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1 ━ 고대 중세 편


움베르토 에코의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1 - 10점
움베르토 에코.리카르도 페드리가 지음, 윤병언 옮김/arte(아르테)


서문 왜 철학인가? - Umberto Eco


I. 철학적 이성의 탄생

II. 철학자라는 지적 직업의 탄생과 성공

III. 플라톤의 사상

IV.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V.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과 학문

VI. 로마의 철학

VII. 제국 시대의 그리스 철학

VIII. 고대 말기의 전통 철학과 신학

IX. 고대인들을 바라보며

X. 수도승과 스승

XI. 철학자와 신학자

XII. 복수의 진리


역자의 글 깊이의 철학, 넓이의 철학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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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왜 철학인가? - Umberto Eco

8 철학이 지혜에 대한 사랑을 뜻한다는 어원적인 의미를 제외하고 나면 사실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일은 상당히 까다로워진다. 그 이유는 물론 철학이라는 말의 의미 역시 수세기에 걸쳐 다양하게 변화했기 때문이다.


17 정말 중요한 것은 모든 철학가들이 어떤 구체적인 정치적•사회적•문화적 환경 속에서 살았고, 따라서 이들이 철학하는 방식도 철학과는 무고나한 종류의 요인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세계를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던 고대 철학자들이 신들을 섬기는 동시에 전쟁을 일삼던 시대, 자유인뿐만 아니라 노예들이 존재하던 시대에 살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철학이 다양한 종류의 요인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우리 시대 철학자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현대 철학자들 역시 사회적 분쟁과 독재의 등극에 영향을 받았고 기술 발전이 가져온 새로운 형태의 문제들 역시 우리의 사고방식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르네상스 및 후기 르네상스 철학자들 대부분이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케플러의 천문학 발견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이 과학자들 역시 르네상스 이전 혹은 동시대의 철학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던 것 또한 사실이다.


23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은 나름대로 다양한 표현 방식을 통해 특정 계층의 관심을 모으고 의도적으로 혁신을 꾀하면서 전대미문의 학설들을 내놓았던 상당히 다양하고 이질적인 성격의 인물들에 의해 탄생했다. 그리스 철학은, 예를 들어 서사시적 표현의 장엄함을 향한 파르메니데스와 엠페도클레스의 갈망으로부터, 혹은 데모크리토스가 각고의 노력 끝에 도달한 '학문'에 가까운 산문을 토대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니체가 말했듯이, 결국 소크라테스 이전의 사상가들은 모두 "한 덩어리의 돌로 깎아 만든 완전체"에 가까운 철인들이었다.


I. 철학적 이성의 탄생

22 밀레토스에서 그리스 철학이 탄생한 것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그리스의 '기적' 때문이라기 보다 고대 도시국가들이 분명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면서 일어난 또렷한 역사적, 문화적 변화 때문이다.


43 그리스 문학의 태동기, 즉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시대에 '신화'는 허구적이거나 초자연적인 사건들로 가득한 '담론' 혹은 '이야기'가 아니라 '의심할 여지없이 권위 있는' 이야기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44 신화란 결국 귄위 있는 인물들의 발언으로 전달되는 귄위 있는 담론이었다고 볼 수 있다.


