔다는 얘기이다. 그러니까 후직에까지 이르러 그의 업적을 추존했다 라고 하는 것은 주공이 한 일을 가만히 보면 조상의 얼을 기려서 그것을 역사로 기록했다 라는 얘기이다. 바로 그것이 사학을 선양하는 데 공헌했다. 그러면 사마담은 자기 직업의 입장에 서서 말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사학을 선양하는 것이 주공의 아주 주요한 업적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꿈에서 주공을 못 봤다고 하는 것은 사학을 선양했다는 업적에 주목했기 때문은 아니다. 인문주의적 전회를 이루었기 때문에 주공을 선양했다. 그런데 사마담은 주공의 어떤 측면을 존중했는가. 사학을 선양했다고 하는 측면을 크게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을 한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주공을 본받아야 될 텐데 라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이제 한漢이 일어나 천하가 통일되었으나, 나는 태사로서 현명한 군주와 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의 행적을 기록하지 않았으니 천하의 역사적인 문장이 폐기될까 심히 두렵다." 업무를 태만히 했다는 것이다. 현명한 군주와 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의 행적을 기록을 해야 하는 게 태사의 업무이다. 태사의 업무는 기록하는 것이다. 폐천하지사문廢天下之史文 여심구언余甚懼焉, 천하의 역사적인 문장이 폐기될까 심히 두렵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겠는가. 자기 집 안에 아들이 있으니까 역사책을 지으라고 얘기를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사마천이 사기를 지은 것은 사마담의 이러한 두려움을 알고 있었고 그에 남긴 명을 따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기를 사마천이 한무제한테 궁형을 받아서 열 받아서 한무제를 비방한 책이라고 말하는데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겠지만 전목 선생은 비방서가 아니라고 말한다. 속마음은 어쩌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사마천의 태사공자서를 읽어보면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 

사마천이 한 말은 "공자가 죽은 지 이제 5백년이 되었으니 누군가 그 뒤를 이어 세상을 밝히기 위해 역전易傳을 바로잡고, 춘추의 정신을 계승하여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의 정신을 찾는 사람이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이다. 이게 사마천의 결심이겠다. 공자졸후지어금오백세孔子卒後至於今五百歲, 공자에 졸卒이라는 말을 썼다, 유능소명세有能紹明世, 이어야 되지 않겠는가 라고 얘기를 하는 것이다. 정역전계춘추正易傳繼春秋 본시서예악지제本詩書禮樂之際. 이것이 바로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다. 사마 집안의 가문학이다. 이게 참 어려운 일인데 서양에서도 있고 동아시아에서도 있는 일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내가 하던 것을 미처 못했으니 가문을 이어서 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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