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중국사학명저中國史學名著(12) ─ 漢書
- 강의노트/책담화冊談話 2021-25
- 2025. 9. 29.
강유원의 책담화冊談話(https://booklistalk.podbean.com)에서 제공하는 「중국사학명저中國史學名著」를 듣고 정리한다.
2025.09.27 δ. 중국사학명저中國史學名著(12) ─ 漢書
첸무, ⟪중국사학명저강의⟫(錢穆, 中國史學名著)
텍스트: buymeacoffee.com/booklistalk/ChienMu-06
반고班固, 한서漢書
• 첫 번째 단대사斷代史. 즉 왕조王朝를 경계로 한 역사서. 중국사中國史의 경우. 왕조사王朝史를 서술하면 제왕帝王만을 중시한다는 비판을 받지만, "왕조가 바뀐다는 것은 곧 역사상 하나의 큰 변동이 일어남을 뜻한다."
• 반고班固 이전에 사기史記를 이어 역사서를 쓰려했던 이들
유향劉向, 유흠劉歆, 양웅揚雄, 풍상馮商, 사잠史岑
• 반고班固(32-92)의 아버지 반표班彪(3-54). 사기史記를 잇고자 사기후전史記後傳을 작업
한서漢書의 구성
100권. 본기本紀 12권, 표表 8권, 지志 10권, 열전列傳 70권.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부터 왕망王莽의 신新나라 멸망(24)까지
반고가 한서를 편찬하고 있을 때 "사사로이 국사를 고치려고 한다(사수국사私修國史)"고 고발되었으나 아우 반초班超가 "아버지의 작업을 이어서 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이후 나라의 지원을 받았다. ─ 관찬서官撰書
그러나 외척 두헌竇憲의 죄에 연루되어 옥고.
여동생 반소班昭가 작업을 이어받았으며, 정부에서 파견한 마융馬融과 마속馬續 등의 도움으로 완성
• 독자적 저술이 아니라는 의혹
갈홍葛洪, 포박자抱朴子. 유흠劉歆의 한서漢書 1백권, 원본이 없어지고 잡록雜錄만이 남았다. 반고의 저작은 대부분 유흠이 남겨놓은 내용이고 거기서 취하지 않은 것은 겨우 2만여 글자.
"한나라의 일을 조목조목 모아놓은 것" (편록한사編錄漢事)
─ 완전히 베낀 것이라 하기는 어렵다. 반고가 참고한 것은 자신의 아버지, 유흠, 양웅 등의 자료들이다.
• 반고班固라는 사람에 대한 평가
"사람 됨에 대하여 말한다면 반고는 사마천에 도저히 미칠 수 없을 것이다."
정초鄭樵, 통지通志, "반고는 문장이나 번지르르하게 꾸미는 선비이고 학술을 전혀 갖추지 않았으며, 오로지 하는 일이란 남의 것을 베끼는 일이었다." ─ 역사를 쓰는 것이 남의 글을 베끼는 일이기는 하다.
한서漢書의 서전敍傳
태자공자서太史公自序로부터 배운 것. 사마천司馬遷과 달리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자신의 아버지를 "사도부司徒部의 속관 반표班彪"라고 칭하는데, 이는 객관적客觀的 사필史筆이라고 할 수는 없다.
"반고班固는 부업父業을 계승했으면서도 그것을 부정했다."
정초鄭樵의 말처럼 "부화지사浮華之士"라 하는 것이 타당
• 저작에 대한 평가
범엽范曄, 후한서後漢書
"사마천의 문장은 솔직하고(직直) 사실에 대해서는 분석이 뛰어나다(핵覈)."
"반고의 문장은 매우 풍부하고(섬贍) 사실의 기록은 상세하다(상詳)."
풍부하지만 진실하지 못하거나 상세하지만 분석이 빠져있다면 아무 쓸모 없다. 그러나 "상세하면서도 체계가 있다"면 사실의 본말本末과 시종始終, 그리고 표리表裏를 조리 있게 서술했음을 의미한다.