44 신화라는 말이 근대에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살피려면 먼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고대의 신화적인 이야기들을 가리키기 위해 신화라는 단어 대신 우화, 즉 라틴어의 '파불라'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44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그리스어 mythos를 18세기에 다시부활시킨 인물은 이탈리아의 비코와 독일의 하이네다. 18세기 이후로 신화라는 용어는 다난한 변신의 길을 걷게 된다. 이제 '신화'는 더 이상 환상적인 이야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복잡하고 세련된 동시에 매력적인 의미를 내포하거나 상징할 수 있는 이야기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49 그리스인들은 시간의 개념을 떠올리며 항상 살 날의 기한을 생명력과 결부시켰다. 그리스어 아이온 Aion은 삶, 생명력을 뜻했지만 동시에. 삶의 기한, 나이, 심지어 플라톤 이후로는 영원함을 뜻하기도 했다. 한 인간이 살아온 기간을 가리키며 지나간 시간을 의미하는 아이온은 크로노스 chronos, 즉 측량된 시간, 예를 들어 날이나 계절과는 정반대되는 개념이었다. 아이온은 생명력으로서의 시간이고 크로노스는 계산된 시간이다. 시간에는 아이온과 크로노스 외에도 카이로스 kairos, 즉 순간이있다. 카이로스는 예기치 않은 순간 놓치지 말아야 할 절호의 기회, 지속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발견되는 한 순간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카이로스는 인간의 행동과 시간의 만남이다. 무분별한 시간과 시대의 흐름 속에서 카이로스는 지금과 일치한다. 결코 반복될 수 없는 순간 따라서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순간 카이로스 속에서 시간은 절정에 달한다. 시간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물론 그것을 측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시간을 재려면 무엇보다도 자연적인 현상을 주의 깊게 바라봐야 한다.


58 피타고라스의 공동체는 일종의 철학 학교였으나 흔히 '비교적인' 지식으로 평가되는 스승의 가르침에 접근할 수 있는 위계적인 자격 조건을 토대로 구축되었다. 아울러 특별한 가르침에 대해 침묵해야 할 의무와 정규 모임 및 의례에 참석해야 할 의무 등 계율에 따라야 하는 교단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58 이 시기에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은 대부분 과두정 체제를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59 사실상 모든 학문적 발견의 공로를 학파의 창시자 피타고라스에게 돌리려는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의 변함없는 성향은 고대인들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피타고라스만의 독창적인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이에 비해 후세대 철학자들이 이루어 낸 발전된 면모는 무엇이었는지 구분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다.


59 피타고라스가 직접 주장했다고 확실할 수 있는 사상들은 모두 다른 아닌 영혼의 불멸과 이 육신에서 저 육신으로 움직이는 영혼의 이주와 관련된다.


61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은 사물들이 숫자를 모방한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와 같은 피타고라스학파의 사유가 감각적인 사물과 이데아의 관계를 모방관계로 이해했던 플라톤의 생각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보았다.


67 '철학적 서시시'는 문학과 철학의 중간에 위치하는 특별한 장르를 가리키는 말로, 좀 더 정확하게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시처럼 6행 단위로 쓰인 장편의 철학적 산문시를 가리킨다.


69 기원전 6세기경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새로운 현자들, 즉 철학자들은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지혜를 요구하면서 '견해'를 뛰어넘어 '진실'을 탐구하고 즐거움 밖에는 선사하지 못하는 신화적인 서술을 철학적 담론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그런 차원에서 철학자들은 시인들을, 특히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를 비판했다. 플라톤이 시와 철학 사이를 오래된 '적대관계'로 규정하면서 불거진 논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74 로마에서는 루크레티우스가 에피쿠로스 철학과 6행 서사시를 접목시킨 형태로 마지막 철학적 서사시를 쓰게 된다.


II. 철학자라는 지적 직업의 탄생과 성공

107 소피스트란 누구를 말하는가? 이는 플라톤의 대화록 『소피스트』에서 바로 소크라테스가 던졌던 질문이다. 고르기아스나 트라시마코스, 프로디코스 같은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철학자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그렇다면 이 소피스트들은 과연 '무엇'이었나? 이들은 말 그대로 앎의 전문가들, 다시 말해 사고와 언변에 탁월한 능력과 기술을 가졌던 이들이며 오늘날의 문화 비평가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다. 소피스트들에게는 분명히 이상적이었을 아테네의 청중은 그들에게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의 철학 강의나 플라톤이 그의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던 철학을 기대하지 않았다. 아테네의 청중은 히피아스의 백과사전적인 지식이 증명되는 과정을 목격하거나 담론을 통해 한 논제의 증명과 반대되는 논제의 변론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줄 알았던 프로타고라스의 뛰어난 논쟁술을 보기 위해 많은 돈을 지불하고 몰려들었다.


