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치아 엘리아데: 영원회귀의 신화


영원회귀의 신화 - 10점
미르치아 엘리아데 지음, 심재중 옮김/이학사


서문

제1장 원형과 반복

제2장 시간의 갱신

제3장 "불행"과 "역사"

제4장 역사의 폭압


주석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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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원형과 반복

20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 인간의 손에 의해 문명화된 세계의 정당성은 오로지 그 모델이 된 초지상적인 원형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22 창조는 그 무엇보다도 신성한 행위이다. 〈창조〉의 반복이 지니는 의미를 그 자체로 검토해보면 베다나 스칸디나비아 또는  로마 사람들이 행한 여러 의례들의 중요성이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우선은 한가지만 기억해두자. 즉 "삶의 공간"으로 활용하거나 거주하려는  목적으로 점유된 모든 영토는 그 전에 먼저 "혼돈"으로부터 "코스모즈스"로 변형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그 영토는 의례를 통하여 형태를 부여받게 되고 그럼으로써 실재적인 것이 된다. 당연히 고대인의 심성 속에서 실재는 힘과 효력, 지속성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가장 뚜렷한 실재는 성스러운 것이다. 오직 성스러운 것만이 절대적으로 존재하고

유효하게 작용하며, 오직 성스러운 것만이 사물들을 창조하고 또  지속시켜주기 때문이다. 수많은 성별 행위들 — 공간들,  물건들, 사람들 등 —은 실재적인 것에 대한 원시인들의 강박관념 존재에 대한 갈증을 드러내준다.


28 〈사원〉을 세계상 imago mundi으로 이해하는 아주 오래된 관념, 성소가 〈우주〉의 본질을 모방하고 있다는 생각은 기독교가 지배하던 유럽의 종교 건축 속에서도 계속 유지되었다. 예컨대 기원후 몇 세기 동안에 지어진 바질리카 성당이나 중세의 주교구 대성당은 천상의 예루살렘을 상징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중세 문학 속에는 〈성산聖叫>과 〈승천〉, 〈중심 탐색〉의 상징체계들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또한 암시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최근 몇 백년 동안의 몇몇 문학작품들 속에도 그러한상징체계들이 드러나 있다.


47 즉 어떤 사물이나 행위는 하나의 원형을 모방하거나 반복하고 있는 한에서만 실재적이 된다는 관념이다. 실재는  오로지 반복이나 참여를 통해서만 획득된다. 요컨대 훌륭한 본보기가 없는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다시 말해서 실재성을 결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원형화되고 범례화되는 경향을 띠게 된다. (현대의 관찰자가  보기에는)자기 자신이기를 그치는 한에서만 그리고 타자의 행동을 모방하고 반복하는 것에 만족하는 한에서만 스스로를 실재적인 촌재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그 경향은 역설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달리 말하면 정확히 자기 자신이기를 그치는 한에서만 그는 스스로를 실재적이라고, 즉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라고 인식한다.


48 모든 희생은 최초의 희생을 반복하면서 최초의 희생과 동시에 일어난다. 모든 희생은 시초의 그 신화적인 순간에 이루어지고, 의례의 역설에 의해 세속의 시간과 지속은 정지된다. 모든 반복, 다시 말해서 원형의 모방은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 반복을 통하여 인간은 원형들이 처음으로 계시되었던 신화의 시대로 투사된다. 여기서 우리는 원시적인 존재론의 두 번째 양상을 보게된다. 즉 하나의 행위(혹은 사물)가 범례적인 행위의 반복을 통하여 그리고 오직 그 반복을 통해서만 어떤 실재성을 획득함에 따라, 세속적인 시간의 폐기, 지속과 "역사"의 암묵적인 폐기가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그와 동시에 그 모범적인 행위를 재현하는 사람은 그 행위가 처음으로 계시되었던 신화의 시대로 옮아가게 된다는 사실이다.


60 왜냐하면 고대인의 의식은 개인적인 기억에 아무런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정신적인 경험들을  통해서 언뜻 엿볼 수는 있지만 그러한 비개성적인 의식의 사후 존속이 과연 무얼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말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가 바하의 음악을 들을 때 느끼는 감동, 수학 문제를 풀 때의 주의력 집중, 어떤  철학적인 문제를 검토할 때의 의식의 집중, 그런 것들 속에 과연 역사적이고 개인적인 어떤 것이 들어 있는가? 역사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한 근대인은 자신의 비개성적인 사후 존속의 가능성이 줄어든다고 느낀다. 그러나 역사의 비가역성과 새로움에 대한 관심은 인류의  삶에서 최근의 발명품에 속한다.