"한서漢書의 논의가 항상 사절死節을 배격했으며, 정직을 부정하고 살신성인의 미덕을 기록하지 않았고 인의를 가볍게 여기고 수절守節를 천하게 여겼다." ─ 작자 자신의 견식見識과 인격수양人格修養의 문제
〈공승전龔勝傳〉, 한 말에 절개를 지키다 죽은 선비,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요절했다."
왕능王陵, 급암汲黯, "어리석다(당戇)"고 평가
왕장王章, 살신성인이라 할 만한 사실이 있는데 "경중을 따지지 않고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하무전何武傳, "세속에 의지하게 되면 도를 폐하게 되고, 세속을 거슬리면 위태해진다" ─ 위태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면 당연히 세속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적의전翟義傳, "의를 헤아리지 못하고 집안을 망하게 했다."
한서漢書는 옳고 그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의 기준이 뒤바뀌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반고는 사마천에 대하여 "사물에 밝고 견문이 넓었지만 극형을 면하는 지혜는 없었다" 평한다. 그러나 반고 자신도 하옥되어 죽었다. 사마천은 이릉李陵을 변호헀지만, 반고는 외척 두헌의 문하에 들어갔다가 일을 당한 것이다. 두 경우를 비교하면 크게 다르다.
•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와 당초唐初에는 한서가 더 좋은 평가를 받았다. 사람들이 문장 꾸미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의 고문부흥운동古文復興運動이 일어나면서 이에 대한 관점이 달라졌다.
• 반고班固의 반표班彪는 〈왕명론王命論〉을 지은 적이 있고 외효隗囂에게 굴복하지 않은 적이 있는데, 이는 그가 견식과 절개를 가졌음을 보여준다. 이에 반해 아들 반고班固는 한 왕조가 중흥되어 천하天下가 太平한 시대를 살면서도 세속의 난마처럼 얽힌 점을 제대로 보지 못하였다. 부자父子를 비교하면 이러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 사기史記와 비교해보면, 한서漢書는 사실은 있지만 사람은 없다. 사람의 죽음에 대한 사실은 있지만 그 사람의 정신은 전하고 있지 않다.
전목錢穆 선생의 사학명저강의가 570페이지 정도 되는데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부분이 177페이지이다. 이 부분을 읽고 나서 그다음에 범엽의 후한서와 진수의 삼국지를 읽고 나면 3분의 1을 넘게 읽는 셈이 된다.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는 중국 역사책으로는 중요하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에서 사마천의 천遷과 반고의 고固를 합쳐서 천고遷固라고 하거나 사기의 사史와 한서의 한漢을 합쳐서 사한史漢이라고 하는데 이는 동등한 지위에 있다는 걸 보여준다. 역사학적으로 보면 첫 번째 단대사斷代史이다. 사마천의 사기는 통사이다. 왕조를 경계로 한 역사서인데 문제가 조금 있다. 나쁘다는 문제가 아니라 따져봐야 할 지점이 한 가지 있는데, 대개 우리가 중국사라고 할 때 왕조를 중심으로 서술을 하면 제왕만을 중시한다 라는 비판을 하게 된다. 그런데 중국사를 이렇게 들여다보면 왕조가 바뀐다는 것은 곧 역사상 하나의 큰 변동이 일어난다. 그게 이제 문제이다. 왕조의 변화가 곧 변동이다. 역사는 변화를 기록하는 것이니까 그렇다. 그런데 전목 선생이 청나라 이후에는 어떻게 할 거냐 하는 문제를 말한다. 전목 선생이 지금 이 책을 출간한 게 1971년이다. 그때가 민국 61년이다. 그러니까 중화민국이 개국된 지 60년이 되었는데, 그러면 60년쯤 되었으니까 역사를 써야 되는가. 그런 시대 구분의 문제가 또 여기도 있다.
