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12 -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이형식 옮김/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되찾은 시절 옮긴이 주 12 내가 어린 시절에 저승의 입구만큼이나 지구 밖의 것처럼 상상하곤 하였으나, 수포들이 가끔 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정사각형 빨래터에 불과한 비본느의 수원을 목격하는 순간 느낀 것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놀란 것은 질베르뜨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을 때이다. “혹시 원하시면, 우리가 어느 날 오후에 산책에 나서, 메제글리즈를 거쳐 게르망뜨에 갈 수 있으며, 그 길이 가장 아름다워요.” 내가 어린 시절에 품었던 모든 생각들을 무너뜨리면서, 그 두 방면이 내가 믿던 것처럼 그토록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님을 일깨워 준 말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가장 심한 충격을 준 것은, 그 체류 동안 내가 옛..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11 -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이형식 옮김/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1장 슬픔과 망각 2장 포르슈빌 아가씨 3장 베네치아 여행 4장 로베르 드 쌩-루의 새로운 면모 옮긴이 주 102 그리고 다시 앵까르빌부터 발백까지, 우리 두 사람이 서로 바래다주기를 새벽녘까지 무수히 반복하곤 하였던 그 여름의 감미로움을, 새벽이 나에게 다시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장차 기대할 것이 하나밖에 없었고―하나의 근심보다도 더 폐부를 갈가리 찢는 기대였다―그것은 알베르띤느를 언젠가는 망각하리라는 희망이었다. 내가 언젠가는 그녀를 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 내가 이미 질베르뜨를, 게르망뜨 부인을, 심지어 나의 할머니도 능히 망각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아직도 사랑하는 이들 ..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10 -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이형식 옮김/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갇힌 여인 2 옮긴이 주 334 그러나 문득 무대의 배경이 바뀌었다. 나의 앞에 다른 봄철 하나가, 더 이상 녹음 짙은 봄철이 아닌, 반대로 내가 이제 막 나에게 중얼거린 ‘베네치아’라는 명칭으로 인해 그 나무들과 꽃들이 순식간에 박탈당한 봄철 하나가, 정수만 남았고, 봄철의 것이로되 꽃부리들 지니지 않은, 따라서 5월이 도래하여도 오직 반사광으로밖에 그것에 화답할 수 없을, 또한 봄철에 의해 세공되었고, 짙은 사파이어의 반짝이되 고정된 자기의 나신으로 봄과 정확한 조화를 이루는, 더 이상 불순한 흙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결하고 푸른 물의 점진적인 발효에 의해 그 나날들의 길어짐과 따스해짐과 단계적인 개화가 대변되는..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9 -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이형식 옮김/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갇힌 여인 1 옮긴이 주 9 이른 아침부터, 아직 얼굴이 벽을 향한 상태로 누워 있어, 커다란 창문 커튼들 위로 스며드는 햇살이 어떤 색조인지 미처 간파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날씨가 어떤지 알아차리곤 하였다. 거리의 첫 소음들이, 습기에 의해 약해지거나 굴절되어 도달함으로써, 혹은 널찍하고 차가우며 맑은 아침의 반향성 크고 텅 빈 공간 속에서 진동하는 화살처럼 도달함으로써, 나에게 그것을 알려주곤 하였으니, 예를 들어, 첫 전차의 바퀴 구르는 소리가 자신이 빗발 속에서 움츠러져 떨고 있는지 혹은 창공을 향해 떠나고 있는지를 나에게 말해 주곤 하였다. 또한 아마, 그 소음들보다 더 빠르고 침투력 강한 어떤 발산물이 ..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8 -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이형식 옮김/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2부 2장 · 9 2부 3장 · 186 2부 4장 · 384 옮긴이 주 · 412 406 시각이란 얼마나 기만적인 감각인가! 인간의 몸뚱이란, 비록 알베르띤느의 것처럼 사랑 받는 몸뚱이라 해도, 불과 몇 미터, 아니 몇 쎈티미터만 떨어져 있어도, 우리들로부터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 몸뚱이에 속하는 영혼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어떤 일이 우리와의 관계에서 그 영혼의 자리를 난폭하게 바꾸어, 그 영혼이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우리에게 입증해 줄 경우, 우리는 와해된 우리 심장의 격한 박동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몇 걸음 떨어진 곳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었음을 감지한다. 우리들 속에, 그러나 ..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7 -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이형식 옮김/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1부 · 9 2부 1장 · 61 2부 2장 · 284 옮긴이 주 · 407 244 내 전존재의 도괴였다. 첫 날 밤부터 피로에 기인한 심장 발작에 괴로워하던 내가, 괴로움을 제어하려 애를 쓰면서, 목구두를 벗으려고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상체를 숙였다. 그러나 내가 목구두의 첫 단추를 건드리기 무섭게, 미지의 신성한 존재로 가득 채워진 나의 흉곽이 한껏 부풀어 올랐고, 연이어지는 흐느낌이 나를 뒤흔들었으며, 나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그렇게 나를 도우러 와서 영혼의 황량함으로부터 나를 구출해 낸 존재는, 여러 해 전, 유사한 비탄과 고독의 순간에, 나에게 더 이상 나 자신이라고 할만한 그 무엇도 없던..