제2장 시간의 갱신

시간의 주기적인 갱신이 상당히 명백한 형태로, 특히 역사적인 문화들 속에서 행해지는 새로운 〈창조〉, 즉 우주 창조 행위의 반복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주기적인 창조, 시간의 순환적인 갱신이라는 관념은 "역사"의 폐기라는 문제를 제기하는데, 바로 이 문제가 이 글에서 우리가 가장 관심을 두고있는 문제이다.


92 간단히 말해서 고대인들은 스스로를 역사적인 존재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는 것, "기억"에 대한 가치 부여를 거부한다는 것, 현실적으로 구체적인 지속의 시간을 구성하는 예외적인 사거든에 대한 가치 부여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런 온갖 제의와 태도들에서 궁극적으로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시간의 가치를 부정하려는 의지이다.


93 신비주의자처럼, 일반적인 종교인처럼, 원시인은 끊임없는 현재 속에 산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인은 "‘원시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다른 누군가의 행위를 반복하며, 그 반복을 통해 끊임없이 비시간적인 현재 속에 살기 때문이다.)


95 달에 관한 그러한 신화 ━ 우주적인 관념들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예전에 존재했던 것의 순환적인 회귀, 한마디로 말해 "영원회귀"라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모든 차원 ― 우주적, 생물학적, 역사적인간적 차원 등등 ― 에 걸쳐 투사되는 원형적인  행위의 반복이라는 모티프를 발견하게 된다. 그렇지만 또한 시간의  순환적인 구조도 읽어낼 수 있다, 즉 어떠한 차원에서든 새로운 "탄생"이 있을 때마다 시간은 갱신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원회귀"는 시간과 생성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하나의 존재론을 드러낸다. 


96 원시인도 시간에 순환적인 방향을 부여함으로써 시간의 비가역성을 무효화시키려 한다. 모든 것은 매 순간 그 처음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과거는 미래의 예시일 뿐이다. 그 어떤 사건도 비가역적인 것은 아니며 그 어떤 변화도 최종적이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에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동일한 원초적 원형들의  반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원형의 반복은 원형적인 행위가 계시되었던 신화적인 순간을 재현함으로써 세계를 그 최초의 동일한 여명의 순간 속에 끊임없이 머물게 해준다. 시간은 사물들의 나타남과  실존을 가능케 해줄 뿐이다. 시간은 사물들의 실존에 아무런 결정적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시간 자체가 끊임없이 갱신되기 때문이다.


98 전통적인 사회의 인간이 경험하는 욕구, 즉 "역사"를 거부하려는, 원형들을 무한히 모방하려는 집요한 욕구는, 세속적인 삶의 하찮음에 매몰되어 "영락"하는 것에 대한 공포의 표현, 실재에 대한 갈증의 표현이다. 원시인들이 실재를 나타내는데 사용하는 표현과 이미지들이 우리에게는 유치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일지라도,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원시적인 행태가 갖는 깊은 의미이다. 그 행태를 지배하는 것은 비실재들로 이루어진 세속 세계와 대립하는 절대적 실재에 대한 믿음이다. 궁극적으로, 세속 세계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가 아니다. 세속 세계는 대표적인 비실재, 비창조물, 비존재이고, 요컨대 무無이다.


제3장 "불행"과 "역사"

102 과오가 아니라면 최소한 어떤 원인, 결국에 가서는 인간이 호소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자 잊고 있었던 대상인 〈지고신〉의 의지 속에서 확인되는 어떤 원인이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고통"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되고 그럼으로써 감내할 만한 것이 된다. 원시인은 가능한 모든 종교-주술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그 "고통"과 맞서 싸운다. 그러나 고통이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는 그 고통을 견디어 낼 수 있다. "고통"의 가장 결정적인 계기를 이루는 것은 고통의 난데없는 출현이다. 그 원인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을 때에만 고통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이들이나 가축들이 죽고, 가뭄이