107 소피스트들이 설파하던 지식은 유용성과 분리될 수 없는 실용적인 성격의 것이었고 소피스트는 시민들이 실생활에서 비롯되는 실질적인 문제들을 주제로 논쟁을 펼치거나 이에 대해 입장을 취할 수 있도록 이들을 교육하는 전문 교육자로서 철학을 가르쳤다.


110 다양한 지역에서 모여든 소피스트들은 각자의 출신 못지 않게 다양한 이론적 성향과 정치적 입장을 고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그리스 전통문화의 가장 정통한 상속자이자 계승자로, 동시에 정치적 수단을 가르치는 스승이자 상당히 세속화된 지식체계를 보유한 지식인으로 소개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지배계층을 상대로 수업료를 받으면서 가르쳤고 정부의 관료 혹은 외교관을 겸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소피스트들은 윤리학, 정치학, 수사학뿐만 아니라 신학과 인식론, 언어분석 등을 가르쳤다.


128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소크라테스는 세 번의 원정 동안 보병으로서 뛰어난 면모를 과시한 적이 있다. 기원전 432년 칼키디케 반도에서 벌어진 포티다이아 전투에서 소크라테스는 부상을 당한 알키비아데스의 생명을 구하는 공을 세운다.


136 플로톤이 사랑을 주제로 쓴 대화록 『향연』에서 알키비아데스의 목소리를 통해 총체적으로 부각되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그 어느 누구와도 닮지 않았고 사티로스만 연상시킬 뿐인 소크라테스의 유별남과 독특함이다. 유별나다는 뜻의 그리스어 atopia는 문자 그대로 설 '자리가 없는', 즉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45 어떤 식으로든 민주주의(역사학자 루치아노 칸포라가 주목한 것처럼, '민중의 지배'를 뜻하는 민주주의는 민중 정부의 폭력적이고 자유 파괴적인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용어다)가 도래한 정확한 시기를 밝히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가장 적절한 해를 고른다면 기원전 461년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해에 에피알테스와 페리클레스는 혁명을 통해 아레이오스 파고스를 실각시키고 이 기구가 행사하던 대부분의 권력을 폐지시키면서 공공사업에 대한 귀족들의 통제권을 제도적으로 축소시켰다. 물론 민주주의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다. 예를 들어 공직자들의 보수 체제는 몇 세대가 지난 다음에야 완전히 정립되었다.


147 여하튼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테네의 민주주의 역시 초기에는 ‘선택과 배제’의 이원론적인 원칙을 적용했다는 사실이다. 어떤 형태의 정권하에서든, 시민이 된다는 것은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계층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어딜 가든 특권 보유자들은 외부인이 특권 계층에 가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 제한하려고 노력했다.


147 아테네 민주주의의 기반은 네 가지 원칙, 즉 (1) 평등, (2) 선거, (3) 보수, (4) 참여에 의해 구축되었다고 볼 수 있다. 


148 공동체와 관련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시민의 권리는 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간을 낼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이를 해결할 목적으로 등장한 것이 공직자들에게 소액의 보수를 지급하는 정책이었다.


152 패권을 장악한 아테네는 민주주의 체제를 선호함으로써 하나의 구체적인 정치적 방향을 제시했다. 하지만 도시국가들의 입장에서 가장 두려웠던 것은 델로스 동맹에서 탈퇴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이유, 즉 탈퇴가 아테네의 즉각적인 군사개입이라는 위협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152 페리클레스 시대의 광명은 이처럼 빛과는 정반대되는 어두운 측면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모두 폭력적이고 냉소적인 제국주의의 특징이었다. 기원전 300년 대에 드러나게 될 온 갖 어려움을 고려했을 때 사실상 유일한 해결책은 '제국'이었다.


III. 플라톤의 사상

183 플라톤을 알고 이해한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플라톤의 저서를 토대로 그의 철학을 정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그의 철학이 안고 있는 수많은 내부적인 모순과 변화무쌍한 전개를 집필 시기에 따라 다양한 각도에서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이론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가 제시했고 이어서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철학자들이 나름대로 답변을 시도해 왔던 일련의 질문들을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플라톤이 남긴 사유의 숨소리를 고대 말기의 신플라톤주의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에서, 인간이 사물을 이해하는 방식에 관한 중세의 논쟁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플라톤주의에서, 독일의 관념주의 철학에서, 현대의 수많은 논리학자들과 과학자들의 사유 속에서 다시 들을 수 있다.