사마천이 사기史記를 쓰고 난 다음에 이제 엄청난 저작이 하나 나와버리니까 후대 사람들이 뭔가를 이어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바로 유향劉向, 유향의 아들 유흠劉歆 그다음에 양웅揚雄, 그다음에 풍상馮商 그다음에 사잠史岑 이런 사람들이 있는데, 그리고 유향과 유흠은 왕망의 신나라와 관련이 되어 있다. 우리가 왕망은 나쁜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기 쉬운데 왕망은 정통 유가를 현실에 실현해 보려고 했던 사람이다. 신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이런 것에 대해서는 역사책에서는 들여다본 적이 없고 유학의 역사를 할 때 본 적은 있다. 그런데 풍상이나 사잠이나 이런 사람의 이름은 사실 전목 선생 책에서 처음 보았다. 그런데 전목 선생은 사마천의 사기를 이어서 뭔가를 쓰려고 했던 사람이 20명 정도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에피고넨epigonen들이다. 난장이들, 거인의 어깨 위에서 뭔가를 좀 해보려고 하는, 그리고 그런 거인이 나타났을 때 후대 사람들이 본받고 싶어하는 그런 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20명, 유향, 유흠, 양웅, 풍상, 사잠 이런 중에서도 두드러진 사람이 반표班彪라는 사람이다. 반표班彪는 반고班固의 아버지이다. 뒷부분에 가면 설명이 또 있지만 반표와 반고는 많이 달랐던 것 같다. 반표는 좀 반듯한 사람이고 반고는 왜 재승박덕才勝薄德, 재才는 뛰어난데. 내면의 인품은 떨어지는, 인격 수양이 좀 덜 된 사람인 것 같다. 어쨌든 반표가 사기를 잇고자 작업을 했는데 사기후전史記後傳이라는 것을 작업을 했다고 한다. 사기史記 이후에 새로 쓴 것이다. 그런데 전해지는지는 않는다. 여하튼 그것을 보고 반고도 해봐야겠구나 했을 것이고 100권으로 된 한서를 썼는데 썼는데 본기本紀가 12권, 표表가 8권, 지志가 10권, 열전列傳이 70권, 앞에서 사기에서 잠깐 공자세가를 얘기를 했었다. 그런데 이제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부터 왕망王莽의 신新나라 멸망 때까지를 다루고 있다. 물론 한나라때도 제후가 없었던 건 아니고 있었는데 제후에 대해서는 쓰지를 않았다. 세가世家 자체가 아예 없다. 그리고 한서를 편찬하고 있는데 사사로이 사기를 또는 국사를 고치려고 한다, 사수국사私修國史라고 고발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동생 반초班超가 나서서 아버지의 작업을 이어서 하고 있다 라고 말하는 바람에 나라의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엄격하게는 한서를 관찬서官撰書라고 한다. 그런데 반고도 외척 두헌竇憲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는데 동생이 또 반소班昭라고 하는 여동생이 그 작업을 이어받았고, 그 이후에 정부에서 파견한 마융馬融과 마속馬續 등의 도움을 받아서 완성을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반고의 한서는 사실 반씨 패밀리의 작업이고 거기에 더해서 정부의 지원도 꽤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아주 명백하게 독자적 저술은 아니다.
그것에 그것도 그렇지만 약간 비난하는 얘기가 있다. 갈홍葛洪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포박자抱朴子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한다. 유흠劉歆의 한서漢書가 100권 있었는데 원본이 없어지고 잡록雜錄만이 남아 있었다. 잡록雜錄이라고 하는 것은 쓸데없는 것만 적어놓은 것이 아니라 독서 카드 같은 것인데, 그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보니까 반고의 저작은 대부분 유흥이 남겨둔 내용이고 거기서 취하지 않은 것은 거의 없고 반고가 적어놓은 것은 겨우 2만여 글자 정도밖에 안 된다 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 2만여 글자면 별로 안 되는 것이다. 조목조목 모아놓은 독서 카드가 "한나라의 일을 조목조목 모아놓은 것", 편록한사編錄漢事, 그렇다 해도 완전히 베낀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유흠의 것을 참조했다고 하는데 아버지 반표가 쓰던 것도 있고 또 양웅이 쓰던 것도 있고, 이렇게 저렇게 앞에서 전목 선생이 말하기를 사마천의 사기를 이어서 뭔가를 해보려고 했던 사람들이 20명 정도 된다고 했는데, 그러니까 그것을 다 참조를 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역사책이라는 것은 어떤 사료를 보고 옮겨적기도 하고 포폄을 하는 것이니까, 역사책은 인용문을 표시를 하지 않고 역사적 관점을 베껴 적으면 그게 독자적 저작은 아니라고 할지언정 역사는 좀 어려운 지점이 좀 있는 것 같다.