계속되고, 폭우가 심해지고, 사냥거리가 사라지고 하는 일들의 원인이 주술사나 사제에 의해 일단 밝혀지기만 하면 ‘"고통"은 견딜 만한 것이 된다. 고통에 원인과 의미가 있고, 따라서 고통도 이제 하나의 체계 속에 끌어들여져 설명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109 어쨌든 신의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모든 역사적 사건은 그 자체로서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뚜렷이 모습을 드러내고 발전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유대 민족의 신은 원형적인 행위들을 창조한 동방의 신과는달리, 끊임없이 역사에 개입하고 사건들(침략,포위 공격, 전투 등)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는 하나의 인격이다. 그렇게 해서 역사적인 사건들은 신을 마주한 인간의 ‘"상황들"이 되고, 또한  바로 그런 점에서 그때까지 그어떤 것도 〔그사건들에〕부여해  줄 수 없었던 종교적인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그러므로신의 현현이라는 역사의 의미를 히브리인들이 최초로 발견했다는 것 그리고, 짐작할 수 있는 바대로, 그관념이 기독교에 의해 계승·확장되었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121 인도의 전반적인 사유에서 그렇듯이, 불교에서도 시간은 무한하다. 그리고 보디사트바는 모든 존재의 구원이라는 좋은 소식을 알리기 위해 영원히 강생한다.  시간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 존재의 억센 고리를  끊어버리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 조건의 무화이자 니르바나 Nirvana(열반)의 획득이다. 그런데 그 모든 ‘무량수와 헤아릴 길 없는 영겁 또한  구원의 기능을 갖는다. 무량수와 영겁의 파노라마를 관조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공포에 질리지 않을 수 없고, 자신이 이 무상한 삶을 수천 번 더  되풀이해야 하며 똑같은 고통을 끝없이 견뎌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디. 결국 이러한 깨달음이 〔시간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의 의지를  강화시키고, 존재자라는 자신의 조건을 결정적으로 초월하도록 부추기기 때문이다.


136 역사의 시기는 그 전체가 순환주기의 하강국면에 자리잡고 있다는 때 자체로부터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인도인들의 관점에서 칼리-유가에 속해 있는 모든 인간은 영적인 자유와  지복을 추구하도록 권장받는다. 그렇지만 그 어느 누구도 황혼기에  접어든 이 세계 전체의 궁극적인 소멸을 피할 수는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앞서 우리가 검토한 다양한 사유 체계의 관점에서도 역사의 한  시기는 동시대인들에게 도피의 여러 가능성들을 제시해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비극적이고,비장하고, 부당하고, 혼란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역사의 그 어떤 시기도 최종적인 파국의 전조일 수밖에없다.



제4장 역사의 폭압

142 역사를 주기적으로 폐기하든. 또는 어떻게든 역사의 보편적인 모델과 원형들을 찾아냄으로써 역사를 가치 절하하든, 또는 역사에 초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든(순환론, 종말론적인 의미 등) 어쨌든 전통적인 문명 속의 인간은 역사적인 사건에 그 자세로서의 내재적인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역사적인 사건을 자기  존재 양태의 특징적인 범주로 간주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두 가지 유형의 인류를 비교하는 것은 현대의 온갖 "역사주의"에 대한 분석을 전제로 하는데, 참으로 유익한 작업이긴 하지만 그러한분석은 우리를 이 글의 핵심 주제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게  만들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역사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역사적이고자 하는 인간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 현대 세계가 아직까지는 "역사주의"로 완전히 기울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두 가지 관념들, 즉 원형적이고 반역사적이라 부를 수 있는 고대적인 관념과 스스로 역사적이고자 하는, 헤겔 이후의 현대적인 관념 사이의 갈등조차도 아직은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143 우리는 앞선 장들의 숱한 예들을 통하여 전통적인 문명 속의 인간이 "역사"를 어떤 식으로 견디어냈는지 보았다. 주지하다시피 그들이 역사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방식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우주 창조의 반복과 시간의 주기적인 갱신을 통하여 역사를 주기적으로 폐기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인 사건들에 초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 초역사적인 의미는 위안을 줄 뿐만 아니라 일관된 논리까지도 갖추고 있는, 다시 말해서 인간 실존과 〈우주〉에 각각의 존재 이유를 부여하는 아주 명확한 사유 체계와 결합될 수 있는 의미였다.