213 죄수는 이내 동굴로 되돌아간다. 동료 죄수들에게 되돌아가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은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돌아가서 그들의 생각과 도덕적-정치적 행위를 진정한 가치와 진정한 앎을 위해 사용하도록 설득해야 하는 것이다.


223 철학적 앎은 골격을 갖추면서 시나 신탁의 형태를 통한 지혜의 메시지와 소피스트들의 낭독이나 기술 매뉴얼을 통한 산문 사이를 오가며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IV.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235 플라톤주의를 비판하면서 보편적인 형식들을 초월적 천상의 세계로부터 물리적 세계로 끌어내린 아리스토텔레스는 후세대들에게 실체에 대한 사유, 형상과 질료, 잠재력과 행위에 대한 사유뿐만 아니라, 연역법과 귀납법이라는 사고의 도구와 종과 속의 분류법을 유산으로 남겼다. 이러한 분류법은 다양한 각도에서 수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대 사상가들에게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268 흔히 '교육'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파이데이아 paideia(어두 '파이스 pais'는 아이를 뜻한다)는 가족과 선생과 사회기구의 관리 하에 한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필요한 능력과 가치관을 점차적으로 취득 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총제적인 과정을 의미한다. '파이스'로 시작되는 또 하나의 용어 파이디아 paidia는 놀이를 뜻한다. '파이데이아'는 바로 유아적 놀이의 세계에서 진지한 활동의 세계로 인도하는 과정을 뜻한다.


269 소피스트들의 교육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언어의 특성과 여러 종류의 담론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고, 질문에 답하는 능력과 다양한 논쟁 형태에 적응할 수 있는 능 력을 키우고,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 이러한 지식을 활용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담론이 이루어지는 장소와 환경에 대해서 (무엇보다도 재판이 나 정치 집회에 대해), 아울러 담론에 귀를 기울이는 청중의 감성적이고 지적인 수준과 특성에 대해서도 숙지 할 필요가 있었다.


274 일반인들 역시 전문가들에 대한 의견을 표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곧장 대두되는 또 다른 문제가 존재했다. 이미 전문화되어 있고 상당히 복잡하게 세분화되어 있는 분야의 전문 지식을 어느 정도까지 습득해야 하고 철학을 포함한 여러 학문 분야를 얼마나 높은 수준으로 교육 과정에 포함시켜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전통적인 답변은 이른바 '폴리마티아 polymathia', 말 그대로 '많은 것들을 이해했다'는 뜻의 백과사전적인 앎이었다.


277 아테네는 그리스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이제 철학을 삶의 가장 고귀한 이상으로 보지 않고 훌륭한 시민과 일치하는 인간형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교육 과정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현실적인 차원에서 결과적으로 승리를 거둔 것은 이소크라테스였다. 헬레니즘 시대부터 철학과 수사학이 융합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수사학은 더 이상 철학의 상극이나 근본적인 대안으로 이해되지 않고 철학을 완성하는 요소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278 그리스의 파이데이아에 상응하는 것은 라틴 민족의 후마니타스 humanitas였다. 후마니타스는 인간만의 독특한 특징과 지적이고 도덕적인 장점들을 완성 단계로 끌어올리는 문화를 의미했다.