반고의 한서漢書라고 하는 텍스트가 역사적 저작 자체가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전목 선생이 그렇게 많이 하지 않는데 반고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꽤나 많은 인용문을 가져다가 평가를 하고 있다. "사람 됨에 대하여 말한다면 반고는 사마천에 도저히 미칠 수 없을 것이다." 아주 딱 잘라서 단정적으로 단언을 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나라 이전까지는 한서를 중시했고 송나라 이후가 되어서야 사기를 중시했다고 말한다. 정초鄭樵라는 사람이 쓴 통지通志라는 책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반고는 문장이나 번지르르하게 꾸미는 선비이고 학술을 전혀 갖추지 않았으며, 오로지 하는 일이란 남의 것을 베끼는 일이었다." 방금 전에 말한 것처럼 역사를 쓰는 게 남의 글을 베끼는 일이긴 하다. 좀 지나치지 않는가. 사마천의 사기 역시 뭔가를 베낀 게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 오로지 하는 일이란 남의 것을 베끼는 일이었다 라고 하는 것, 정초는 반고를 가리켜서 문식만을 화려함만을 일삼는 선비라고 얘기했다. 그러니까 역사를 쓰는 것이 남의 것을 베끼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닌데, 반고라는 작자는 인간 됨됨이가 틀려 먹었다, 못마땅하기 때문에 이런 얘기를 한 게 아닐까 한다.
그래서 과연 그것이 어떠한가를 한번 따져보면, 우리가 반고라는 사람에 대한 평가를 들어가 보자면, 반고도 사마천의 태사공자서를 보고 자기도 서전敍傳이라는 걸 쓴다. 사마천이 쓰기 시작해서 이제 사람들이 다 쓰기 시작했다. 사마천은 거기에다가 자기 아버지의 논육가요지論六家要旨도 쓰고, 내가 왜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서 이런 일을 하는지에 대해 썼는데, 반고는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자신의 아버지를 그냥 "사도부司徒部의 속관 반표班彪"라고 칭하는데, 자기 아버지 벼슬을 얘기한 것이니까 객관적 서술이라고는 하지만 전목 선생은 객관적客觀的 사필史筆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말을 않고 지나가자니 좀 꺼림칙하고 또 아버지에 대해서 좋은 말을 하자니 그렇고 하는, 뒤에 보면 그 얘기가 있는데 반고가 보기에는 아버지도 뭐 그닥 이런 식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반고는 아버지가 하던 일, 부업父業을 계승했으면서도 그것을 부정한 게 아닌가 한다. 인간 됨됨이가 그러하다.
이어서 범엽范曄이 쓴 후한서後漢書에서 한서를 평가한 게 있다. 범엽이 한서를 평가할 때는 당시 사가들의 공론을, 그러니까 범엽만이 이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 당시에 역사가들이 모두 다 한 데 의견을 모아서 반고는 이러하다 라고 말한 것을 집약해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마천의 문장은 솔직하고(직直) 사실에 대해서는 분석이 뛰어나다(핵覈)." 이것은 예전에 유지기의 사통史通을 할때 전목 선생의 이 부분을 인용해서 말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사마천은 직直하고 핵覈이다. 그리고 "반고의 문장은 매우 풍부하고(섬贍) 사실의 기록은 상세하다(상詳)." 풍부하고 상세하다 라는 것은 얼핏 보면 칭찬인 것 같은데, 뭔가 상세하게 뭔가를 자세하게 써놓긴 했는데 거짓이라면 그건 아무 의미가 없고 분석이 안되어 있으면 쓸모가 없다. 그러니까 반고의 문장은 매우 풍부하고 사실의 기록은 상세하다 라고 한 게 꼭 칭찬은 아닌 것이다. 상세하면서도 체계가 있으면 좋은 것이다. 사실의 본말本末과 시종始終, 그리고 표리表裏를 조리 있게 서술했다. 이 체계가 있으면 좋은 것이다.