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6 -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이형식 옮김/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2부 1장 · 9 2부 2장 · 58 옮긴이 주 · 435 38 이제 할머니께서는, 당신께서 하시는 말씀을 우리가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직감하셨음인지, 단 한 마디 말씀도 하시지 않고 꼼짝도 하시지 않았다. 그러시다가 나를 알아보실 때면, 문득 호흡 곤란을 느끼는 이들처럼 소스라치시는 듯했고,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 하였으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 우물거리셨다. 그러시다 결국 당신의 무기력증에 제압당하시어, 머리를 다시 베개 위에 떨구신 채, 대리석으로 빚은 듯 근엄한 얼굴로, 두 손을 침대 시트 위에 가지런히 고정시키시거나, 혹은 손수건으로 손가락들을 닦으시려는 듯한 순전히 질료적인 동작에 골몰하시면서,..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5 -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이형식 옮김/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게르망뜨 쪽 1부 · 7 옮긴이 주 · 468 11 이른 아침에 들려오는 어린 새들의 지저귐도 프랑수와즈에게는 즐겁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위층 ‘하녀들’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소스라쳤고, 그녀들의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불편해져, 그 소리가 무슨 곡절인지 궁금증에 사로잡히곤 하였다. 우리가 새로운 거처로 이사를 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의 옛집 ‘7층’ 하인들이 덜 부산스러웠던 것은 아니나, 그녀가 그들을 잘 알고 있었던지라, 그들의 부산한 오고 감도 그녀에게는 우정 어린 무엇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가 고요함에조차 괴로운 관심을 쏟게 되었다. 또한 우리의 새 동네가, 전에 살던 동네를 스치고 지나는 대로가..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4 -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이형식 옮김/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2부 고장들의 명칭-고장 · 9옮긴이 주 · 468 11 두 해 후, 할머니와 함께 발백으로 떠났을 때에는, 질베르뜨와 관련하여 내가 거의 완전한 무관심에 도달해 있었다. 내가 새로운 얼굴이 발산하는 매력의 영향력 밑에 놓여 있었을 때, 그리하여 다른 소녀의 도움을 받아 고딕식 대교회당들과 이딸리아의 궁전들이나 정원들을 깊이 알게 되리라 기대하였을 때, 나는 우리의 연정이라는 것이, 특정 여인에게로 향한다는 그것의 특성상, 아마 실재하는 그 무엇이 아닐 것이라는 구슬픈 생각에 잠기곤 하였다. 왜냐하면, 유쾌한 혹은 괴로운 몽상들의 다양한 연상이 한동안 그 연정을 어떤 한 여인과 연계시킬 수 있어, 심지어 우리들로 하..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3 -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이형식 옮김/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1부 스완 부인의 주변에서 · 9옮긴이 주 · 329 11 노르뿌와 씨를 처음으로 만찬에 초대하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의 어머니께서, 두 사람 모두 그 전직 대사의 관심을 끌 만한데, 꼬따르 교수는 여행 중이고, 스완과는 왕래를 완전히 끊어 유감이라고 하시자, 아버지께서 대꾸하시기를, 꼬따르처럼 저명한 학자인 훌륭한 손님은 어느 만찬에서건 결코 결례를 범하지 않는 반면, 지극히 하찮은 교분들을 지붕 위에 올라가 외쳐대며 과시하는 버릇을 가진 스완은, 노르뿌와 후작이 틀림없이 그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을 빌려 ‘악취 풍긴다’라고 할, 일개 상스러운 허풍꾼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몹시 꼴불견이던 꼬따르의 됨됨이와, 사..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2 -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이형식 옮김/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2부 스완의 어떤 사랑 · 73부 고장의 명칭-명칭 · 317옮긴이 주 · 387 2부 스완의 어떤 사랑9베르뤼랭 내외가 구심점을 이루는 ‘작은 핵’의, ‘작은 덩어리’의, ‘작은 동아리’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조건 하나만 충족시키면 충분했다. 그러나 필요한 조건이었다. 그 조건이란 하나의 크레도에 묵묵히 동의해야 하는 것이었던 바, 그것의 신앙 조항들 중 하나는, 그 해에 베르뒤랭 부인의 후원을 받았으며, 또한 그녀가 ‘바그너의 작품을 그처럼 완벽하게 연주할 줄 안다는 것은 법을 어기는 짓이야!’라고 칭찬하던 젊은 피아니스트가, 쁠랑떼와 루빈슈타인을 아예 보이지도 않게 ‘처박을’ 만큼 능가하며, 의사 꼬따르가 진..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1 -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이형식 옮김/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옮긴이의 말 · 71부 꽁브레 · 25옮긴이 주 · 307작가 연보 · 341 1부 꽁브레 · 25 27 오랫동안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곤 하였다. 때로는 촛불이 꺼지기 무섭게 눈이 어찌나 신속히 감기는지, ‘내가 잠드는구나’ 하는 상념에 잠길 겨를조차 없었다. 그리고 반시간 후, 잠을 청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나를 다시 깨우곤 하였다. 아직도 손에 들고 있으리라 믿던 책을 제자리에 다시 놓고 촛불을 불어 끄려 하였던 것이다. 또한 자면서도, 내가 막 읽은 것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생각들이 조금 기이한 양상을 띠기도 하였다. 책의 내용들, 가령 어느 교회당이나 어떤 사중주곡, 프랑수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