279 평범한 삶에서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철학적 삶으로 일종의 개종이 이루어졌던 셈이지만 이에 비하면 새로운 종교 그리스도교를 통한 개종의 경험은 훨씬 더 강렬했다. 그리스도교는 사실상 소수의 엘리트층이나 그리스인들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모두를 향해 열려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정황 속에서 진정한 삶의 본보기가 그리스도를 통해 제시된 만큼 철학 교육은 설 자리를 잃거나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V.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과 학문

293 철학적 대응과 비교를 통해 정신세계의 발전을 꾀하는 경향이 헬레니즘 시대 내내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면 한편으로는 우리가 철학의 강도 높은 ‘문서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자들은 대부분이 왕성한 필력을 지닌 작가들이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분량이 늘어난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의 철학 문헌들은 해석자들과 해설가들의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과정은 철학의 역사뿐만 아니라 여러 학파들의 개별적인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는 문헌들의 수집과 목록 작성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증폭시켰다. 철학자들의 전기나 마찬가지였던 ‘계승자들’이라는 장르는 철학자들이 끼친 영향과 스승과 제자 간의 관계 등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었고 헬레니즘 시대 초기에 이미 체계를 갖춘 장르로 발전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철학자들이 철학을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많은 철학자들이 자신이 속한 학파 창설자의 전기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창설자의 전기가 곧 그들의 철학적 정체성을 보장해 주었기 때문이다.


299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사후의 삶을 믿지 않았고, 인간의 존재를 육체와 영혼의 결합으로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혼 역시 육체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종류의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따라서 육체의 소멸과 함께 파괴된다고 보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에게 불행을 가져다 주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들 가운데 하나다.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에피쿠로스 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바로 죽음이 한 존재의 최종적인 소멸을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이를 감안했을 때, 저 세상이라는 근거 없는 곳에서 벌이나 상을 받을 생각을 한다는 것은 분명히 비이성적이라고 본 것이다. 특히 저 세상에서 받을 상을 확보하기 위해 이 세상에서 피와 땀을 흘려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모든 불안과 걱정은 따라서 아무런 근거가 없는 허황된 근심에 불과했다.


304 스토아학파의 소크라테스주의가 보여주는 가장 흥미로운 특징 중에 하나는 이른바 '윤리적 지성주의'의 정립이다. 이는 선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필연적으로 뛰어난 기량을 동반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생각 속에 함축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스토아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기량 arete과 앎 episteme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스토아 철학자들은 뛰어난 정신적 기량의 옷을 입고 있어서 평범한 인간과 전적으로 구별되는 현자 Sophos만이 기량과 앎을 지배 할 수 있다고 보았다.


VI. 로마의 철학

361 포에니 전쟁의 종결을 기점으로 서로마 제국의 몰락에 이르는 시기에 지중해를 중심으로 발달한 철학을 라틴 혹은 로마 철학으로 분류하는 데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유가 저급한 철학 소개서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로마 철학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실제로 키케로나 세네카 혹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같은 사상가들이 그리스 문화의 주제들, 특히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을 답습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에게 지적 엄격함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아울러 루크레티우스와 같은 거인이 존재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374 키케로는 플라톤의 대화록을 공부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출판된 저서들뿐만 아니라 여러 철학자들의 많은 저서들을 직접 읽고 섭렵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엇보다도 변증법적인 방법론과 수사학에 있어서 그의 스승이 되어 주었다. 키케로는 야심에 찬 당시의 모든 로마인들처럼 정치인에게 필요한 논쟁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375 비록 철학에 관한 그의 관심이 어렸을 때부터 또렷이 드러났고 살아가는 동안에도 계속 유지되었지만 키케로는 말년이 되어서야 (기원전 46-44년), 다시말해 카이사르의 독재가 시작되면서 정치 활동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을 때부터 철학 책을 쓰기 시작했다.


375 「호르텐시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로펨티콘』을 모델로 쓰였고 철학을 권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378 키케로가 고안해 낸 수많은 용어들, 예를 들어 qualitas(특성), perceptio(인식), evidentia(명료함), morals(윤리적인), indifferens(무관심한), probabilitas(개연성) 등이시간이 흐르면서 본격적인 철학 용어로 자리 잡았다.


VII. 제국 시대의 그리스 철학

449 고대 말기의 철학을 지배했던 사조는 플라톤주의 혹은 신플라톤주의다(신플라톤주의라는 말은 플로티노스와 그의 후계자들의 사상을 가리키며 19세기초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서기 3세기에서 4세기에 이르는 동안 실제로 플라톤주의는 또 다른 종류의 사상들을 수용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정신적인 여력을 지닌 유일한 학파였다.