144 또 하나의 전통적인 관념 — "영원한 반복"의 신화를 끌어들이든 그렇지 않든, 어쨌든시간의 순환과 주기적인 재생을 믿는 — 으로 눈길을 돌려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초기의 기독교 저술가들은 맹렬히 반대했지만, 그 관념이 마침내는 기독교 철학 속에도 스며들게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시간은 〈구원〉이라는 의미를 갖기 때문에 실재적이다. 하나의 일직선이 최초의 〈전락〉에서부터 최후의 〈구원〉에 이르는 인류의 여정을 그려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의 의미는 단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강생 Incarnation이 단 한 번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145 그리스도의 죽음은 여러 차례 다시 일어 날 수 있는, 반복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역사의  전개는 단 하나의, 근본적으로 유일한 사건에 의해 지배되고 방향이 정해진다. 결과적으로 인류 전체의 운명과 우리들 각자의 개별적인 운명도 역사와 삶의 시간, 즉 구체적이고 대체 불가능한 시간 속에서 단 한 번에 결정적으로 이루어진다.


152 역사의 압력이 어떠한 도피도 허용하지 않는 오늘날, 저 너머에서 그 어떤 초역사적인 징표나 의도도 예감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어떻게 역사의 폭압과 재앙 ━ 집단적인 강제 수용과 학살에서부터 원폭투하에 이르기까지 ━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 그런 폭압과 재앙이 경제·사회·정치적인 힘들의 맹목적인 작용일 뿐이라면, 나아가서 소수의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는 "자유", 그 소수의 사람들이 세계사의 무대 위에서 직접적으로 행사하는 "자유"의 결과일 뿐이라면, 인간은 어떻게 그것들을 감내할 수 있을것인가?


153 모든 영웅은 원형적인 행위를 반복한다고, 모든 전쟁은 선과 악사이의 투쟁을 되풀이한다고, 모든 사회적 불의는 구세주의 고통과(기독교 이전의 세계에서는 생장을 관장하는 신이나 신의 〈예고자>가 겪는  수난과) 동일하다고, 모든 학살은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최후를  반복한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그런 모티프들이 유치하냐 아니냐, 혹은  역사에 대한 그런 식의 거부가 항상 유효했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가 판단할 사항이  아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유일한 사실은, 바로 그러한 관점 덕분에 여러 세기 동안 수천만에 달하는사람들이 절망하거나 자살하지 않고. 또는 역사에 대한 상대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전망에서 필연적으로 비롯되는 영적 고갈 상태에 빠지지 않고 역사의 거대한 압력을 감내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161 이런 맥락에서의 믿음이란 온갖 종류의 자연 법칙으로부터의 절대적인  해방을 의미하고, 결과적으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자유, 〈우주〉의 존재론적인 규약에 개입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요컨대 믿음은  탁월하게 창조적인 자유이다. 달리 말하면 믿음은 인간이 창조에 협력하는 새로운 방식이고, 원형들과 반복의 전통적 지평이 극복된 이래로 최초로 유일하게 주어진 협력 방식이다.


161 또한 기독교는 현대적인 인간, 역사적인 인간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와 (순환적인 시간 대신에)지속적인 시간을 동시에 발견해낸 인간의 종교이다. 또한 신의 존재가 전통적·고대적인 문명의 인간에게 보다 현대인에게 훨씬 더 긴박한 요구가 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주목할 만하다. 현대인에게 역사는 반복이 아니라 역사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반면에 고대인은 역사의 폭압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 책에서 우리가 언급한 바 있는 온갖 신화들, 제의들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162 유대-기독교적인 의미의 믿음(=신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이 "발명"된 이후로, 원형들과 반복의 지평에서 떨어져 나온 인간은 오직 신이라는 관념에 의해서만 그 폭압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사실상 인간은 신의 존재를 전제할 때만 한편으로는 자유(자유는 법칙이 지배하는 〈우주〉에서 인간에게  자율성을 부여해준다. 혹은 달리 표현하자면 인간으로 하여금 〈우주〉 안에  새롭고 독특한 존재 양태 하나를 "창시"할 수 있게 해준다)를 획득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의 모든 비극에 초역사적인 의미가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다. 비록 현재의 인간 조건 속에서는 그 초역사적인 의미가 항상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현대인의 다른 모든 상황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절망으로 인도한다. 그 절망은 인간의 본래적인 실존성에서 비롯되는 절망이 아니라, 인간이 역사적인 세계 속에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절망이다. 그 세계 속에서 거의 대부분의 인류는 끊임없는 폭압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그 폭압이 항상 의식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런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는 명백히 "전락한 인간"의 종교임이 드러난다. 현대인이 돌이킬 수 없이 역사와 진보에  동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역사와 진보 모두 원형들과 반복의 낙원에 대한 결정적인 포기를 내포하는 일종의 전락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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