그다음에 저작에 대한 평가에서 반고의 인간 됨됨이와 저작에 나타나는 서술을 연결시켜서 보면, 한서의 논의는 항상 사절死節을 배격했으며, 정직을 부정하고 살신성인의 미덕을 기록하지 않았고 인의를 가볍게 여기고 수절守節를 천하게 여겼다." 이것은 반고가 가지고 있는 견식見識과 인격수양人格修養의 문제이겠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보면 공승龔勝에 대해서 써놓은 공승전龔勝傳을 보면, 이 사람은 한나라 말기에 절개를 지키다 죽은 선비인데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요절했다"고 썼다. 요절했다 라는 말을 써버렸으면 사절死節를 비난한 것이다. 더 살아야 할 사람인데 절개를 지키다가 죽었으니까 그렇다. 그런 사람을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요절했다고 했고, 왕능王陵이나 급암汲黯에 대해서는 "어리석다(당戇)"고 써놓았다. 왕장王章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살신성인이라 할 만한 사실이 있는데도 "경중을 따지지 않고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라고 썼다. 그다음에 하무전何武傳을 보면 "세속에 의지하게 되면 도를 폐하게 되고, 세속을 거슬리면 위태해진다"고 했는데, 그러니까 하무라는 사람이 세속을 거슬러서 위태해졌다는 얘기이겠다. 그런데 위태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면 당연히 세속에 의지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 도를 폐하게 되는 것인데, 또 더 나아가서 적의翟義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의를 헤아리지 못하고 집안을 망하게 했다." 이것은 의를 지키다 집안을 망한 사례이다. 그러니까 전목 선생은 이것을 보고 "옳고 그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의 기준이 뒤바뀌어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반고가 결정적으로 선을 넘었다 라고 생각하는 게 사마천에 대해서 "사물에 밝고 견문이 넓었지만 극형을 면하는 지혜는 없었다"고 평한다. 반고도 옥사했다. 외척 두원의 문하에 들어갔다가 아주 나쁘게 말하면 뒷수발하다가 걸린 것이다. 극형을 면하는 지혜는 지혜가 아니다. 올바른 일을 하다가 극형을 당하는 것이 오히려 지혜로운 것이다. 사마천이 극형을 당하게 된 이유가 이릉李陵이라고 하는 장군을 변호하다가 그런 것이다. 전후 사정을 따져보면 일단 사마천은 이릉이라는 사람과 아무런 친분도 없다. 그런데 자기가 보기에는 이릉이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봐도 광무제가 이릉한테 덮어 씌운 측면이 있다. 그러니까 사마천은 억울하기는 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세상 처신을 잘못했나 보다 라고 생각하지는 않은 사람이다. 사마천는 반듯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전목 선생도 "두 경우를 비교하면 크게 다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와 당나라 초(당초唐初)만 해도 멋진 문장을 사람들이 좋아하고 문장 꾸미기를 좋아해서 한서가 더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이제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이 고문부흥운동古文復興運動을 일으켰고, 그때부터는 한서가 그렇게 좋은 문장인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고문을 부흥한다는 게 꼭 스타일만 얘기하는 건 아니라 글의 본질이라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것이 있다.
앞에서 나온 것처럼 반고가 자기 아버지 반표에 대해서 많이 안 쓴 것은 좀 못되어 먹은 지점이 있다. 반표班彪는 왕명론王命論을 지은 적이 있고, 신나라 왕망과 연결해서 뭔가를 하려고 했던 외효隗囂라는 사람이 있는데, 외효가 반표를 핍박하기도 했는데 올바름을 따르다가 굴복하지 않은 적이 있다. 부친인 반표는 누가 봐도 견식과 절개를 가졌다. 그런데 반고는 한나라 왕조의 태평성대를 살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세속의 난마처럼 얽힌 점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단순히 달리 말하면 눈앞의 이익만 좇으면 그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부자를 비교하면 이러한 차이가 있는데, 전목 선생이 말을 아낀 것 같다, 아버지의 한참 모자라는 자식이 아니냐 라는 뜻으로 말씀을 하신 것 같다. 사기史記와 비교를 해보면 한서漢書는 아주 풍부한 서술은 있으니까 사실은 있지만 사람은 없고, 사람의 죽음에 대한 사실은 있지만 그 사람의 정신은 전하고 있지 않다. 역사책으로서는 괜찮은 책인 것 같은데 그 이상은 말하기가 어렵다 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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