VIII. 고대 말기의 전통 철학과 신학

471 트라야누스에서 콘스탄티누스에 이르는 시대(1~4세기)는 한마디로 문화적인 갈등의 시대였다. 한편으로는 모든 민족들이 동일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며 정치적으로 안정된 평화의 시대를 살았다. 웅변가들이 도시들을 순회하며 연설을 하고, 의학이 놀라운 발전을 이루고, 수학과 음악과 천문학이 발달하고, 압력을 이용한 기계와 첨단 무기들이 발명되고, 광학이 꽃을 피웠다. 문화의 성장과 함께 체제를 갖춘 교육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바로 이 시기에 전인교육, 즉 모든 분야를 골고루 섭렵한 조화롭고 완전한 인간상을 추구하는 교육 개념이 생겨났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한 의미의 독창적인 창조 활동이 부재했고 과거의 문화 전통을 빠짐없이 습득하고 해석하며 발전시키는 데 주력했을 뿐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전통 문화의 보급이 새로운 것의 창조에 우선했기 때문이다.


472 그리스도교는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로마 제국이 인정하는 종교로 선포되었고 그 다음에야 지배 계층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이시기의 그리스도교는 (비록 같은 시기에 테르툴리아누스, 클레멘스, 오리게네스와 같은 중요한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이 활동했지만) 여전히 노예들의 종교였고 철학자들의 눈에는 수많은 신비주의 종파들 가운데 하나로 비춰졌을 뿐이다.


472 회의주의나 박애정신 외에도 고대 말기의 종교 사상을 특징 짓는 또 다른 요소는 신비주의였다. 철학자들 역시 지극히 난해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이성적인 차원의 진실을 제시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따라서 이성을 초월하는 신의 계시나 환상을 통해 직접적인 깨달음을 줄 수 있는 계시적인 성격의 진실이 필요했다.


474 예수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이 차지하던 비중과 이들이 모세의 율법을 반드시 지킬 필요는 없다는 확신이 바울의 강력한 영향으로 더욱 확고 해지면서 그리스도교와 유대교가 차별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474 유대교는 이어서 73년과 135년 두 번에 걸쳐 패배로 끝난 로마와의 전쟁(절정에 달했던 해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70년이다) 이후에 율법을 토대로 재건의 길을 걸었다. 그리스도교도들과 그리스도교도가 아닌 유대인들은 고유의 관습과 이데올로기를 선택적으로 정립하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다.


476 '그리스도교도'라는 명칭은, 아마도 1세기말 혹은 그 이후에나 집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도 행전」의 내용을 기준으로, 안티오키이아의 예수 추종자들을 부를 때 주로 공동체 외부인들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했고(11장 26절) 따라서 얼마든지 유대교 내부의 종파를 일컫는 용어로 사용될 수 있었다.


477 이러한 선별과 배척 과정은 장소와 배경에 따라 상이한 방식과 속도로 진척되었다. 서기 100년경에 요한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복음서는 예수를 신의 계시자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과 예수의 대척 관계를 언급한다. 이러한 종류의 시대착오적인 설정이 이 복음서에 고정된 예수의 이미지를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발견하던 신도들 무리가 서기 100년경에 직접적으로 경험했던 상황이 예수의 삶에, 즉 과거에 그대로 투영되었다는 전제하에 설명 될 수 있다. 요한은 이러한 상황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회당에서 쫓아내기로 작정했다."(9 장 22 절) 예수가 살아 있었을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들었을 상황을 토대로 하는 이런 식의 표현은 66년에서 73년 사이에 일어난 유대인 반란이 처참하게 실패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던 시작된 참담한 시대에 예수를 메시아로 바라보기 시작한 유대인들을 향해 유대 사회가 표명했던 적대감을 그대로 반영한다.


495 물론 복음은 사회적으로 아주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서도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 비록 본격적인 사회 혁명을 예고했던 것은 아니지만 신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가난한 자와 약자들을 위한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빌레몬서」에서 읽을 수 있듯이 바울은 도망쳤던 노예 오네시모를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 보낸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보다 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부유한 일원들의 후원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의 봉사를 통해 약자와 가난한 자들 누구보다도 과부와 고아들을 도왔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활동이었다. 사회보장제도나 연금제가 전혀 없었던 시대에 이러한 후원과 봉사활동은 상당히 매력적이었고, 예수를 믿는 이들이 기근이나 전염병과 같은 재해가 닥쳤을 때 서로를 돕는다든지 강제 노역을 하던 죄수들과 노예들을 돕고 가난한 자들의 장례를 치러주는 활동 역시 비슷한 효과를 발휘했다.


524 영지주의자는, 병든 세상의 죄수임에도 불구하고, 신성한 부활의 일꾼으로 살아간다. 신은 오로지 인간의 협력을 통해서만 근원적인 분열을 복구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구원은 그의 행위가 아니라 초월적인 앎을 통해 이루어진다. 인간은 세 종류로 구분된다. 물질에 얽매이며(hyle) 구원의 희망을 잃은 인간이 존재하는 반면 심적(psiche) 단계에 머무는 인간(어떤 교리에 따르면 바로 그리스도교도들을 말한다)과 앎을 통해 신성한 세계에 복귀를 희망할 수 있는 영적(pneuma) 인간이 존재한다. 영지주의는 귀족주의적이다. 완벽한 이들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세상의 희생양인 인간은 회복을 위해 스스로가 지닌 본성의 물질적인 면을 증오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영지주의자는 가장 기본으로 육체와 생식 활동 자체를 경멸한다. 이러한 특징은 후세의 영지주의 종파들에서도 계속 유지되었으며 카타리파의 경우 육체에 대한 경멸은 자살 예식으로까지 이어졌다.


IX. 고대인들을 바라보며

556 중세 철학의 다양성을 하나의 공통점으로 요약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확실하게 이해하고 싶다면 아마도 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사망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등장까지 장장 8세기가 걸렸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사실 천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생각하는 방식이 불변했으리라고는 상상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중세 사상에 접근할 때에는, 일관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로 다양성 속에서만, 즉 중세 사상을 구축하는 다양한 전통 사상들의 공존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X. 수도승과 스승

617 서방 세계가 서기 천 년 이후로 거의 모든 분야에서 꽃을 피우며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실제로 11세기와 13세기 사이에 정치, 사회, 예술, 경제, 기술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활력의 회복과 사상의 개화 현상에 대해서는 동시대인들도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었고, 철학자들 역시 이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지적인 차원의 부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전 시대의 지식세계가 주로 전통적 지혜에 대한 해설의 형태를 띠었던 반면 이 시기에는 혁신 자체를 문화로 간주하는 관점이 구체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 유명한 경구의 표현대로 당대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장이로 고려했다는 사실, 즉 고대인들에 비해 부족한 능력을 지녔지만 그들에 비해 훨씬 더 넓은 시야를 가진 것으로(이 경구를 어떤 식으로 해석하든 간에) 간주했다는 사실은 탐구 활동 자체가 어떤 식으로든 혁신을 가져온다는 생각이 당시에 얼마나 널리 퍼져 있었는지 보여 준다.

이러한 혁신의 숨은 공신은 의심할 여지없이 도시였다. 경제 발전과 인구 증가에 힘입어 도시는 사회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차원에서 다시 주인공으로 돌아왔다. 산과 숲의 침묵 속에 가라앉아 있던 중세 초기의 수도원 학교에서 도시에 세워진 학교로 대이동이 시작되었고 도시에서 가르치는 교수들은 상인이나 장인 같은 직업과 다름없는 전문직으로 받아들여졌다.


690 근대에까지 살아남았을 정도로 유명했고, 중세의 정신세계를 가장 심오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난쟁이와 거인 이야기다. 이 경구에 따르면, 우리를 앞서간 선조들은 거인이며 우리는 그들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쟁이들에 불과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그들보다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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